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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남설 May 18. 2021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야, 너의 아파트

'소셜 믹스'가 그리 거창한 게 아니다

반포대교 남쪽 한강변에 30평대 아파트가 30억원을 훌쩍 넘는 단지가 있다. 가격에 걸맞은 고급스러운 외관은 강 건너편에서 멀찍이 봐도, 올림픽대로를 차를 타고 지나며 봐도 강렬하다. 겉이 저렇게 생긴 아파트의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 호기심이 일렁인다. '강남 부동산'을 술안주로 올린 적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 단지를 재료에서 빠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죽기 전에 살아볼 것 같지 않은 단지여서 오히려 더 관심이 가는 건지, 한 방송사 탐사보도 프로그램이 이 단지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길래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방송이 다룬 내용 중에 이 단지의 '커뮤니티 시설'에 대한 게 있었다. 이 단지는 도서관, 카페, 수영장, 사우나, 피트니스 같은 단지 내 시설들을 같은 반포동 주민에게 개방했다. 이용 보증금을 받고 등록 인원을 제한하긴 했지만, 이렇게 개방하는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다. 서울시가 재건축을 허가하면서 최고 35층까지 지을 수 있는 규제를 조합의 바람대로 38층까지 완화해 주는 대신 커뮤니티 시설을 개방하게 했다고 한다. 물론 화장실 가기 전과 후의 마음은 달랐다. 이 단지는 2016년 입주 후 약속 이행을 미루다가 개방 범위를 서초구에서 반포동으로 줄이는 등 몇 가지를 더 제약한 다음에야 시설을 개방했다. 결과적으로 이 단지의 커뮤니티 시설은 반포동 주민이 공유하는 곳이 됐을까? 방송은 이 단지 재건축조합장의 말을 전한다. "결국 우리 단지가 다 이용해요. 외부인이 없어요."

한강공원에서 바라본 한 아파트단지

우리 아파트단지 문화의 참 많은 단면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커뮤니티 시설을 개방한다는 약속을 지킨 것인지를 두고는 왈가왈부할 수 있겠으나, 적어도 이 단지 주민이 특별히 배타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아파트단지의 땅과 건물은 단지 주민의 소유물, 사유지다. 그걸 개방할지 안 할지는 주민이 결정할 일이다. 내 땅에 네가 왜? 이렇게 말하면 할 말 없다.


그런데 서울시는 왜 커뮤니티 시설의 문을 열라고 했을까? 소유 권한을 침해하는 사회주의 혹은 민간 자유를 저해하는 공권력의 발휘인가? 그렇게 해석하는 것도 자유의 영역에 들겠지만, 그 행정에 담긴 선의를 최대한 헤아려 볼 때 떠올릴 수 있는 단어가 있다. 바로 '소셜 믹스(Social Mix)'다.


소셜 믹스라고 하면 언제부터인가 한 아파트에 부자도 살고 빈자도 살고, 40평대도 있고 20평대도 있는 그런 풍경을 연상하게 된 듯하다. 분명히 그런 아파트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그것을 '공동체' 같은 개념으로 설명하며 이상화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서로 다른 계층이 섞여 살면 오히려 위화감만 커진다는 둥, 이웃의 얼굴도 모르는 요즘 아파트에 그런 게 왜 필요하냐는 둥 비판하는 말들은 일단 접어놓겠다. 이 글에서는 아주 '소극적'인 차원의 소셜 믹스를 다루고자 하기 때문이다. 우리네 아파트단지는 커뮤니티 시설은 고사하고 아예 단지 출입문에서부터 비(非)주민을 막아 세우는 곳이기에 그렇다.


요즘 아파트단지 입구에 차량 차단봉이 있어 차량을 가려 출입시키는 건 아주 보통의 풍경이다. 차량뿐만 아니라 보행 출입부에 아예 대문을 세워 주민이 아니면 단지 안에 발조차 들일 수 없는 곳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주민끼리 공유한 비밀번호로만 그 문을 열 수 있다. 세상이 하도 험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도시 전체적으로 보면 이게 그냥 용인하기 힘든 지경에 이른 것도 사실이다. 이 도시의 아파트단지들이 서로 경쟁하듯 덩치를 너무 키웠기 때문이다.

요즘 아파트단지 중엔 차뿐만 아니라 사람의 통행 역시 차단하는 곳이 적지 않다.

