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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남설 May 25. 2022

우리에게 필요한 '초품아'란

프랑스 파리 '15분 도시'를 제대로 차용하기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2021년 4월 보궐선거가 열렸을 때 '○○분 도시' 공약이 아주 잠깐 유행했습니다. 지금은 프랑스 파리의 '15분 도시' 개념이 제법 알려졌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의 메인스트림에서 이제 막 언급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우리는 코로나19 유행 한복판에 있었고, 서울과 부산 같은 대도시의 시장을 뽑는 선거를 치르는 중이었습니다.


'15분 도시(La ville du quart d'heure)'는 2014년 4월부터 파리시장을 지냈고 2020년 재선에 성공한 안 이달고(Anne Hidalgo)가 내세운 공약입니다. '15분'은 시간 단위입니다. 한마디로 도시를 15분 생활권으로 새롭게 조직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안 이달고의 15분 도시는 파리를 차가 아닌 도보와 자전거가 중심이 되는 도시로 만들겠다는 '내일의 도시 파리(Le Paris de demain)' 공약 목록에 들어있습니다.

안 이달고가 제시한 '15분 도시' 공약 개념도. 도보와 자전거만으로도 학교, 시장, 직장, 여가, 의료 등에 15분 안에 접근할 수 있는 생활권 조직을 추구합니다.

프랑스에서 쏘아올린 이 개념은 코로나19 바이러스와 함께 유행하다시피 세계를 돌고돌아 우리나라 선거전에도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한 서울시장 후보는 살짝 변형해 '21분 도시'를 만들겠다고 했고요, 한 부산시장 후보는 '15분 도시'란 말을 그대로 갖다 썼습니다. 숫자가 무엇이든 뜻은 거의 같았습니다. '포스트 코로나' 세상에서는 조금 다른 도시가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우리나라에서 15분 도시는 주로 '도시 밀도를 분산하고 대중교통을 개선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도시의 밀도는 바이러스 전염의 주범이므로 ▲밀도를 낮추기 위해 도심을 쪼개고 ▲쪼개진 도시는 빠른 대중교통으로 연결한다. 팬데믹에 위협을 느낀 시민들을 겨냥한 셈입니다. 서울에서는 광화문, 여의도, 강남 등 3도심 구조를 더 잘게 나눈다든지, 부산에서는 빠른 광역철도를 도입한다든지 하는 논의가 뒤따랐습니다.


대중교통 개선은 파리 역시 지향한 바입니다. 안 이달고는 "시민들이 15분 안에 집에 돌아가 배우고, 운동하고,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귀가시간을 줄이겠다"라고 약속했습니다. 다만, 파리의 15분 도시가 미래의 대중교통으로 가리킨 건 도보와 자전거였습니다. 그만큼 시민들이 정말 가까운 생활권을 갖도록 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우리의 논의와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도시의 밀도는 어떨까요? 여기에서 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15분 도시가 낮추고자 했던 밀도는 도로와 주차장으로 도시를 가득 채우게 한 '자동차'의 밀도였지, '사람'의 밀도가 아니었습니다. 15분 도시는 오히려 도보와 자전거로 닿을 수 있는 생활권 내에서 사람 사이의 높은 밀도를 추구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정치권의 ○○분 도시 공약이 누락했던 15분 도시의 '이웃, 연대, 공동체' 같은 개념을 불러내야 합니다.

안 이달고는 파리 전역에서 차량 중심적인 도로와 주차장(위)을 줄이고 자전거와 도보 전용 공간(하)을 늘리고자 했습니다.

