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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Dec 13. 2017

인생, 위플래쉬

영화 <위플래쉬 whiplash>

 이제는 수월하게 풀릴 때가 되었다. 인생이라는 게, 자기네들끼리 엉키고 그리고 얽혀서 끝에는 굳어서 아주 콱 막혀버렸었다. 틀어막힌 목구멍 틈새에 아주 작은 숨구멍 하나, 그곳에서 새는 숨 한 가닥에 기대어 겨우 살았었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인생이 술술 풀리고 사르르 녹고 흘러줘야, 또 그래야 살만하지 않을까.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만이 삶의 마중물이라는 건 아니다. 이는 앤드류 역시 알고 있다. 단지 최고의 음악학교라는 '쉐이퍼 음악학교'에 몸을 담고 있는 것만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노력 없이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드럼을 치다가 손에 피가 난다. 그 위에 밴드를 붙인다. 다시 드럼을 치고 피가 나고 밴드를 붙인다. 그리고 다시 피가 나면 찬 얼음물에 손을 쑤셔 넣고, 손이 차라리 고통을 잊기를 기다린다. 그런 식으로 시간에 간청해보는 것이다.



 시간이라는 덤덤하고 무던한 녀석에게, 조금의 앙탈이라도 그러니까 이 정도 했으면 그만 내게 빛을 보여달라고 치대려면 손에 피 정도는 철철 흐를 정도로 인생에 진지해야 한다. 그 정도 노력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앤드류는 그랬다. 마찬가지로 나도 그렇게 살았다 기꺼이 믿는다. 기꺼이.

 그러나 쉽사리, 곤궁한 처지는 변하지 않는다. 드럼을 아무리 두드려대도, 앤드류는 메인 드러머가 될 수 없었다. 드럼 탑이 피에 젖어도, 그는 조수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손가락의 굳은살이 갈라지고 습진으로 변해도, 아름다운 미래로 스스로를 위로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때는 겨우 담배 한 개비에 기대서,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거라 힘 없이 쌓인 노력에게 위로를 건넸다. 그리고 지난날의, 나를 괴롭혔던 모든 고통들에 곧 다가올 내일을 위함이었노라고, 내 삶의 용해점에서 그 고통을 용서하겠노라고 다짐했다.

 고통을 녹일 용해점은 그러나 찾아오지 않았다.



 앤드류의 고통은 어느 누구도 위로해줄 수 없었다. 그의 여자친구인 니콜마저. 드럼을 때려 부술 정도의 고통과 분노를, 인생을 한 판 때려눕혀 묵사발 내고 싶은 증오를 그 누구도 이해해줄 수 없었다. 오로지 앤드류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앤드류 역시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듯이.


 나의 고통 역시 그러하다. 나에게만 고통스럽다. 다른 좋은 날이 있을 거라는 말은 좋은 위로이다. 그러나 그런 좋은 날을 겪어본 적 없는 이에겐 구세주의 재림만큼이나 아득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 또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온전히 내 것처럼 느낄 수 없으므로, 내 고통이 모두 이해받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이해를 받는다고 해서 나아질 고통도 아니니. 어쩌면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시간이, 내게는 필요할는지도 모른다. '그만 하면 잘했어' 하고 지나간 또는 머무른 고통을 반추할.



 인생은 쉽사리 그런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고통이, '나'라는 몸을 남김없이 갉아가길 기다리는 시간조차. 금세 해일이 몰아일어, 서있는 자리조차 위태해지고 만다.  아, 이것이 인생인가.

 눈물이 나기 무섭게, 플래쳐는 울다 만 앤드류의 뺨을 후려친다. 정신 차리라고, 인생은 실전이라고. 무너지든지 말든지.

 고약하다. 인생은 정말이지 고약하다. 내게 울 시간을 달라.



 어찌 되었든 보기 좋게 앤드류는 인생을 비웃는다. 인생이 만든 무대에서, 자신을 연주한다. 등신 새끼라는 욕지거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무대를 내려온 앤드류에게, 어떤 삶이 또 몰아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당장 고약한 그 무대에서 멋진 푸닥거리를 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삶이 몰아치든, 연주할 '자신'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디인가, 언제인가. 내 무대는. 내 무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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