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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남설 Jun 06. 2022

인왕산 호랑이가 다니던 길, 이제는

차가 사라진 인왕산 자락길을 다녀왔습니다.

인왕산에 바이올린 선율이 울려 퍼졌습니다. 지난 5월29일, 서울 인왕산 자락에 있는 카페 '더숲 초소책방' 앞에서 장한샘 바이올리니스트가 버스킹 공연을 열었습니다. 보도 경계석에 어린아이들이 올망졸망 줄지어 앉아 연주를 들었습니다. 광화문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인 카페의 2층 테라스가 이날은 훌륭한 객석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2022년 5월29일 인왕산로에 차가 사라진 날, '더숲 초소책방' 앞에서 장한샘 바이올리니스트의 버스킹 공연이 열렸습니다.

이날의 공연엔 조금 특별한 구석이 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버스킹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하는 자리는 도로 위에 있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이 도로 위로 차가 쌩쌩 달리거나 카페에 들르려는 차들이 줄을 섰겠지만 이날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서울시가 5월22일과 5월29일 아침 8시부터 낮 12시까지 이 도로, 인왕산로를 '차 없는 거리'로 지정했기 때문입니다. 차가 다니던 길이 작은 공연장으로 변하는 광경은 단 이틀 동안만 볼 수 있는 극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차 없는 인왕산로를 걸어봤습니다. 부암동과 청운동의 경계에 있는 '윤동주 문학관'부터 '호랑이동상'까지 1.5km 정도 되는 길이었습니다. 인왕산로는 원래 등산화 말고 런닝화 정도만 신어도 오르내릴 수 있는 산책로에 가까운 등산로로 유명합니다. 작정하고 산에 가는 건 부담스러워도 푸른 숲내음은 한번 즐기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죠. 다만, 평소에는 차가 다니는 2차로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나뉜 보행로로만 다녀야 했지만, 이날은 완전히 차 없는 거리여서 누구나 차로에서도 활보할 수 있었습니다. 어른, 아이, 노인, 그리고 댕댕이들까지도요.

차가 다니지 않는 인왕산로에서 여자도, 남자도, 노인도, 댕댕이도 마음껏 걸을 수 있었습니다.

짜릿한 해방감 비슷한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정말 이날만큼은 길의 주인이 바뀐 게 확실했습니다. 초소책방 앞에선 바이올린 버스킹 공연이 있었고요, 아예 도로 위에 자리를 펴고 휴식을 즐기는 가족도 볼 수 있었습니다. 카페나 전망대 등 명소 근처를 답답하게 했던 불법주정차·공회전 행렬은 사라졌습니다. 그만큼 그곳에서 마시는 공기도 한결 깨끗하지 않았을까요? 또 차를 타고 지날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도 눈에 들어오더군요. 도로 옆 촘촘한 덤불의 잎사귀, 늠름하게 우뚝 솟은 바위산,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는 물줄기….


원래는 차를 타고 인왕산로를 오간 적이 많았습니다. 사실 이 길이 운전하는 재미(?)가 있는 길이긴 합니다. 적당히 구불구불한 경사로가 오르락내리락 반복되니 솔직히 운전자 입장에서는 약간 스릴이 있습니다. 시속 30㎞로 제한한다는 표지판이 숱하게 보여도 과속하고 싶은 욕구가 불쑥불쑥 올라옵니다. 실제로 속도를 좀 내는 차가 많습니다. 오히려 시속 30㎞를 지켜서 달리면 뒷차가 빵빵대기도 하죠. 한밤에는 '할리족' 같은 오토바이 운전자들이 애용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런 길이 하루아침에 차 없는 거리로 변하니 뭔가 좀 어색한 감도 들었습니다. 평소 좋아하는 음악을 귀에 꽂고 걷는데, 불안한 댕댕이처럼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더군요. 실제로 모범택시 기사님들까지 동원해 인왕산로 양쪽 끝에서 철저하게 차량 진입을 통제하는 걸 봤는데도 마냥 안심되지는 않았습니다.


'차 없는 거리'라고 해도 그 거리를 우리가 '차도'라고 부르는 건 변함이 없는 것처럼, 길이 가진 이미지(image)는 하루이틀 이벤트로 쉽게 지울 수 없는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너른 도로를 놔두고 여전히 좁은 보도로 많이 다니시는 걸 봤습니다. 차량 통행을 막는 입구에선 운전자와 안내원이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고요. ‘차 없는 인왕산로’가 많은 사람에게 아직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이 인왕산 자락길은 언제 생겨났으며, 차가 이 길을 차지한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런 생각을 하면 좀 아이러니하기도 했습니다. 인왕산 호랑이는 구한말에야 사라졌다는데, 그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간 인왕산을 지배한 자동차에 우린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왕산로는 원래 이렇게 주차장을 방불케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풍경에 우리가 너무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요?

이쯤에서 이번에 인왕산로가 차 없는 거리가 된 사정을 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관(官)이 주도해 차 없는 거리로 만든 정동길(덕수궁길)이나 신촌 연세로와는 좀 다르게, 인왕산로는 민(民)이 차 없는 거리 지정을 주도했습니다. 인왕산 아랫마을인 서촌 주민들은 2017년부터 주민모임, 서명운동, 기자회견을 통해 이 문제의 공론화를 시도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사실 서울시는 인왕산로를 차 없는 거리로 지정하기를 주저했습니다. 청와대가 가까이 있어 안보·치안 목적의 군경 차량이 다녀야 한다는 이유가 컸죠. 1968년 1월21일 김신조 등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인왕산 자락길을 아스팔트로 포장해 차로로 만드는 계기가 됐던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새 대통령이 집무실과 거처를 옮겨버리고 청와대를 일반에 개방해 버린 겁니다. 뜻하지 않게 차 없는 인왕산로가 열리게 됐습니다. 서촌 주민들이 인왕산로를 보행자에게 돌려주자고 뜻을 모은 지 5년 만입니다.


자동차 물렀거라 인왕산로 열렸다<한겨레21>


서울시는 이번 차 없는 거리 행사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고 좀 더 확대할지 중단할지를 결정하겠다고 합니다. 차 없는 인왕산로는 이렇게 '어느 5월의 기억'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서울시가 망설이는 이유 중엔 객관적인 수치도 있는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차 없는 거리인 덕수궁길은 보행량이 평일 9718명·주말 8912명인데, 인왕산로는 주말 1451명에 불과하고 심지어 차량 통행량이 2056대로 더 많다는 겁니다. 다만, 여기엔 차 없는 거리 지정을 전후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수치라는 반론도 가능합니다.


차 없는 거리로서의 인왕산로는 조금 특별한 지점에 서있습니다. 차 없는 거리는 덕수궁길처럼 밀집한 역사문화자원이 이룬 특유의 정취를 보존하거나, 신촌 연세로나 명동거리처럼 주변 상권을 활성화한다는 명분을 띠는 게 보통입니다. 그런 거리는 대개 도심부에 있지, 인왕산로처럼 산자락에 있지 않습니다. 인왕산로가 만약 영구적으로 차 없는 거리가 된다면 생태적·환경적인 이유를 들어 길을 보행자에게 돌려준 사례로 남을 것입니다. 물론 탑다운(top-down) 방식이 아니라, 주민들이 밑바닥부터 쌓아올린 상향식 논의가 쟁취한 성과로도 기록될 것이고요.


호랑이도 없지만, 이제 자동차도 없는 인왕산을 기대해 볼 수 있을까요?

인왕산로엔 촌스럽지만 늠름한 호랑이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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