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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남설 Jun 30. 2023

철공소 골목에서 읽는 도시의 퍼즐

우리가 지켜야 할 또 다른 '생태'

서울시는 요즘 '녹지생태도심'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도심의 녹지 비율을 따져보면, 뉴욕 맨해튼과 센트럴 런던은 각각 26.8%와 14.6%인데, 서울 4대문 안쪽은 3.7%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시는 녹지를 늘리기 위해 새 건물을 더 높게, 더 크게 지을 수 있게 관련 규제를 풀기로 했다. 예를 들어, 넓이가 100인 땅이 있다. 보통은 그 땅을 100만큼 전부 다 써서 30층 건물을 올릴 수 있다. 그런데 땅의 80만큼만 건물을 짓고, 나머지 20에는 녹지를 조성한다. 그럼 서울시는 원래 법규에 따라 30층으로 지을 수 있는 걸 40층까지 높일 수 있게 허가한다. 이렇게 녹지를 확보한다는 게 서울시의 구상이다.


서울시는 그 첫 사업지를 종묘~퇴계로 일대로 정했다. 그러면서 "오랜 시간 성장이 정체되고 삭막했던 서울도심이 고층 빌딩숲과 나무숲이 공존하고 활력과 여유가 넘치는 '녹지생태도심'으로 재탄생한다"라고 설명한다. 이런 그림 또한 제시했다.

ⓒ서울특별시

녹지생태도심 정책의 방향은 옳다. 기후변화 시대에 도심 녹지가 필요하다는 건 아주 익숙한 이야기다. 정책을 추진하는 방식 또한 익숙하다. 건설 사업자가 녹지를 만들 땅을 좀 내놓되 건물 층수를 더 얻어가는 건 도시행정에서 '공공기여'라고 부르는, 전혀 새롭지 않은 방식이다.


다만, 서울시가 녹지생태도심으로 만들겠다는 종묘~퇴계로 일대에서는 '녹지생태' 말고 다른 이야기도 좀 해주면 좋겠다. 바로 '산업생태'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서울시는 잊을만하면 이 일대 개발 계획을 내놓는데, 산업생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계속 외면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걸까? 아니면, 못 본 척하는 걸까?


서울시가 말하는 '종묘~퇴계로'를 보통은 '세운'이라고 부른다. 종묘를 마주 본 '세운상가'에서 딴 명칭이다. 세운에는 높은 건물이 거의 없고 대부분 1~2층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30년 넘은 건물이 95%에 육박한다. 겉보기에도 매우 낡은 지역이다. 빛바랜 철제지붕이 가득 메운 세운 일대를 조망하면, 아주 복잡한 퍼즐을 보는 것만 같다.

세운상가 옥상에서 바라본 종로3가 방향 전경. ⓒ허남설

하지만, 퍼즐에는 나름의 논리와 규칙이 있다. 세운에서 그 논리와 규칙을 이루는 건 수많은 철공소의 협업 생태계다. 세운의 철제지붕 아래로 내려가 골목을 걸으면 금속을 깎고 저밀 때 나는 날카로운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지금 세운의 정체성은 철공소 골목이다.


철공소가 다 같지 않고 금속의 모양 틀을 만드는 곳, 금속을 깎고 자르는 곳, 금속을 다듬고 광내는 곳, 금속을 칠하는 곳 등 나름 전문 분야가 다 있다. 일감 하나 받으면 김 사장, 이 사장, 박 사장 다 붙어서 일해서 나눠 먹는다. 이것이 지금 세운의 퍼즐을 이루는 논리와 규칙이다.


2022년 6월, 이 근처 '을지면옥'이라는 유명 평양냉면 가게가 재개발로 철거되었다. 을지면옥의 철거 위기는 2019년 초 언론을 통해 처음 알려졌다. 을지면옥은 3년 넘게 버텼지만, 주변 재개발은 속속 진행되었고 많은 철공소가 을지면옥과 달리 언론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하고 사라졌다. 어제는 김 사장이, 내일은 이 사장이, 모레는 박 사장이 떠났다. 논리와 규칙이 깨진 곳에서 퍼즐은 성립할 수 없다. 남은 철공소는 협업 파트너가 없어 애먹는다. 특히, 모양 틀을 만드는 철공소는 하나밖에 안 남아 사장님들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한다.

세운의 한 철공소에서 금속을 가공하는 모습. ⓒ허남설

세운의 철공소는 기업 혹은 연구소의 의뢰를 받아 신제품의 샘플을 만들거나, 학생들의 실험적인 아이디어를 실물로 구현할 수 있는 곳이다. 공장의 오래된 설비가 고장 났는데, 필요한 부품이 요즘 생산되지 않는다? 그럼 도면을 세운의 철공소로 보내면 똑같이 만들 수 있다. 산업디자인, 건축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뿐만 아니라, 장인만이 만진다는 악기를 들고 세운을 찾는 음악 전공 학생, 음악인도 있다. 금속을 밀리미터(mm) 단위로 다루는 데 이골이 날 정도로 숙련된 사장님들을 믿기 때문이다. 금속 가공 작업을 마치고 나면 사장님들의 발밑에는 금속 조각이 연필을 깎고 남은 나무조각처럼 둘둘 말려 수북이 쌓인다. 그만큼 정교한 작업을 하면서 다품종 소량생산의 일감을 소화할 수 있는 곳이 세운이다.


서울시의 눈에는 세운의 이런 논리와 규칙이 전혀 보이지 않는 듯하다. 아니면, 보이지 않는 척하거나. 세운을 보며 "처참하다",  "잃어버린 10년 같다"라고 쉽게 평가할 수 있는 건 그래서다. 세운은 녹지생태도심 이전에 산업생태도심이다. 서울시는 녹지생태도심 계획을 내년 하반기부터 실행하겠다고 한다. 생태계를 통째로 뒤엎는 계획을 쉽게, 너무 쉽게 말하고 있다.


*참고자료

서울특별시, 「침체된 서울도심, 고층빌딩숲과 나무숲 공존 `녹지생태도심`으로 재창조」, 2022년 4월 21일.

고현실, 「을지로·청계천 상가 재개발 본격화…을지면옥도 철거되나」, 『연합뉴스』, 2019년 1월 16일 자.

박돈규, 「“잠수교 패션쇼 보셨나요? 서울은 세계가 주목하는 무대, 난 세일즈맨”」, 『조선일보』, 2023년 5월 20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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