반세기 가량 된 아파트 역사에서 대단지는 최근 급격히 늘었다. 서울시가 제공하는 통계 플랫폼 '서울시 열린데이터 광장'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단지 4177개 중 1000세대 이상 단지는 334개다. 1000세대는 20~25층짜리 아파트가 10~15동 있는 정도의 규모로, 부동산 시장에서 보통 대단지를 가르는 기준으로 쓰인다. 서울 전체에서는 1000세대 이상 단지가 10%도 되지 않지만, 4개 중 1개 단지는 최근 10년(2011~2020년) 안에 지은 곳이다.


대단지가 최근 많이 늘어난 건 '규모의 경제'를 구축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재개발·재건축 사업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세대를 지어 분양하는 게 유리하고, 또 그런 수익을 바탕으로 주민끼리만 공유할 수 있는 카페, 수영장, 피트니스 같은 시설을 공급할 수 있게 된다. 급기야 송파구 가락시장 인근 '○○○시티(이름에서 이미 이 단지가 지향하는 스케일을 알 수 있다)'처럼 단지 한쪽 길이가 1km를 넘고 세대 수가 1만개에 육박하는 단지도 나오는 판이다. 요즘 택배차량 출입을 금지시켜 논란이 된 강동구 고덕동 아파트단지도 5000세대가 넘는 규모다.


아파트단지가 비대해질수록 내부 주민의 행복도와 안정감은 커질지 모르겠지만, 좀 더 시야를 넓혀 도시적 시각에서 볼 때 반드시 이롭다고 보기는 어렵다. 웬만한 아파트단지는 반포동 고급단지처럼 '그들만의 성'을 쌓고 곁을 내주지 않는다. 이 단지들이 모두 성처럼 문을 걸어 잠그면 도시 내 소통이 단절된다. 실제로 도시의 물리적 흐름이 끊긴다. 지상철로가 동네를 둘로 갈라 왕래를 차단하듯, 폐쇄적인 아파트단지는 시민 모두가 공유하는 도시의 길을 끊어 이동을 제한한다. 서울역 철로처럼 지역을 동부(동자동 일대)와 서부(만리동 일대)로 나눈다고 보면 된다.

Photo by Kyle Petzer on Unsplash. 지상철로는 도시의 길을 끊는다.

개인적인 사례를 하나 들면, 내가 사는 아파트단지는 북한산 자락에 있다. 원래 단독·다세대 주택 밀집지였는데 재개발해서 1000세대가 넘는 대단지가 됐다. 저층 주택단지가 고층 아파트단지가 되면서, 이 쪽의 북한산에는 두 가지 큰 변화가 생겼다. 일단 아파트에 가려 산 능선이 보이지 않게 됐다. 그리고 산으로 통하는 길이 단지 울타리에 막혔다. 단지 주민에겐 북한산으로 자유롭게 오르내리는 길이 있다. 만약 단지 주민이 아닌 사람이 멋도 모르고 그 길로 내려오다가 단지 입구에 다다르면 '이 곳은 등산로가 아닙니다. 통행을 자제해 주시길 바랍니다'란 현수막을 보게 된다. 말이 '자제'지, 실은 '금지'다. 단지 주민이 아닌 사람을 멈칫하게 만든다.


이 상황은 합당한 것일까? 아파트단지에 속한 땅이야 주민의 것이지만, 북한산은 그렇지 않다. 그 산으로 통하는 길이 하루아침에 누군가의 사유지가 되는 건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게 바로 아파트단지가 너무 커지면서 생기는 문제다. 단지 주변으로 울타리를 쳐서 들로, 산으로, 강으로 가는 길을 죄다 막아버렸다. 들과 산과 강에 가까운 아파트단지가 가장 인기가 좋다 보니 그런 게 너무 자연스럽고 흔한 일이 돼버렸다. 우리는 이제 어느 아파트단지가 외부인 통행을 막아 근처 초등학교 아이들의 등굣길이 닫혔다는 일은 뉴스거리조차 못 되는 시절에 산다.

거대한 아파트단지 역시 지상철로처럼 도시의 길을 끊는다. 북한산과 한강변에도 대단지 아파트가 많이 들어섰다.

대단지 아파트 비판에 소셜 믹스를 등장시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셜 믹스라고 해서 꼭 거창하게 서로 다른 계급의 시민들이 이웃처럼 어울려 사는 모습만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그건 오히려 현실에서 보기 힘든, 그야말로 이상적인 소셜 믹스다. 계층 간 거주지가 어느 정도 구분되는 현상은 인류가 집적해 도시를 이루며 산 역사와 함께 쭉 계속됐다.