감염병 비상시국에서 이러한 개념들을 건너뛴 이유는 쉽게 짐작이 갑니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거리를 둬야 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무조건 잠재적인 감염원으로 간주하던 시간이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제 다시 서로 부대끼며 숨쉬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보다 이동량이 증가했다는 분석 결과도 나왔습니다. 이제 '사회적 거리두기'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15분 도시'는 지금껏 받아들인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서로 거리를 두며 밀도를 낮춰 코로나19를 방어하는' 수세적인 개념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며 코로나19를 극복하는' 적극적인 개념으로 재인식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15분 도시가 예시로 든 해법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동네 안에서 '배우고, 운동하고,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을 보낼만한 공간을 발굴하는 일입니다. 15분 도시는 '학교'나 '모퉁이'를 활용하자고 제안합니다. 유치원·초등학교 운동장을 공원으로 바꿔 주말엔 주민들의 쉼터로 개방하고, 도로와 도로가 만나는 교차로를 녹지가 어우러진 도보 전용 공간으로 바꾸자고 합니다. 이런 공간의 주변 차량 통행은 금지하며, 주차공간엔 차 대신 자전거를 댑니다.


새롭게 태어난 학교와 모퉁이는 사람들이 다니고 산책하고 운동하는 일상적인 장소가 됩니다. 15분 도시는 이런 환경을 만드는 목적을 '근거리 연대성', 즉 주민끼리 서로 길에서 만나기 쉬운 도시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주민들의 만남이 잦은 장소들에서는 아마 '사건'이라고 부를만한 일들을 도모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을 모아 작은 운동회나 영화 상영회를 열 수도 있고, 벼룩시장이나 나눔장터를 열 수도 있습니다.

'15분 도시'는 동네 초등학교·중학교 운동장에 주목합니다. 하교 후와 주말에는 쓰임새가 없는 이 공간을 녹지로 바꾸고 주민에게 연다면 어떤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될까요?

'해법'이라고 했지만 사실 소소해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근처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유휴공간을 활용하자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능성 또한 크지 않을까요. 어느 동네에나 그런 장소들은 있기 마련이고, 우리가 그런 장소를 중심으로 도시를 바꾸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모두가 '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단지)'를 원하지만, 사실 그 공간은 대다수 주민들에게, 대부분 시간대에 닫혀있는 게 현실입니다. 우리가 이 소중한 인프라를 더 잘 쓸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학교에는 적용할 수 없지만, 우리 곁에 있는 것을 도시의 거점으로 되살리려는 시도들은 이미 적잖게 있습니다. 용도폐기된 건물을 시민들의 문화 프로그램을 담은 공간으로 사용하거나, 레트로한 근대건축물을 주민을 위한 펍(pub)과 관광객을 위한 숙박시설을 겸한 독특한 장소로 개발하고, 낡은 한옥집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유명인물을 기념하는 주민들의 카페로 재탄생하기도 합니다. 보통 '도시재생'이란 이름으로 일어나는 일들이지요. 우리의 도시재생이 도로 같은 기반시설 정비를 외면했다고 욕을 많이 먹긴 합니다만, 그래도 주민들이 '배우고, 운동하고,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공간을 하나씩 심고자 했습니다. 15분 도시에 담긴 꿈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넷플릭스를 끄고 밖으로 나온 우리에게는 이제 그런 도시가 필요합니다.


15분 도시 개념이 우리나라에 상륙한 지도 이제 1년여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때와 지금은 팬데믹 상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코로나19가 막 창궐했을 때는 너도나도 서둘러 포스트 코로나를 논했는데, 요즘은 기나긴 팬데믹에 지쳤는지 오히려 자취를 감춘 듯합니다. 하지만 어쩌면 먼 훗날 돌아봤을 때 바로 지금이 포스트 코로나로 가는 길목일지도 모릅니다.


마침 지역일꾼을 뽑는 지방선거가 돌아왔습니다. 선거운동이 시작되면 명함을 돌리며 유세를 다니는 후보들을 동네에서 자주 볼 수 있게 될 겁니다. 후보들에게 한번 '우리동네 생활권'에 대한 비전을 물어보는 건 어떨까요?


*Photo by Ryan Jacobs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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