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가나 '유니버설 디자인'을 만날 수 있다면
제목을 보고 뭔소리인가 하셨을 겁니다. 주차장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서울시가 송파구 신천유수지 공영주차장의 주차면을 'ㅅ'자형으로 바꿔 재개방했습니다. 주차면을 직각·평행인 '1'자형이 아니라 사선으로 이어붙인 건데요, 사실 우리가 전혀 못 보던 형식은 아닙니다. 단적으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사선 주차면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운전이 미숙한 사람도 휴게소에서 주차할 때는 다른 때보다 좀 더 편하다고 느낀 경우가 꽤 있을텐데, 그게 바로 주차면이 사선으로 생겼기 때문입니다. 서울시가 공영주차장을 ㅅ자형으로 바꾼 이유도 같습니다. 서울시는 "직각 또는 평행 구획 대비 주차 시간이 약 20초 가량 감소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에서는 주차가 느리다고, 각그랜저 타시는 50대 아저씨의 클락션 들을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다음의 이유가 주목을 더 끄는 것 같습니다. "또한 옆 차량과 여유 공간이 확보되어 임산부, 유아, 노인 등 교통약자가 편리하게 승하차할 수 있다"라는 겁니다. 같은 너비일지라도 사선 주차면에서는 평행 주차면과 달리 옆 차량과 문의 위치가 엇갈리기 때문에 다소 여유가 생기긴 합니다. 자녀가 있는 분들은 뒷좌석 카시트에 태우거나 내려줄 때 좁은 공간에서 땀깨나 빼본 경험이 있을텐데요, 여기에서라면 확실히 그게 좀 덜할 듯하네요. '문콕'을 피할 수 있는 건 덤이고요.
그렇다고 해서 이게 이렇게 보도자료를 내면서까지 홍보할 일일까요? 원래 없는 걸 창조한 것도 아니고 이미 휴게소에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휴게소는 차가 수시로 드나들어 원래 속도를 중요시하는 장소라면, 서울시가 만든 사선 주차장은 밀도가 매우 중요시되는 도심에 있다는 점입니다. 주차면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야 하는데, 사선 주차장은 애매하게 버려지는 자투리 공간을 양산하므로 밀도 측면에선 상당히 비효율적이죠.
저는 서울시의 비효율적 선택에서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란 키워드를 읽어보고자 합니다. 서울시엔 '유니버설디자인 도시조성 기본 조례'가 있습니다. 이 조례는 유니버설 디자인을 <성별, 연령, 국적 또는 장애의 유무 등과 관계없이 모든 시민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계획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서울시가 세우고 관리하는 모든 공공시설부터 시작해 도시 전체를 '유니버설하게 디자인하자'는 것이 이 조례에 담긴 목표입니다. 유니버설 디자인 관련 조례는 경기도, 경상남도, 부산시, 광주시, 제주도 등 다른 광역단체와 의정부, 안양, 과천, 순천, 서울 금천·도봉·마포구 등 기초단체에도 있습니다.
서울시가 사선 주차장을 알리며 유니버설 디자인이란 용어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 많은 운전자들 중 아무래도 소수인 임산부와 노인, 그리고 어린이 탑승자를 위해 땅값 비싼 서울에서 주차면 한 개당 거둘 수 있는 적지 않은 주차요금을 포기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유니버설 디자인의 정신을 반영한 행정 아닐까요.
내친 김에 서울시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면, 서울시는 지자체 중에서 유니버설 디자인에 좀 더 진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을 어떻게 디자인하면 누구나 차별 없이 이용할 수 있을지에 관한 <유니버설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꾸준히 펴내고 있습니다. 가이드라인 범위는 가로와 공원부터 복지관·경로당·어린이집 등 공공시설, 그리고 지하철 화장실까지 미칩니다. 이 글을 게시한 날 기준으로 한 30권쯤 되네요. 목록을 훑다 보면 '꼼꼼함'이 눈에 띕니다. 장애인 시설만 봐도 장애인 복지관, 장애인 주간보호시설, 장애인 단기거주시설, 지적 장애인 거주시설, 장애 영·유아 거주시설, 장애인 공동생활가정, 정서행동·발달장애 아동시설 등으로 구분돼 있습니다.
