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마을'이란 곳을 모두가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 이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단 한 분이라도 더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라는 마음에 이 글을 써봅니다. '질 좋은 임대주택'이란 목표, 진영과 이념을 가리지 않고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그 목표로 가는 길에 하나의 이정표가 될 사건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서울시는 질 좋은 임대주택을 선도적으로 구현할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고 있습니다. 10년 가까이 진행된 '백사마을 프로젝트'를 우리가 완성하느냐 혹은 못하느냐에 따라 우리 임대주택의 미래는 크게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하나의 롤모델, 본보기가 갖는 힘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012년부터 시작한 백사마을 프로젝트의 공식 명칭은 '백사마을 주거지보전사업'입니다. 서울 노원구 중계동 104번지 일대 백사마을은 1960년대 말 남대문·청계천·용산 등 서울 도심에서 내몰린 철거민들의 이주정착지로 처음 생겨났고, 이후 쭉 우리에게 달동네의 인상으로 익숙한 '슬레이트 지붕'과 '시멘트 블록'으로 채워진 곳이었습니다. 2008년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에서 해제되면서 재개발이 시작됐습니다.
*백사마을의 자세한 역사와 '주거지보전사업'에 관한 내용은 다른 브런치 글을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백사마을 프로젝트의 핵심은 우리가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공동주택의 새 모델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분양주택 쪽은 다른 재개발사업과 똑같이 집주인들이 모인 재개발조합 등 민간이 주도하되, 임대주택 쪽은 공공이 맡아 이전과는 다른 재개발을 하고자 했습니다. '다른 재개발'이란 크게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천편일률적인 아파트를 탈피하는 재개발, 둘은 원주민 젠트리피케이션을 막는 재개발입니다. 이것이 백사마을 프로젝트가 추구한 '질 좋은 임대주택'이었습니다.
임대주택의 '질'을 이야기하면서 지금 우리가 임대주택을 내리꽂는 방식에 대해 짚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내리꽂는다'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여러 아파트 단지에서 임대아파트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현실에선 어느 아파트 단지가 제아무리 지하철 10분 역세권에 있어도 임대아파트는 그 단지 안에서 접근성이 제일 나쁜 맨구석에 있기 마련입니다. '천덕꾸러기 신세'란 말이 딱 어울립니다.
간혹 단지 계획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할 때도 있습니다. 임대주택 세입자들을 특별히 배려한 배치일까요? 아닙니다. 이런 경우는 임대아파트에 부여하는 역할이 거의 '방음벽' 혹은 '바리케이드'에 가깝습니다. 차들이 쌩쌩 달리고 번잡한 도로나 환경이 단지 근처에 있을 때 소음이나 시야를 차단하기 위해 단지 맨앞에 내어짓는 모양새입니다. 여기선, 다소 거칠지만, '총알받이'란 말도 떠오릅니다.
백사마을 프로젝트는 이러한 관행(?)을 깼습니다. 조감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임대주택 부지는 전체 부지의 약 30%를 차지합니다. 이 땅에 101동이나 102동이나 103동이 모두 똑같이 생긴 아파트가 아니라, 다양한 형태와 공간을 갖춘 작은 집들을 채웠습니다. 높다란 아파트가 들어서게 될 분양주택 단지보다 오히려 입지가 더 좋고, 외관도 다채롭습니다. '단지'보다는 '동네'나 '마을'이란 말이 더 어울려 보입니다.
백사마을 조감도ⓒ서울시
백사마을 프로젝트의 임대주택은 10명에 가까운 건축가들이 붙어 9년째 설계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부분은 건축가들의 머릿수나 흘러간 세월 그 자체가 아니라, 그만큼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투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분양주택이 아닌 임대주택에 말이죠.
살기 좋은 마을, 살기 좋은 집을 위해 건축가들이 특별히 고민한 과제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마을에 많은 '제3의 장소'를 제공하는 일입니다.
