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엘리사의 머리에 새빨간 머리띠를 씌운 건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그러니까 엘리사의 밋밋한 삶에 색을 더한 것은. 사랑을 몰랐던 엘리사가 살아온 건, 삶이라는 이름으로 굴러가는 컨베이어 벨트 위의 '무의미'였다. 기계처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늘 하던 대로 자위행위를 출근을 퇴근을 하고, 그리고 잠에 들고 다시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는 삶. 자위행위마저 틀에 짜인 스케줄 안에서 해결하는 그녀에게, 삶이란 그저 '살아있음'이라는 표현 말고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런데, 사랑이 찾아왔다. 무채색의 옷, 무표정의 얼굴의 그녀에게 색이, 미소가 찾아온 것이다.
연애야
내 잠을 깨워다오.
모든 잠을,
손가락의 잠
머리의 잠
사지의 잠,
하여간에
온몸을 깨워
대지는 구르고
시간은 부화하고
장소들은 생생하여
온몸이 샘솟게 해다오.
연애야.
기도와 명상
지적 모험들이 으레
무슨 잠인지를 또한 깨운다 한다마는,
연애야
네 속에서 발효하는 명상
네가 조각하는 기도
네가 숨 쉬는 모험만큼은
생생하지 않느니.
다만 그런 사랑은 드물고 드물어
흔히 유예의 그늘 속에 서성이지만,
어떻든 너는
샘 솟는 각성,
비할 데 없이
샘솟는 각성 아니냐.
- <연애>, 정현종
정현종 시인의 <연애>라는 시처럼, 사랑은 무미건조한 우리의 삶에 알록달록 색을 칠한다. 먹고살기 위한 목적 없던 젓가락질로 쑤셔 넣던 우동 가락도 이제는 사랑 덕분에 소중하고, 위압적인 도시의 빌딩숲도 잿빛의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구름 위를 뒹굴 듯 천국 같은 법이다. 사랑이야말로 시시콜콜한 세상사를 삶의 주변으로 둘러싼 배경으로 밀어 넣는다. 마치 우리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흑백영화처럼 뿌옇게 어두워지고, 사랑을 나누는 우리만이 무미(無味)한 세상에서 색색(色色)이 활력을 띠는 듯이. 맛을 내는 듯이.
시간이 강물처럼 흐르기만 바라던 지루하고 더딘 삶이었는데! 지루한 삶을 하루하루가 아니 한 시간, 일 분 일 초가 이토록 생생케하는 사랑에 평생토록 빠져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정현종 시인의 말처럼 '그런 사랑은 드물고 드물어 / 흔히 유예의 그늘 속에 서성'일 뿐 쉬이 그 애타는 모습을 보이질 않는다. 아름다운 사랑이 더 값져 보이는 이유는 그런 탓일지도 모른다.
엘리사의 사랑도 <연애>에 적힌 시어(詩語)처럼 쉬이 오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사랑한 대상은 인간이 아니었으므로. 더구나 동물도 식물도 아닌 괴생명체였으므로. 보통 사람은 괴물과 사랑을 하는 그녀를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녀와 친한 친구인 델릴라도 처음엔 그녀의 말을 믿지 못했었다. 그러나 엘리사에게 사랑하는 이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말을 하고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이라도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꺼내는 말을 하나도 이해해주지 못하는데, 말을 하지 못하는 괴생명체라도 자신의 감정과 말을 빠짐없이 이해해주는데. 그래서인지 상류층 인간인 스트릭랜드가 엘리사의 감정과 무관하게, 그녀를 똥 닦개(Shit wiper)라고 부르면서 범하려 했던 장면은 엘리사가 괴생명체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과 과히 대조적이다. 정말 사랑할만한 것은 사람인지, 사람이 아닌 것인지.
극 중에서 엘리사는 말을 못 하는 벙이리라는 이유로 장애가 없는 사람에게 여태껏 무시받아왔다. 그러한 타인의 태도에 엘리사는 그러려니, 당연하게 받아들였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적어도 그녀에게 사랑할만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혹은 것)은, 말을 멀쩡하게 하는 사회생활을 멋지게 해내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이해해주는 괴생명체이기 때문에. 엘리사에게 필요한 사랑의 조건은 인간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괴물이어도 나를 이해해주어야 한다는 사실이기 때문에.
결국엔 우리 삶에도 그렇다고 나는 느낀다. 아무리 아름답고 멋진 사람이 곁에 있더라도, 내가 느끼는 감정을 이해해주고 더불어 보듬어 느껴주어야 비로소 그때야 사랑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그렇게 사랑하고 싶다.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