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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Feb 26. 2017

정우의 도덕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영화 <졸업반>, 홍덕표 감독/ 연상호 제작 각본

 도덕은 정말이지 중요한 문제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르던 정치인의 인기도 도덕성에 흠이 밝혀 지면 금세 고꾸라지기도 한다. 도덕성의 판단이 정치인의 문제로만 국한되기엔, 우리끼리도 도덕성은 사람의 됨됨이를 따지는 데에 중요한 기준이다. 이것은 곧 그 사람이 내게 좋은 사람이 될까를 대변해주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졸업반에 등장하는 주희는 쉽게 그 도덕성을 의심해볼 만하다. 적어도 한낱 우리들의 입장에선 그렇다. 소위 창녀촌에서 일하는 주희. 대학 졸업과 그 후의 유학생활을 보장하기 위해선 주희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곤 하지만, 이런 말이 같은 과 친구들에게 먹힐리는 없었다. 예쁘고 실력이 좋아 여자애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던 주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렇고 그런 년이 되어버린다. 언제 자기들이 그런 여자애를 동경해왔는지도 모를 만큼, 우습게 그들은 동경해오던 자신들을 잊고 바삐 경멸로 태세를 전환한다. 이제 주희는 도덕성 하나 없는 파렴치한 여자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던가, 주희를 짝사랑하던 정우는 주희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동분서주이다. 그녀가 창녀촌에서 일을 하든 안 하든 그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흔히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도덕성은 정우의 사랑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자기를 좋아하면 좋겠지만,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는 짝사랑하는 주희가 부디 지금보다 나은 상태이길 바랄 뿐이다. 사랑은 종종 불필요한 시선이나 기준을 벗어던지게 도와주기도 하나보다. 자연스럽게 영화는 국경을 허문 사랑처럼, '사람들의 도덕'이라는 잣대를 벗어던진 로맨스를 순순히 보여줄 것만 같았다.

 

주희, 걔 이상한 얘야.

 정우의 단짝친구 동화는 주희를 멀리할 것을 당부한다. 자신을 도와달라며 쉽게 자신의 몸을 동화에게 허락하는 주희가 정우에게 이로울 리 없을 것이라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도덕이라는 장벽은 손쉽게 허물고, 이제는 나아가 지구마저 종말 시킬 것 같은 정우의 태도는 동화의 충고 앞에 급격히 U턴을 취한다.


뭐?

 정우는 주희에 대한 모든 감정과 지원을 완전히 집어치운다. 오히려 냉소적인 태도로 주희를 궁지에 몬다. 그리곤 정우 스스로 자신의 사랑은 고결하여 결국 상처받는 건 자신뿐이라며 위로를 한다. 도덕성도 없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한 자신을 다독이며.

 여기서 도덕이라는 것은 정말 모호한 문제이다. '창녀촌에서 일한다'라고 요약된 그녀의 도덕성은 정우의 눈엔 휴대폰 액정보호필름에 난 스크래치보다 미세한 것만 같았었다. 꿈을 위해선데 뭐, 이 정도로 가볍게 치부할 수 있는 그런 문제였다. 그러나 단지, 주희가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닐 수도 있다, 혹은 주희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자신만이 아닐 수 있다는 암시는 정우에겐 극복할 수 없던 문제였던 것이다. 유일성(uniqueness)의 박탈은 정우를 '도덕'이라는 모호한 문제에 관대해질 수 없는 곳까지 내몰았다. 그의 넉넉한 그물코는 멸치 똥 하나 통과할 수 없는 지옥이 된다. 결국 유일성에서 쫓겨난 정우는 남들처럼 그녀를, '창녀'의 지위에 가둔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그녀를 눕힌 것처럼 정우의 도덕은 자유자재이다.

침대의 크기에 맞게, 키가 큰 사람은 발목을 자르거나 키가 작은 사람은 잡아당겨 찢었다는 프로크루스테스.


 sour grape(신 포도). 여우는 오를 수 없는 포도나무를 보면서, 저 먹음직스러운 포도는 사실 신 포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우는 유일성을 허락지 않는 주희를 대하면서 어차피 저 년은 창녀야라는 식의 합리화를 강행한다. 그리곤 자신은 상처받은 영혼이라고 생각해 마지않는 것이다. 정우의 탄력적인 도덕이란 잣대가 비참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유일성의 거절, 즉 자신의 실패를 자기 연민으로 치환하는 행위보다 비참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살면서 성공할 날도 많겠지만 그만큼 실패할 날도 많을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불쌍한 놈이야. 저런 것에 엮이다니.' 더 일상적으로는, '엄마는 나만 미워해, 엄마 미워.'와 같이 사실과는 다른 자기 최면을 일삼아서 자신에게 나아질 것은 그 당시의 기분 말고 없다.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를 위로하는 행위에서, 앞으로 더 나은 현실을 마주할 수 없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위로의 순간이 지나도 반복되는 똑같은 현실에서, 다시 자기 최면으로 세상의 부정을 일관할 것이냔 말이다. 그니까 나 말고는 모두 나쁜 사람으로 치부하던지, 내가 성공한 일 이외에는 모두 부질없거나 부당한 일로 치부하던지. 정우는, 개새끼인 것이다 아주. 포스터 그대로 정우의 순정은 주희에겐 폭력이다. 가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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