건축가들이 맡은 임대주택은 분양금 수억원을 낼 수 있는 단란한 4인 가족이 사는 곳이 아닙니다. 재개발 직전까지도 '보증금 500, 월세 20'에 살았던 이들을 위한 임대주택입니다. 이 곳의 가난한 사람들에겐 비좁은 집(제1의 장소)도, 고달픈 일터(제2의 장소)도 아니면서 이웃과 사회적 접촉을 만들 수 있는 장소(제3의 장소)들이 매우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노인 등 소외되기 쉬운 계층이 많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백사마을에는 그런 곳이 많았습니다. 빼곡히 들어선 집과 집 사이에 우연히 형성된 적당히 아늑한 빈 터,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덮이지 않고 남은 땅을 일군 텃밭, 골목길 끝에 걸터앉을 수 있게 자리잡은 낮은 담벼락이나 계단이 그런 장소들입니다. 다 쓰러져 가는 집은 부수고 새로 짓더라도 그런 장소들은 남기고 재구성해야 한다는 게 백사마을 프로젝트에 참여한 건축가들이 공유한 신념이었습니다.
이것이 다소 거칠게 '원형 보존'이란 말로 압축되면서 "달동네에서 보존을 운운하는 낭만주의"라는 빈축을 사기도 했습니다. 현 백사마을의 '형태'를 재개발 이후에도 남긴다는 오해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백사마을에서 남기고자 하는 건 골목과 작은 마당, 텃밭의 모양이 아니라 그것의 기능입니다. 재개발 이후에도 그 기능이 잘 살아있을 수 있도록 위치와 동선 등 '디테일'을 재구성하는 게 건축가들이 수행하는 작업입니다.
백사마을 프로젝트의 의미는 집, 골목, 텃밭 같은 물리적 환경을 잘 만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재개발이 끝난 뒤에도 원주민이 계속 살아가는 마을을 만들고자 했던 노력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백사마을 프로젝트는 엄연히 재개발 사업이지만, (도시)재생지원센터가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도시재생은 보통 재개발과는 대척점에 있는 개념으로 이해되는데, 재생지원센터는 대체 왜 이 재개발 현장에 있는 걸까요?
그건 현재 재개발 때문에 일시적으로 다른 곳으로 이주한 원주민들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재개발 사업 후 원주민 재정착률은 보통 10%도 되지 않습니다. 서울시는 이걸 한번 끌어올려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백사마을에 그 역할을 맡을 재생지원센터를 둔 것입니다. 재개발이 시작되고 다른 지역의 임대주택으로 이주한 원주민들을 관리하라고요. 그럼에도 20~30%를 달성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이는 게 현실입니다. 재개발이란 게 대개 그렇듯 이런저런 사정으로 늘어지기 마련이고, 그 사이 원주민들은 지치거나, 생업을 이유로 다른 지역에 정착하거나, 나이 드신 분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가시는 거죠.
서울시는 최근 백사마을 프로젝트 착공을 눈앞에 두고 '과도한 예산'을 문제 삼고 있다고 합니다(아래 링크 참고). 이제 와서 공사비를 대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결정권자가 바뀐 상황도 있지만, 사실 백사마을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내내 이런 난관들이 있었습니다. 늘 문제는 돈, 이른바 '가성비'였습니다. 물론 같은 면적의 부지에 더 많은 임대주택을 공급할 수도 있습니다. 예전 모델로 돌아가면 되는 일입니다. 임대주택을 구석에 몰고, 면적을 줄이고, 닭장처럼 세우면 됩니다.
하지만 선도적으로 '질 좋은 임대주택'을 제시할 기회를 잃는다는 비용은 치러야 합니다. 단 하나의 모델이 갖는 힘, 그것은 걸핏하면 말로만 '질 좋은 임대주택'을 외치는 것보다 훨씬 강합니다. 백사마을 프로젝트가 결코 '질 좋은 임대주택'의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제껏 우리가 임대주택을 만들어 온 방식이 전부는 아니라는 질문은 던질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여는 일입니다. 지금 백사마을 프로젝트를 포기하면, 그 단 하나의 모델을 만들기 위해 투입했던 10년 안팎의 시간도 물거품이 됩니다.
또, 다시 새로운 프로젝트를 짜려면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부지 용도를 다시 정하고, 단지를 다시 설계하고, 관의 허가를 다시 거치는 작업에만 족히 3~4년은 걸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 백사마을과 연결고리가 끊겨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될 원주민은 더 늘어날 것입니다. 백사마을이 그리는 조금 다른, 조금 나은 임대주택의 미래를 지킬 수 있을까요? 그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마을에 지금 관심이 필요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