다만, 사는 곳은 나눠도 가는 길은 나눌 수 없다. 계급이 달라도 모든 계급이 선거권과 같은 권리는 보편적으로 누리도록 역사가 진보한 것처럼 말이다. 사는 곳은 달라도 도시의 중요한 공적공간엔 모두가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길이 열려야 한다.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도심공원으로, 강가 유원지로, 등산로로 가는 길을 모든 시민이 차별 없이 공유할 수 있는 것, 이것은 그 자체로 소중하고 절실하게 요구되는 소셜 믹스다.


이러한 관점에서 소셜 믹스를 실현하기 위해 이제 필요한 건 아파트단지의 '다이어트'다. 아파트단지가 외부에 성벽을 쌓는 구조가 된 건 이제 너무 고착화돼 사실상 되돌리기 힘들다. 특히 자녀를 안전하게 키우고 싶은 부모 욕구를 넘기란 무척 어렵다. 아파트단지가 개방성을 회복하면 가장 좋겠으나,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폐쇄성을 유지하되 그 단위를 되도록 작게 만드는 게 차선책이다. 1000세대로 만들 단지를 300세대 안팎의 3개 단지로 쪼개면 그만큼 길이 더 많이 열린다.

그 길이 바로 소셜 믹스로 통하는 길이다. 단순히 서로 다른 단지, 다른 동네 주민들이 그 길을 함께 쓰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이 통하는 길은 상점을 부르고 식당을 부르고 대중교통을 다니게 한다. 그 길이 어떤 길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어떤 길이든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모든 길은 서로 통하기 때문에 그 잠재력은 길을 따라 흐르고 흘러 어느 지점에서는 반드시 폭발한다. 신사중학교와 현대고등학교 사이로 잠원 한강공원연결되는 길을 냈더니, 그 길과 같은 축에 있는 가로수길이 번성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전에 가로수길은 그냥 갤러리 몇 개 있는 무명 가로였다.


특히 산과 공원 같은 시민의 공공공간에 면한 아파트단지는 보다 철저하게 쪼갤 필요가 있다. 그래야 공공공간에 되도록 많은 시민이 접근하는 게 가능하다. 이미 3600세대 대단지인 반포주공아파트 재건축 사업을 하나의 구역이 아니라 3~4개 구역으로 나눠 진행하는 게 그 예다. 이 단지는 1km에 걸쳐 한강에 면한다. 올림픽공원에 면한 잠실진주아파트 잠실종합운동장에 가까운  아시아선수촌아파트의 재건축 계획도 단지 안에 외부에 개방된 '공공통행로'를 삽입해 2~3개 단지처럼 나누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단지 내 안전'을 내세우며 반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아 갈 길이 험난해 보인다. '마래푸'란 이름이 더 익숙한, 아현동 구릉지에 있는 3900세대 대단지에선 주민들이 반대해 단지 내 마을버스 연결이 무산된 경우도 있다. 마을버스가 다닐 길은 엄연히 도시계획도로, 공공도로였는데도 말이다.

잠실진주아파트 주택재건축정비사업 계획안 조감도. 단지 안을 관통하는 큰길을 냈다. 서울시 제공

1989년 가수 윤수일이 부른 곡 <아파트>의 도입부 가사는 이렇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너의 아파트'. 연인을 향한 그리운 감정을 당대 아파트를 향한 동경심에 얹어 표현한 노래다. '다리를 건너'고 '갈대숲을 지나'야만 닿는 아파트는 분명 거리감이 느껴지는 대상이었을 것이다. 30년이 지난 지금 아파트는 그때보다 훨씬 흔한 존재가 됐지만, 그만큼 그 아파트는 덩치를 키워 거리감을 강화하는 쪽으로 진화했다.


'부르주아'는 원래 중세시대 봉건 영주가 지배하고 보호하던 '성 안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지금 서울은 대단지 아파트라는 형태로 일종의 부르주아 사회를 창출하려는 욕구가 지배하는 도시라고 할만하다. 서울이란 하나의 대도시에 사는 시민의 정체성이 점점 '단지 안 사람'과 '단지 밖 사람'으로 분열돼 간다. 부르주아가 '성 안'의 권력을 누렸듯, 서울시민도 '단지 안'의 작은 권력을 누리는 데 익숙하다. 그 결과는 늘어가는 아파트단지 숫자만큼이나 파편화된 도시다. 일개 단지의 관점이 도시의 관점보다 우위에 서는 건 분명히 공공성에 역행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 성곽을 조금이라도 낮추는 것이 곧 소셜 믹스로 향하는 길인 이유다. 아파트단지의 살을 빼려는 작은 시도들도 그 길 위에 있다.


Photo by Sunyu Kim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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