가이드라인을 읽다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건축가들과 공간 디자이너들은 과연 유니버설 디자인을 항상 의식하며 현장에 적용하고 있는 걸까?" 저는 대학에서 건축설계를 전공했는데, 교육과정 내내 유니버설 디자인을 탐구하기는커녕 생각해 볼 기회도 갖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유니버설 디자인이 경계 없는 디자인을 지향하듯, 그에 대한 관심 역시 계획가나 행정가의 몫이라고 선그을 건 아니라는 생각이요. 유니버설 디자인은 배우고 익혀야 하는 어떤 기술이 아니라, 그저 다른 사람의 상황과 행동을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기본 자질의 문제가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유니버설 디자인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하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계단에는 당연히 난간(handrail)이 있어야 하겠죠. 그런데 난간 높이는 어느 정도가 적절할까요? 허리 높이일까요? 대략 90㎝일까요? 하지만 허리의 높이는 성인 남자, 성인 여자, 노인, 아이, 모두 제각각입니다. 난간을 과연 같은 높이에 한 줄로 만들면 충분한 걸까요? 난간을 높이가 서로 다르게 두세줄로 만들면 어떨까요?
물론 몸의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은 장애인과 노인, 임산부는 계단보다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엘리베이터를 부르는 버튼의 높이는 어느 정도가 적절할까요? 혹시 흔히 볼 수 있는 높이의 버튼조차 불편하게 느낄 사람은 없었을까요? 우리글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은 이 엘리베이터 위치를 찾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화장실은 엘리베이터보다 더 다급하게 찾을 때가 많은데, 시각장애인에겐 어떻게 안내해야 할까요?
유니버설 디자인 가이드라인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안을 유형별로 알려줍니다. 큼지막한 픽토그램을 부착하기, 뚜렷한 색깔로 공간을 구분하기, 벽면의 질감을 구분되게 만들기… 노인 이용자를 위해 엘리베이터에 의자를 하나 놓거나, 화장실에 지팡이 걸칠 손잡이 하나 붙이라는 수준의 해법도 있습니다. 이런 답을 아무나 내지 못하는 게 문제일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다만, 그 답을 하기 위한 질문이 애초 없었던 것뿐이죠.
그래서 우리가 '질문하는 훈련'을 한번 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우리 주변을 살피면서 필요한 유니버설 디자인을 창안해 보는 겁니다. 캐나다 에드먼턴의 '비전 제로 거리 실험실(Vision Zero Street Labs)' 프로젝트가 하나의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인과 아이 등 보행자에 친화적인 도시를 향해 나아가기로 유명한 에드먼턴에서 실시 중인 이 프로젝트는 말 그대로 주민 참여를 바탕으로 거리를 하나의 거대한 실험실로 만듭니다. 2032년까지 도로 사망·중상 사고를 0건(그래서 '비전 제로')으로 만든다는 목표 아래 시민의 아이디어를 받아 실행합니다. 노인들이 머무는 장소 주변으로 화분을 넓게 둘러치거나, 횡단보도를 특이한 색이나 무늬로 칠하기도 합니다. 시민이 직접 구현해 나가는 유니버설 디자인인 셈입니다. 내 아이디어가 도시 행정에 반영되는 과정에서 주변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질 것이고, 그만큼 더 많은 유니버설 디자인 아이디어가 발굴될 겁니다. 이렇게 참여를 유도하면 우리는 가이드라인을 30권이 아니라 300권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다른 시민을 생각할 기회를 갖는 것, 그것이 '유니버설 디자인 도시'를 향한 첫걸음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