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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남설 Oct 24. 2021

공원, 애매한 퍼즐 조각

공원은 필요한데, 만들 땅은 없고

한남동은 서울의 대표적인 부촌(富村)이다. 재벌가 회장님도 살고 유명한 연예인도 산다. 강남에는 과거 개발시대 아파트 '로또 분양' 혜택을 입어 어느 날 갑자기 자산가가 된 이른바 '졸부'들이 많고, '찐(진짜)부자'는 대대로 한남동에 살았다는 속설이 있다. 아마 한남동 특유의 동네 분위기도 그런 말이 만들어지는 데 영향을 미친 듯하다. 강남은 고층 아파트 단지가 즐비하지만, 한남동은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것 같은 고급 저층주택 단지 느낌이 강하고, 아파트라고 해봤자 10층이 채 되지 않는 게 많다. 전통적 부촌으로 꼽히는 평창동과는 또 구별되는 분위기가 있다. 이방인들이 많은 이태원과 접한 지리적 특성 때문인지 동네가 좀 더 개방적이다.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맛집과 카페 등 근린생활시설, 미술관이나 소규모 갤러리, 공방이 많이 분포해 '힙한' 동네로 불린다.

요즘 이 한남동에 어느 공터를 놓고 시끄럽다. 이 땅은 2만8000㎡쯤 되는데, 서울시는 공원으로 만들겠다고 하고 땅주인은 주택을 지을 테니 건드리지 말라고 한다. 이 땅은 원래 주한미군 '캠프 니블로 배럭스' 기지와 미군 임대아파트 '한남빌리지'가 있었는데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되찾은 '금단의 땅'이다. 다만 소유주가 대한민국 정부나 서울시가 아닌 한 건설회사이다. 그 배경에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는데, 여하튼 이 건설사는 공원화 계획에 반대하며 서울시를 상대로 소송까지 걸었다. 이 와중에 '왜 그 많은 돈을 들여 부자동네에 공원을 만드느냐'는 언론 보도가 잇따랐다. 서울시가 이 땅을 사려면 약 4600억원이 든다고 한다. 공원화 계획을 처음 공식화했던 2015년엔 1400억원이었는데 3배 넘게 뛰었다. 2020년엔 3600억원이었는데 1년 만에 1000억원이나 올랐다.*

한남근린공원 부지 위치도. ⓒ카카오맵(갈무리 후 편집)

이 같은 논란은 도시, 특히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공원을 만들 때 피하기가 어렵다. 일산·분당 같은 신도시나 서울 강남지역처럼 일정한 계획 하에 조성한 도시가 아니라 서울 강북지역처럼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도시에서는 보통 공원이 충분히 확보돼 있지 않다. 그래서 기존 구조물을 철거하거나 재개발할 때 지역사회에서 공원에 대한 요구가 분출한다. 놀이동산 '드림랜드'를 없앤 자리에 들어선 '북서울꿈의숲', 쓰레기매립지를 폐쇄하고 만든 '노을공원', '하늘공원'이 그런 과정을 거친 곳이다. 지금도 용산미군기지가 있던 자리에 '용산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하지만 밀도 높은 도시에서 이런 땅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땅을 겨우 찾더라도 대립하는 여러 이해관계를 극복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시의 종로구 송현동 공원 조성 계획은 10년 가까이 땅 주인인 대한항공과의 지루한 법적 분쟁, 국민권익위원회 중재를 거친 끝에 겨우 실마리를 찾은 상태다. 원래 대한항공은 그 땅에 호텔을 짓길 원했다.


또 공원을 만들어서는 땅을 매입하는 데 들어간 비용을 회수할 수가 없다. 공원은 주택처럼 돈을 받고 분양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유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원을 만들어 놓으면 근처 집값, 땅값이 오르다 보니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엉뚱한 놈이 번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서울숲이나 올림픽공원을 내려다보는 아파트들은 그 가격이 다른 집들보다 더 가파르게 오른다. 한남근린공원 계획도 그런 구조에 대한 반감에 부딪친 셈이다. 한남근린공원 부지에 면한 고급 아파트 거래가는 이미 1평(3.3㎡)당 1억원에 육박한다. 공원이 어디에 들어서는지에 따라 자산 가치에 입는 혜택이 크게 달라지다 보니 거기에서 발생하는 상대적 박탈감이 전혀 이해 못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 도시의 밀도와 가격을 고려하면 공원을 공급하는 일은 사실상 한계에 다다랐다. 특히 용산공원, 올림픽공원, 북서울꿈의숲, 월드컵공원 같은 대형공원을 만드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공원의 혜택을 받는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의 편차가 크다는 점도 부정하기 어렵다. 어쨌든 공원에 대한 요구는 지속될 것이다. 코로나19 발생 이후 여가를 즐길만한 야외공간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은 데다, 점점 심각해지는 기후위기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인 도시에 더 많은 공원이 필요하다는 신호를 계속 보낼 것이다. 이 도시의 밀도 속에서 공원이 될만한 땅을 찾는 노력이 마치 퍼즐 맞추듯 계속될 수밖에 없다.


