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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걸 Apr 11. 2017

사랑합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반지하, 옥탑방, 시골의 폐가를 거쳐, 직접 지은 나의 집 나의 인생

유년시절, 아버지의 사업실패는 허름한 집으로 이사 가는 것으로 다.

서울에서 월세로 살던, 반지하와 옥탑방이 아직도 기억에 뚜렷하다.

좁은 반 지하집에서 짐을 한편에 쌓아놓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사를 갈 때쯤에야 발견했다.

곰팡이가 잔뜩 핀 앨범

그속에서 구해낸 몇장


우리 가족의 추억들은 반지하집에서 모두 망가져버렸다.     


그다음 이사 곳은 볕이 잘 드는 옥탑방이었다.

개운한 바람은 퀴퀴했던 나를 살균시킨 듯 들뜨게 했지만,

계절은 바뀌고 상쾌했던 바람은 겨울의 칼바람으로 바뀌었다.     


내게 가난이란...

퀴퀴하고

추울 때 더 춥고,

더울 때 더 더우며.

추억을 망가뜨리고.

부모님이 서로 싸우게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야, 경기도 변두리 빌라로 이사 갔다.

그 집에서, 우리 집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집이 일어선다?

집은 우리 가족의 모든 형편을 대변하는 곳이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각종 아르바이트를 해서 부모님과 한 개뿐인 통장에 돈을 같이 모았다. 그리고.... 그래서...

내가 결혼할 무렵에서야, 우리 집은 원래 살던 서울의 중심가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 집에서 부모님을 모시며 사는 것으로, 우리 부부의 신혼생활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아내를 예뻐해 주시지 않으셨다.

난, 우리 어머니는 천사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었는데...

결혼 후에야, '우리 어머니도 시어머니구나...'라는 것을 깨우쳤다.

무엇보다, 버릇처럼 매일 부부싸움을 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이 아내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아내는 그때부터 아팠다.

어머니는 주부습진이 대수냐며 내게 면박을 주시고, 보려 하지도 않으셨다.

아내의 손가락 마디마디 피가 터졌는데 피가 터진 그 손으로

매일 아침 5시부터 일어나 요리를 하고 설거지도 했다.      

나는 어머니께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내의 손을 한번 보기나 하시라고, 불같이 화를 냈다.     

어머니는 그다음 날 아침에야 아내를 불러, 손을 보시고      

우셨다.      

안아주시고 미안하다 하셨다.     

본인도 그렇게 상황이 심각한지 모르셨던 것이다.     

나도 숨어 울었다.           


다음 달, 우리는 분가했다.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 전 이 아이와 사는 게 너무 행복하고 좋아요. 제가 행복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며느리 이뻐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어머니는 정말로 변해주셨다.

그 날 이후, 어머니가 아내를 대하는 모습에서 진심 어린 정성을 느낄 수 있다.

아내와 어머니가 살갑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 아직도 가슴을 쓸어내린다.      

하지만, 한번 상처받은 사람은 그 생각을 안 할 수는 있어도, 그 기억을 지울 수는 없다.       


나는 아내를 2007년 공항에서 만났다.

그러니까 10년. 우리는 그동안 한 번도 언성을 높인 일이 없다.

유독 부부싸움이 많은 집에서 자라나,  결혼하면 절대로 싸우지 않겠다는 결심은 일상이 되었다.

부작용이 있다면, 부부끼리는 안 싸우는데, 아내도 나도 애들과는 싸운다.


어쨌든, 그렇게 우리 부부는 분가했다.

꿈에 그리던 우리 둘만의 신혼생활은 허름한 빌라에서 시작됐고.

그 허름한 빌라를 우리 부부는 직접 수리해서 들어갔다.     

결혼도 했고, 분가도 했으니까. 지금이야말로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을 살아보겠어.

5년간 다니던 출판사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그 봄

4월 1일에, 아내는 “오빠, 여기 봐 두줄이야.”라고 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4월 1일에 하냐? 만우절이잖아.”


살고 싶은 삶을 살아보고자 직장을 그만뒀는데, 아내가 임신을 했다.

일단, 서울에서 아이를 낳을 때까지 살기로 했다.

그동안, 우리는 직업학교를 다녔다.

남는 시간에 가까운 공원을 산책하고, 볕을 맞으며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장을 보고,

같이 모든 걸 같이...

그때가 우리에게 가장 따듯하고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따스한 계절을 아름답게 보내고. 아내는 12월에 출산을 했다.  


서울에서 모든 것을 처분했다. 마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그리고 이번에는 홀로 떠났다. 아무 연고도 없는 전라북도 장수에서 살 집을 구했다.

3년 동안 비어 있던 폐가였는데, 그 집을 직접 수리했다.


그 당시 페북에 썼던 글이다.


뭘 믿고 그래 겁이 없나?     

20대 처음으로 배낭여행을 갈 때 가이드북도 없이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 인도로 떠났다.

가장 저렴한 항공권을 달라해서 갔는데...

여행사에선 설명을 자세히 해줬지만, 내가 흘려들었나 보다.     

인도가 아닌 네팔에 도착했다. 때는 어두컴컴한 밤...     

치안이 안 좋은 나라는 밤에 도착하면, 공항에서 아침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카트만두 공항 의자에 앉아 멍 때리는데, 공항 close time이라고 나가란다.     

시골 기차역만 한 공항.

당황스럽게 쫓겨 나왔는데... 까만 얼굴 수십구가 나를 둘러싸고, 웅성 인다...

