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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남설 Apr 13. 2021

사람에게도 '댕댕이집'이 필요하다

무려 사바나 초원이 심은 유전적 본능이란다

'개통령' 강형욱이 강아지를 대하는 법가르칠 때 곧잘 나오는 지적 하나가 바로 집의 위치다. 개통령의 지침은 대략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1) 집을 벽에 붙여 강아지가 집에 있을 때 벽을 등지게 해야 한다. 2) 가능한 한 집안을 널리 볼 수 있는 자리에 둬야 한다. 3) 사람 가족이 자주 다니는 동선에서 다소 거리를 둬야 한다.


핵심은 강아지가 등 뒤쪽이 안전하다고 느끼면서 언제든 사람 가족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곳에 두되, 사람 가족이 집안을 다닐 때마다 강아지가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곳에 두면 안 된다는 것이다. 강아지 역시 동물, 특히 한때는 야생동물이었던 터라 경계심이 강하다. 사람 가족처럼 신뢰할만한 대상이 아니면 뒤를 내주지 않는 습성이 있다. 또 강아지는 자신을 챙겨주고 놀아주는 사람 가족의 위치를 항상 궁금해 하지만, 때로는 집에서 조용히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하는 습성 역시 지녔다. 이 같은 집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경우 강아지는 상시적인 불안을 겪는다. 그 감정이 오래 누적되면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한다. '세상에 나쁜 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개집은 강아지가 안전하다고 느끼면서 자극이 지나치게 많지 않은 곳에 둬야 한다.  Photo by Kojirou Sasaki on Unsplash

강형욱이 전하는 '댕댕이집' 위치 선정 논리는 강아지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은 물론, 아주 사회화된 세계에서 살지만 동물적 본능이 유전자에 각인된 인간 역시 '안락한 개집'의 조건을 원한다.


간단한 예로 20층부터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보면, 한 명씩 탈 때마다 모서리 자리부터 채우는 게 보통이다. 19층 여자는 안쪽 왼편 모서리에, 15층 남자는 안쪽 오른편 모서리에, 13층 남자는 문쪽 왼편 모서리에, 9층 여자는 문쪽 오른편 모서리에…. 19층과 15층 사람은 벽에 등을 기댄 채로 누가 타고 내리는지 관찰할 수 있다. 나중에 탄 13층과 9층 사람은 안쪽 모서리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었지만 차선책을 택했다. 이들은 서로 다른 탑승자에게 짐짓 관심 없는 척하지만, 실은 평소보다 신경이 곤두서 있을 게 틀림없다. 다른 탑승자의 작은 움직임에도 촉각을 세운다. 평소 인사를 나눈 이웃 관계나 직장 동료가 아니라면 어색하면서도 서로 경계하는 분위기가 흐르기 마련이다.


어쨌든 이렇게 네 사람이 각각 모퉁이를 하나씩 점하면 그나마 평화로운 균형 상태가 유지된다. 하지만 만약 13층 남자가 엘리베이터 한가운데에 섰다면? 이미 19층 여자와 15층 남자의 평화가 깨졌을 것이다. 비록 등 뒤에 벽이 있는 귀퉁이 자리를 확보했지만 다른 탑승자와 '적절한 거리'가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3층 남자는 뭔가 불안정하거나 눈치가 없거나, 심지어 위험 사람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엘리베이터는 네 귀퉁이부터 사람이 들어찬다. Photo by Hao Pan on Unsplash

조경학의 '전망-은신처 이론(prospect-refuge theory)'은 개집과 엘리베이터 안의 위치 선정을 설명하는 논거 중 하나다. 인간은 탁 트인 풍경을 보길(전망) 원하면서도 자신의 노출은 최소한으로 줄이길(은신) 원한다는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선 그나마 귀퉁이가 전망과 은신처를 가장 잘 확보할 수 있는 곳이다. 이 본능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현생 인류가 지구에 출현한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아프리카 사바나 초원에서의 생존 경험이 유전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바나에선 자신의 몸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되도록 숨기면서도, 식량과 적을 탐지할 수 있도록 열린 전망을 확보해야 했다는 것이다.


엘리베이터 구석자리의 전망은 혹시 나를 위협할지도 모르는 낯선 이에 대한 관찰 정도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끝까지 올라가면 나오는 펜트하우스에서의 전망은 정말 탁 트인 풍경이다. 동시에 누가 거쳐서 올라가거나 내려올 일이 없는 꼭대기층은 은신처도 된다. 현대 도시인이 수렵·채집으로 살아가지는 않지만, 유전적 본능은 충분히 살아있을 수 있다. 그래서 전망-은신처 이론은 고층아파트 선호 취향을 설명하는 근거로도 쓰인다.


