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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 주 Dec 07. 2022

코로나 수용소

스스한 실상

편도가 약한 내가 환절기 인후염은 달고 살았는데, 마스크로 인해 제법 방어가 된 것인지 감기 없이 코로나 팬데믹을 살아냈다. 주위에 코로나 경험이 없는 사람이 드물다 보니 농담처럼 사람들이 나에게 “슈퍼 면역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친정 식구들 중에 코로나 확진자가 없었고, 친정 엄마의 무개념 행동반경 속에서도 코로나는 잘도 피했는지 걸리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우리 엄마가 다른 건 몰라도 코로나를 물리치는 “슈퍼 면역 유전자”를 주셨다고 믿을 뻔했었다. 


신기루 같았던 데이터에 흠이 생긴 건 큰 언니가 2주 전에 코로나에 걸리면서, ‘아, 슈퍼 면역 유전자는 아니구나!’라고 바로 인정했다. 애써 믿고 싶었던 사실이 아니라고 드러나니 아쉽기도 했다.


언니의 코로나 생존기가 끝마무리될 즈음, 나의 짝지님께서 어디서 묻혀 오셨는지 코로나에 걸렸다. 하필, 본인이 인지하지 못할 때 아가씨(남편의 여동생)를 태우고 병문안을 다녀왔다. 아가씨를 시댁(우리 집과 3분 거리의 옆 아파트)에 내려주고 돌아오는 길에 식사를 하는데 남편은 땀을 흘리더니 오한이 든다고 하였다.


“감기몸살이 온 모양이다.”라며 황급히 뜨거운 보리차를 연거푸 마시고는 이불속으로 직행했다. 코로나가 의심되어 물어도 자기는 감기몸살이라고 우기며 같은 방을 쓰려고 했다. 하기사 코로나에 누구 한 사람이라도 걸리면, 애쓰다가 걸리면 억울하니 그냥 생활하자고 했던 말도 있고 하여, 에라 모르겠다 하고 밥도 같이 먹고, 부러 격리를 하지 않았다. 다음 날도 오한이 교차하며 얼굴이 좋아 보이지 않아 남편을 데리고 병원에 갔는데, 의사는 코로나 증상인 것 같으니 검사를 하자고 하셨다. 자기는 감기몸살이라고 우기더니, 진단키트에는 너무도 명확하게 두줄이 그어졌다. ‘휴~~ 드뎌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일단, 대놓고 걸리기엔 두렵기도 하고 피하고 싶은 것이라 남편을 다른 방에 눕혔다. 이미 밥도 같이 먹었고, 같은 공간에 머물렀기에 나와 딸아이는 시간차 문제이지 싶었다. 혹시나 모르니 냉장고를 채워놔야겠다 싶어 장을 봐 왔다. 일주일 이상 먹을 과일과 야채와 고기를 비축해 놓았다.


다음날까지도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나도 딸아이도. 자가진단키트로 확인을 했으나 ‘음성’이었고,  별다른 증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저녁을 먹고 치웠는데, 몸에 증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근육통을 동반한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밤새 뒤척이며 끙끙 앓았지만 아침에 몸을 겨우 일으켜, 딸아이의 아침을 차려주고 병원을 향했다. 이때까지 딸아이는 반응이 없었다.

나 역시 진단키트에 선명한 두줄이 그어졌다. 이제 우리 집에 2명의 코로나 격리환자가 생겼다.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몸져누웠다.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도 뭔가 이상해 보여 온도를 재었더니 고열이다. 부랴부랴 진단받은 병원으로 아이를 데리고 갔다. 역시 두줄이다. 나와 같은 날 확진을 받았다.

이미 나의 몸도 가누기 힘들 정도였으나, 아이를 케어해야 했고, 아이도 링거를 한대 맞혀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런. 데 링거를 다 맞아갈 즈음 남편이 전화가 왔다. “곧, 00이 병원으로 갈 거야.” 남편의 여동생이었다.

아마도 주말 차량 동승 때, 바이러스가 아가씨에게도 전파가 된 모양이었다. 남편은 그때까지도 우리 집에서 바이러스의 근원이 자기임을 부정하고 싶어 했다는..^^;;

결국, 남편의 바이러스는 나, 딸아이, 아가씨에게 전파가 되었다.


그리고 세 사람의 추가 확진으로 인해, 우리 집은 코로나 수용소가 되었다. 


이유는 시댁에 시부모님은 코로나로부터 무조건 지켜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코로나에 걸리기 전, 일주일 전에 아버님의 큰 수술이 있었다. 하여 아버님은 입원을, 어머님은 간병을 하시는 관계로 두 분은 병원에 계셨다. 우리가 격리 중에 아버님의 퇴원이 예정되어 있어서, 코로나 환자를 집에 둘 수 없었으므로 아가씨 역시 우리 집으로 격리를 시키게 되었다.


마치 코로나 수용소 같은 분위기였다. 


남편이 옮겨 준 바이러스는 아주~~ 아주 독했다. 고열이 지속되었고, 근육통과 오한이 동반되었고, 목은 말할 것도 없이 통증이 심했고, 피로감과 무기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틀 빠른 코로나 환자였던 남편은 길잡이 같은 역할을 했다. 곧 나아진다며 우리를 다독였고, 조금 나은 본인이 끼니를 책임지기도 했다.

미리 격리될 것을 염두하고 장을 봐 두었으나, 아무도 음식을 차려 낼 기력이 없었다. 

배달음식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할 기력은 없지만 약은 먹어야겠기에, 어린 딸의 끼니는 챙겨야 하기에 시켜서 먹었다.


나의 고열도 고열이었지만, 딸아이의 고열을 잡아내느라 온전히 쉬지 못한 나는 딸아이와 아가씨에 비해 회복력에 확연히 차이를 보였다. 열이 잡히자 딸아이는 아프기 전과 다르지 않게 잘 놀고 잘 먹었다. 나보다 두 살 어린 아가씨도 잘 자고 잘 먹으니 회복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딸아이가 괜찮아짐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마음을 놓고 아프기 시작했다. 두 사람과 같은 날 확진을 받았지만, 그들보다 이틀 정도는 더 아팠던 것 같다. 그리고 나만 현재 미각과 후각을 잃은 상태이다.


오늘로써 격리 해제가 되는 날이다. 튼튼한 몸이었다면 갑갑했을 일주일이었겠지만, 전혀 갑갑하지 않았다. 온전히 아픈 날들이었기 때문이다.

내일부터 아가씨는 집(시댁)으로 돌아갈 것이고, 딸아이는 학교에 등원을 할 것이다. 이틀 전 격리가 해제된 남편은 회사에 출근과 동시에 늦은 귀가를 한다. 엄청난 업무량을 소화하느라 눈꼴 뜰새 없이 바쁘다고 하니 또한 안쓰럽다.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고 있는 듯하다. 다른 이의 코로나 바이러스 모험담을 이제 내가 쓰고, 기록하고, 남기게 될 줄이야. 경험은 듣는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아직 남은 나의 ‘슈퍼 면역 유전자’ 둘째, 셋째 언니에게 말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셔, 절대 걸릴게 못 되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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