그렇게 내 첫 배낭여행은 시작됐다.

수십 배의 택시비를 물고, 몇 배의 호텔비로 첫 밤을 보내고, 가장 먼저 한 일이 게스트하우스를 돌아다니며 한국사람을 찾는 거였다.

그래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즐거운 추억이 될 수 있었다.

내 지난 추억 속에 주인공들에게 고맙다. 그중에 몇몇은 아직도 주변에 남아있음에도...      

조립 컴퓨터가 유행하던 시절.

컴퓨터도 하나도 모르면서, 인터넷으로 조립방법을 보니, 대략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용산으로 달려가서 적어간 부품을 다 사 왔고, 용감히 조립을 감행했다.

결국, 조립을 했는데도 컴퓨터가 켜지지 않아, 무거운 본체를 들고 지하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서, 전문가의 손길을 기다려야 했다.  

일단, 저질러 놓고 문제가 생기면 최선을 다해 수습한다. 이것이 방식이라면 방식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좀 더 꼼꼼해지긴 하지만, 아직도 버릇은 못 고쳤다.     

귀촌도 그렇게... 아내와 생후 4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시작했다.

무식한 놈이 용감하다고, 시골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으니 용감할 수 있었나 보다.

뭐~ 인생을 대략 이렇게 일단 부딪치고 풀어나가는 식이다 보니, 시행착오가 많을 수밖에...



시골 생활은 그렇게, 일단 부딪쳐서 풀어보는 내 특유의 저돌성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시골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즐기지 못했다.  

공기 좋은 곳에서 살면 다 나을 줄 알았던 아내의 한포진은 쉽게 낫지 않았고,

우리가 사는 마을에서 제일 젊은 사람이 60대이다 보니,  주변에 말벗할 친구가 없었다.

그건 자라날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젊으니까, 외국도 아니고 시골에서도 뭐든 해서 먹고살 수 있지만, 그러려고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니까.


게다가, 시골은 '꿈에 그리던 자연 속의 생활'이 아니라, '체험 삶의 현장'이란 문구가 더 어울리는 곳이었다.  

단지, 니어링 부부처럼 조화로운 삶을 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리고, 난 어디로 가든, 누구와 함께 하든, 잘 살아낼 자신감 아니,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마음가짐이 장애가 되어서, 나는 그곳에 뿌리내리지 못했나 보다.


시골의 허름한 폐가를 고쳐서 살았고, 어린아이들이 있었고, 집에서 쥐가 나왔고, 여름에 덥고 겨울엔 추웠고, 아내가 한포진을 앓고 있었고, 기타 많은 이유 때문에....  

내 집에 대한 욕구만 커져갔고, 집을 짓는 것에 대한 연구는 매일 밤 인터넷을 통해서 했다.

간과한 게 있었다면, 직접 짓는 현장을 가본다거나, 사람을 만난다거나... 등의 실제적인 경험은 할 수 없었다. 어린아이와 아내만 남기고 출타를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는 그렇게 인터넷만 보고 내 집을 지을 결심을 했다.


집을 지으려면 우선 내 땅이 필요했다.

검색창에 '초등학교 옆 땅'이라고 쳤다.

아이들은 커갈 것이고, 시골에서 아이들을 차로 통학시키는 일은 생각만 해도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터넷을 통해서 알게 된 땅이 지금 우리 집터다.

거의 4년간의 깡촌생활을 접고, 그래도 도시와 가까운 지금의 시골로 이주한 셈이다.


1년 6개월 만에... 아니, 이 세계의 시간이란 개념으로 따지기 힘든,

내 얼굴이, 내 몸이 10년은 늙어버린 -주관적이지만은 않은- 긴 시간이 지나서... 우리 집은 완성이 되었다.

이 집에 사는 소소한 느낌이라면 안도감 그리고 충만감.


아내가 이유도 모른 채 8년간 앓던 한포진이 나았다는 것.이다.

아내가 잠깐씩 행복하다는 사실을 잊을 때쯤.

상기시켜준다.

"아픈 거 나았는데, 우리가 왜 웃지 못하는 거지? "


마을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

이 집과 저 집을 마치, 자기 집인 양 천연스레 드나들며, 뛰노는 아이들의 너무나 즐거운 모습.

얼굴이 새빨질 정도로 실컷 뛰어놀고도 내일은  뭐하고 놀지? 한다.

아이들이 부럽다. 다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신이 꿈꾸는 어떤 곳을 가든... 당신이 꿈꾸는 누구를 만나든...

양이 있는 곳에, 음이 있고. 선이 있는 곳에 악도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곳은 그렇고 그런 게 모두 다 섞여 있는데, 

좋은 것만 취하기 위한 노력은 어리석은 것인지도 모른다.


단지, 내게 속한 세상을 어떻게 조화시키고 아름답게 꾸밀 것인지 생각한다면 

지금 이곳, 내 안에 실마리는 있다.


"나의 모든 잘못을 다 감싸준, 나의 동네에 올해 들어 처음 내린 비"- 김현철의 동네


한 인간이 자라는동안 얼마나 수많은 잘못과 실수를 하며 성장하는가.

그 많은 실수와 잘못도 따듯한 마음으로 안아줄 그런 아빠, 혹은 동네 아저씨가 되고 싶다.


나는 예전보다

힘든 일을 더 하고,  적게 벌지만.

앞으로 또 어떤 충동을 받아, 어떤 길을 선택할지 알 수 없지만.

소소한 일상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았으니까.


사랑합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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