남의 떡 같은 아파트까지 가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사소하지만 소중한 전망-은신처가 하나씩 있을 것이다. 지하철에서 일곱 칸으로 나뉜 긴 의자는 가장자리, 가장자리에서 한 칸씩 띄운 자리, 그리고 나머지 자리 순서로 들어찬다. 학창 시절 수학여행 갈 때 탄 버스에서 맨 뒷좌석은 반에서 가장 힘센 놈 혹은 가장 나대는 놈의 자리다. 그 친구들은 그 누구보다 전망-은신처가 필요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맨 뒷자리를 선호하는 친구들도 비슷한 경우다. 카페에 가거나 레스토랑을 예약할 때도 구석진 자리를 찾는다. 그런 자리에 앉을 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벽을 마주 보고 앉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왕이면 벽을 등지고 앉아 가게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자리를 원한다. 이른바 '상석'이다. 아니면 통유리를 통해 야외 전망을 훤하게 볼 수 있는 자리를 찾거나.

지하철의 긴 의자는 가장자리, 가장자리에서 한 칸 띄운 자리 순서로 채워진다. Photo by Antonio DiCaterina on Unsplash

내게는 어느 카페가 그런 전망-은신처를 제공하는 공간이다. 스페셜티 커피뿐만 아니라 건축과 인테리어로도 호평받는 브랜드인데, 몇 개 지점은 그 공간 구조가 서로 유사하다. 일종의 '건축 프로토타입(설계의 표준·기본이 되는 원형)'을 적용한 듯하다. 이 카페는 감히 손님의 자리는 가장자리로 내몰고, 넓은 가운데 공간을 직원에게 내주는 특이한 구조를 띤다. 아마도 '커피공장' 이미지를 갖추려고 생산의 공간(=직원의 공간)을 중심에 둔 것 같은데, 바로 이 역전된 구성이 전망-은신처 이론을 카페에 구현했다.


카페는 장방형(직사각형) 복층 구조이다. 일단, 카페의 아래층 가운데 넓은 공간이 직원들의 공간이다. 손님의 공간은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에 빙 둘러 배치돼 있다.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이 저마다 본능적으로 모서리 공간을 차지하려고 하는 경향을 반영한 듯한 구성이다. 가장자리에서 커피를 마시는 손님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가운데로 모인다. 직원들이 분주하게 커피를 내리거나 빵을 내오고, 주문을 받는 역동적인 모습이 이 카페의 중심 풍경이 된다(아래 큰 사진, 작은 사진 중 오른쪽). 또 카페에 막 들어온 손님들이 자리를 찾으며 두리번거리거나 주문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역시 가장 즐거운 일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사람 구경'이다.


위층은 아래층과 바닥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바닥의 대부분을 시원하게 절개해 아래층과 위층이 단절되지 않고 어디서나 시야에 들어오는 한 덩어리의 공간을 만들었다(아래 큰 사진, 작은 사진 중 왼쪽). 위층은 뻥 뚫린 채 가장자리에 가느다란 복도 같은 공간만 남겼는데, 그 폭은 테이블 하나가 들어가고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다(아래 작은 사진 중 가운데). 여기에 테이블들이 일정 간격으로 배치돼 있는데 이 자리들이 인기가 가장 좋다. 방문객들은 그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며 치열한 눈치싸움을 벌인다. 그 자리에서는 다른 사람의 동선으로부터 독립되고 안정된 공간을 확보했다는 느낌을 받는 동시에 카페 공간 전체를 위에서 아래로 한눈에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테라로사 강릉본점(왼쪽, 오른쪽)과 서종점(가운데, 위 큰 사진)은 가장자리에 손님 공간, 중앙에 직원 공간을 둬 전망-은신처를 구현했다. 테라로사 홈페이지, 와이아이라잇

결국 이 카페에서 아래층부터 위층까지 가장자리는 손님들이 어느 정도 저마다의 영역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다. 반면 화끈하게 비워놓은 가운데 공간으로 시선이 막힘 없이 통하고, 그곳에 손님과 직원들의 다양한 움직임과 행위가 전시된다. 이 카페에서는 모든 손님들의 자리가 나름의 전망-은신처를 갖는 셈이다. 나는 이 곳에서 마치 식량을 찾듯 카페 주방과 창고 사이 어떤 커피와 빵이 들락거리는지를, 잠재적인 '적'을 보듯 혹시 내 파트너가 시선을 뺏길지도 모를 손님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신발을 신었는지를 한참 관찰한다. 사바나 초원이 인류에게 심은 유전적 본능은 영겁의 시간을 뛰어넘어 지구 반대편 도시의 공간에서도 유효하다는 걸 이 카페에서 느끼는 순간이다.


Photo by Benjamin Davie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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