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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공소 골목에서 읽는 도시의 퍼즐

우리가 지켜야 할 또 다른 '생태'

by 허남설

서울시는 요즘 '녹지생태도심'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도심의 녹지 비율을 따져보면, 뉴욕 맨해튼과 센트럴 런던은 각각 26.8%와 14.6%인데, 서울 4대문 안쪽은 3.7%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시는 녹지를 늘리기 위해 새 건물을 더 높게, 더 크게 지을 수 있게 관련 규제를 풀기로 했다. 예를 들어, 넓이가 100인 땅이 있다. 보통은 그 땅을 100만큼 전부 다 써서 30층 건물을 올릴 수 있다. 그런데 땅의 80만큼만 건물을 짓고, 나머지 20에는 녹지를 조성한다. 그럼 서울시는 원래 법규에 따라 30층으로 지을 수 있는 걸 40층까지 높일 수 있게 허가한다. 이렇게 녹지를 확보한다는 게 서울시의 구상이다.


서울시는 그 첫 사업지를 종묘~퇴계로 일대로 정했다. 그러면서 "오랜 시간 성장이 정체되고 삭막했던 서울도심이 고층 빌딩숲과 나무숲이 공존하고 활력과 여유가 넘치는 '녹지생태도심'으로 재탄생한다"라고 설명한다. 이런 그림 또한 제시했다.

reinvention_04_n.jpg ⓒ서울특별시

녹지생태도심 정책의 방향은 옳다. 기후변화 시대에 도심 녹지가 필요하다는 건 아주 익숙한 이야기다. 정책을 추진하는 방식 또한 익숙하다. 건설 사업자가 녹지를 만들 땅을 좀 내놓되 건물 층수를 더 얻어가는 건 도시행정에서 '공공기여'라고 부르는, 전혀 새롭지 않은 방식이다.


다만, 서울시가 녹지생태도심으로 만들겠다는 종묘~퇴계로 일대에서는 '녹지생태' 말고 다른 이야기도 좀 해주면 좋겠다. 바로 '산업생태'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서울시는 잊을만하면 이 일대 개발 계획을 내놓는데, 산업생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계속 외면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걸까? 아니면, 못 본 척하는 걸까?


서울시가 말하는 '종묘~퇴계로'를 보통은 '세운'이라고 부른다. 종묘를 마주 본 '세운상가'에서 딴 명칭이다. 세운에는 높은 건물이 거의 없고 대부분 1~2층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30년 넘은 건물이 95%에 육박한다. 겉보기에도 매우 낡은 지역이다. 빛바랜 철제지붕이 가득 메운 세운 일대를 조망하면, 아주 복잡한 퍼즐을 보는 것만 같다.

[그림 30] 세운상가 옥상에서 바라본 세운재정비촉진지구 ⓒ허남설_3.jpg 세운상가 옥상에서 바라본 종로3가 방향 전경. ⓒ허남설

하지만, 퍼즐에는 나름의 논리와 규칙이 있다. 세운에서 그 논리와 규칙을 이루는 건 수많은 철공소의 협업 생태계다. 세운의 철제지붕 아래로 내려가 골목을 걸으면 금속을 깎고 저밀 때 나는 날카로운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지금 세운의 정체성은 철공소 골목이다.


철공소가 다 같지 않고 금속의 모양 틀을 만드는 곳, 금속을 깎고 자르는 곳, 금속을 다듬고 광내는 곳, 금속을 칠하는 곳 등 나름 전문 분야가 다 있다. 일감 하나 받으면 김 사장, 이 사장, 박 사장 다 붙어서 일해서 나눠 먹는다. 이것이 지금 세운의 퍼즐을 이루는 논리와 규칙이다.


2022년 6월, 이 근처 '을지면옥'이라는 유명 평양냉면 가게가 재개발로 철거되었다. 을지면옥의 철거 위기는 2019년 초 언론을 통해 처음 알려졌다. 을지면옥은 3년 넘게 버텼지만, 주변 재개발은 속속 진행되었고 많은 철공소가 을지면옥과 달리 언론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하고 사라졌다. 어제는 김 사장이, 내일은 이 사장이, 모레는 박 사장이 떠났다. 논리와 규칙이 깨진 곳에서 퍼즐은 성립할 수 없다. 남은 철공소는 협업 파트너가 없어 애먹는다. 특히, 모양 틀을 만드는 철공소는 하나밖에 안 남아 사장님들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한다.

[그림 23_1] 금속을 밀리미터 단위로 깎는 작업 현장과 수북하게 쌓인 금속 조각 ⓒ허남설_1.jpg 세운의 한 철공소에서 금속을 가공하는 모습. ⓒ허남설

세운의 철공소는 기업 혹은 연구소의 의뢰를 받아 신제품의 샘플을 만들거나, 학생들의 실험적인 아이디어를 실물로 구현할 수 있는 곳이다. 공장의 오래된 설비가 고장 났는데, 필요한 부품이 요즘 생산되지 않는다? 그럼 도면을 세운의 철공소로 보내면 똑같이 만들 수 있다. 산업디자인, 건축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뿐만 아니라, 장인만이 만진다는 악기를 들고 세운을 찾는 음악 전공 학생, 음악인도 있다. 금속을 밀리미터(mm) 단위로 다루는 데 이골이 날 정도로 숙련된 사장님들을 믿기 때문이다. 금속 가공 작업을 마치고 나면 사장님들의 발밑에는 금속 조각이 연필을 깎고 남은 나무조각처럼 둘둘 말려 수북이 쌓인다. 그만큼 정교한 작업을 하면서 다품종 소량생산의 일감을 소화할 수 있는 곳이 세운이다.


서울시의 눈에는 세운의 이런 논리와 규칙이 전혀 보이지 않는 듯하다. 아니면, 보이지 않는 척하거나. 세운을 보며 "처참하다", "잃어버린 10년 같다"라고 쉽게 평가할 수 있는 건 그래서다. 세운은 녹지생태도심 이전에 산업생태도심이다. 서울시는 녹지생태도심 계획을 내년 하반기부터 실행하겠다고 한다. 생태계를 통째로 뒤엎는 계획을 쉽게, 너무 쉽게 말하고 있다.


*참고자료

서울특별시, 「침체된 서울도심, 고층빌딩숲과 나무숲 공존 `녹지생태도심`으로 재창조」, 2022년 4월 21일.

고현실, 「을지로·청계천 상가 재개발 본격화…을지면옥도 철거되나」, 『연합뉴스』, 2019년 1월 16일 자.

박돈규, 「“잠수교 패션쇼 보셨나요? 서울은 세계가 주목하는 무대, 난 세일즈맨”」, 『조선일보』, 2023년 5월 20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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