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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Jul 11. 2016

영화 '돌연변이', 우리는 돌연변이인가.

영화 '돌연변이'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생선이 된 박구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그는 단지 돈 30만 원이 없었다. 단지 아르바이트로 바로 신약 실험에 참여했다.

그 결과, 생선 인간이 된 박구의 모습은 영화를 단지 코믹하게 만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영화는 알만한 이에게만 조용히 속삭인다.

"사실 너도 평범하게 사는 것이 쉽지만은 않지? 그렇지?"

생선 인간은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우리 사회가 평범하게 살기를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1.

인간이 생선으로 변했다는 사실에 득달같이 달려드는 사람들.

모두 돈에 미친 사람들이다.

정규직이 되기 위해 특종을 노리고 자신의 신분을 숨긴 기자.

돈을 벌기 위해 썸남을 제약회사에 팔아버린 썸녀.

피해보상금을 받기 위해 갑자기 아들을 찾는 아버지.

사건을 맡고 국회에 진출하고 싶은 인권(?) 변호사.

영화의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사람이 돈을 좇는 게 뭐 어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썸녀의 말 한마디가 관객에게는 어색하지 않다.

관객은 코믹 영화인 듯 피식하기도 한다.


그러나 생선 인간으로 변했다해서 사람이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다.

모습이 단지 보기 불쾌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본질을 잃은 것은 아니다.

생각과 말, 행동이 다 사람인데 어떻게 해서 그가 사람이 아닐까.

교통사고로 얼굴이 흉측하게 변한 사람도 사람이고 식물인간이 돼서 몸을 쓰지 못해도 사람이다.

돈이 된다고 해서 사람을 돈의 수단으로 팔아버린다는 것이 익숙하다.

옳고 그른지에 대해선 우리는 둔감하다.

오히려 사람들은 썸녀가 자신의 썸남이었던 생선 인간을 돈 받고 파는 장면에서 웃는다.



2.

 사람들은 다름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것은 단지 틀린 것일 뿐이다. 생체실험의 피해자가 된 박구는 생선 인간이 되었다. 다른 사람과는 외관이 다르다. 외관이 다른 그는, 타인의 눈에 단지 틀린 사람이다. 틀린 존재이다. 틀린 존재는 자연스럽게 이 세상엔 없어야 할 대상이 된다. 결국,  극 중에서 모두 그의 소멸을 바란다. 종교계는 그가 사탄이란다. 정치계는 그가 종북좌파란다. 나와 너를 가르고 적과 아군을 나눠 뭉치기 좋아하는 우리들은 '다른 것'을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김광규, <도다리를 먹으며>


일찍부터 우리는 믿어왔다.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하거나

하느님이 우리를 닮았으리라고


말하고 싶은 입과 가리고 싶은 성기의

왼쪽과 오른쪽 또는 오른쪽과 왼쪽에

눈과 귀와 팔과 파리를 하나씩 나누어 가진

우리는 언제나 왼쪽과 오른쪽을 견주어

저울과 바퀴를 만들고 벽을 쌓았다.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자유롭게 널려진 산과 들과 바다를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고


우리의 몸과 똑같은 모양으로

인형과 훈장과 무기를 만들고

우리의 머리를 흉내내어

교회와 관청과 학교를 세웠다.

마침내는 소리와 빛과 별까지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고


이제는 우리의 머리와 몸을 나누는 수밖에 없어

생선회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신다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도다리의 몸뚱이를 산 채로 뜯어먹으며

묘하게도 두 눈이 오른쪽에 몰려 붙었다고 웃지만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오른쪽과 왼쪽 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결코 나눌 수 없는

도다리가 도대체 무엇을 닮았는지를.


3.

 생선 인간이 된 박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꿈이 없는 사회다. 평범하게 살고 싶지만 박구는 평범하게 살 수 없었다. 그나마 평범하게 살려면, 내가 꾼 꿈이 아니라 남이 꾼 꿈을 대신 꾸고 살아야 한다. 공무원, 공무원, 그의 아버지가 입이 닳도록 그에게 강요하는 꿈이다. 고시촌에 사람이 바글바글하듯, 박구는 아버지 뜻을 따라 그 바글바글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남의 꿈을 대신 꾸는.


 박구의 세상을 들여다보면 '헬조선'이라는 말을 부인할 수 없다. 누가 봐도 영락없는 헬조선이다. 평범하고자 했던 젊은이를, 몸을 팔아야만 했던 구렁텅이로 몰았던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사회이다. 그 사회에 그로 대표되는 젊은이들은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자기 탓'으로 모든 원인을 귀결시킨다. 젊은이들이 자신의 책상 하나 놓을 사무실이 없는 것은 모두 그들 스스로 이른바 '잘난 사람'이 되지 못한 탓이다. 그들은 그 잘난 사람이 되기 위해 3평 남짓한 방에서 하급 공무원이 되기 위해 밤을 새운다. 모든 젊은이들이 하급 공무원이 되기 위해 그들의 젊음을 바치는 나라. 수천수만의 경쟁에서 하급 공무원이 된다는 것은 당연히 쉽지 않고 이룬다면 그것은 과연 그들에게 행복으로 남을 수 있을까.


 누군가는 젊은이들이 게으르다고 한다. 놀고먹는 젊은이들이 성공을 바라는 게 말이 되냐고. 우리나라의 모든 젊은이들은 대학가 앞에서 술만 마시고 있을까. 그렇다면 낮에는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저녁에는 알바로 등록금을 벌고, 밤에는 공부하는 젊은이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누구 탓일까. 노력이 성공으로 연결되지 않는 사회에서 금수저가 아닌 것을 받아들이고 공무원 시험 준비 책을 펼치는 것은 이제는 당연한 것이 되었다. 고등학생 땐 수능이 답이다. 면접이 답이다. 논술이 답이다. 온갖 답들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진짜 답을 찾기 위해, 부모님들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코피를 쏟았던 젊은이가 이제는 3평 남짓한 고시원 방에서 남들이 만들어낸 '철밥통'의 꿈을 얻기 위해 흙수저로 성을 짓고 있다. 나도 그 젊은이로서 다른 젊은이에게 손수건을 건네고 싶다.

 박구는 그렇게 보라카이 바다에서 우리에게 손수건을 건네고 있다.

 이제 그만 우리도 보라카이 바다로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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