결국 '공원'의 개념이 바뀔 수밖에 없다. 도시의 높은 밀도에서는 우리가 보통 떠올리는 '면' 형태의 공원을 만드는 데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반드시 너른 땅이 필요하다는 관념을 버려야 한다. 그렇다고 벤치 몇 개 있고 나무 몇 그루 심은 정도의 '점' 단위 소공원은 만족감을 주기 어렵다. 그건 어쩌다 자투리땅이 생기거나 민간건물 신축 시 기부채납한 공개공지에 조성하는 정도로 족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선'. 선형공원이 우리 도시 밀도에서 도출할 수 있는 절충안이 된다. 이미 '연트럴파크'란 이름으로 더 유명한 경의선숲길공원이 선형공원의 가능성을 훌륭히 보여줬다.

경의선숲길은 홍대입구, 서강대, 신촌, 공덕 등 8개 역사에서 가깝다. ⓒ서울의 공원(https://parks.seoul.go.kr/)

연트럴파크는 경의선숲길 중 연남동 구간이 널리 알려져 붙은 이름이고, 전체로는 용산구부터 마포구까지 6.3km에 이른다. 가좌, 홍대입구, 서강대, 신촌, 대흥, 공덕, 효창공원, 삼각지 등 8개 전철역과 직접 연결된다. 그만큼 도시 곳곳에서 접근성이 좋다는 얘기다. 일반적인 면형공원이 일정 반경 내 몇몇 지역과 소수의 대중교통 거점에만 연결돼 접근하기가 불편한 '넓지만 먼 공원'인 것과 다르다.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가늘고 가까운 공원'인 경의선숲길로 모여든다. 여러 지역에 걸쳐 높은 접근성을 제공하는 선형공원의 가치는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더욱 주목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국토연구원 보고서 '소셜미디어 분석을 통해 본 선형공원의 이용행태'(2020년 12월, 심지수 부연구위원)는 "선형공원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적합한 공원형태로 공원에 머무는 것보다 신체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선형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능한 공원"이라며 "포용 인구가 다른 공원보다 많고 긴 형태로 인해 다양한 지역사회를 보행 네트워크로 연결할 수 있다"라고 분석했다.


선형공원이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을 받아들인다는 건 곧 그 자체로 여러 지역을 이동하는 수단도 된다는 뜻이다. 국토연구원 보고서는 폐선부지를 공원으로 바꾼 뉴욕 하이라인 방문자들이 남긴 SNS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맨해튼을 관통한다는 점과 주변 중요 관광지를 연결한다는 점"을 하이라인의 성공요인으로 꼽았다. 경의선숲길에서도 걸어서 연남동과 홍대, 서강대를 오가며 각 지역의 개성 있는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청계천도 광화문에서 을지로를 지나 왕십리, 마장동까지 걸어갈 수 있는 선형공원이다. 서울로7017도 남대문시장과 서울역, 중림동 등 명소를 연결한다는 취지로 계획됐다.

미국 뉴욕 하이라인. ⓒSimon Bak on Unsplash

선형공원은 길을 공원으로 재생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도시에 보다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다. 경의선숲길은 20세기 초 처음 건설된 지상철길을 지하화하면서 얻은 지상부지에 조성했다. 청계천은 과거 개발시대 그 위를 덮었던 고가도로를 철거해 원래 물길을 드러내는 작업이었다. 서울로7017도 수명이 다한 고가도로를 그대로 공원으로 다시 사용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쓸모를 다한 길을 자연스럽게 공원으로 전환하는 것이므로, 인위적으로 뭔가를 이전·철거하거나 개발행위를 노리는 건설자본을 막는 수고가 적게 든다. 어차피 도시에는 자연하천을 덮어서 낸 길이 많다. 아스팔트를 한 꺼풀만 벗겨내면 청계천 같은 물길이 흐른다. 실제 실행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지하화가 논의되는 간선도로나 지상철로도 많다. 가능성이 도시 곳곳에 산재해 있는 셈이다. 길이 곧 공원이며, 공원이 곧 길이다.

*<‘부촌 앞마당’ 프레임 쓴 한남근린공원···“모두의 공원” 외치는 주민들>, 2021년 10월 7일,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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