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 기택의 칼 끝에서 시작하는 공생의 조건
*아래는 영화의 줄거리를 포함함.
왜 하필 박사장이었을까. 영화관을 나오면서도 머릿속에는 그 궁금증이 남아있었다. 기택(송강호가 연기한)이 떨어진 칼을 주어들고 향한 곳은 다른 곳도 아닌 박사장(이선균이 연기한)이었다.
박사장은 기업체를 거느리는 회사의 대표이고,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둔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그는 그의 벌이만큼이나 으리으리한 집에 살고 있었고, 운전기사에 가사도우미 그리고 고액 과외 선생님까지 여럿 둘 정도로 소위 능력 있는 사람이다. 그런 번쩍번쩍하는 집에 가장 처음 입성한 사람은 기우(최우식이 연기한)였다. 재수는 기본으로 하고, 군 전역 후에 삼수 사수까지 실패한 기우는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집에서 소일거리를 찾아 푼 돈을 버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 때에, 기우의 친구 민혁(박서준이 연기)이 대뜸 찾아왔다. 민혁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수집해온 수석(수석) 중 하나를 내밀면서, 자신이 과외 선생님으로 가르쳐온 학생을 대신 맡아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좋은 과외 자리라 아쉽지만, 유학 길에 올라야 해 어쩔 수 없다는 민혁이었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기우 역시 좋은 기회라 생각했지만 대학조차 가지 못한 자신이 수능 영어를 가르치는 과외 선생님이 된다니 마음에 걸렸다. 민혁의 설득으로 결국 기우는, 박사장네 첫째 딸 다혜(현승민)의 가짜 명문대생 과외 선생님이 된다. 모든 일의 발단이었다. 이후에 기우는 자신이 거짓으로 명문대생 수능 영어 과외 선생님이 된 것도 모자란 지, 여동생과 아버지 그리고 엄마까지 박사장네에 꽂는다. 대략 “제가 아는 좋은 선생님이 있는데요.”라고 시작되는 거짓말에 박사장 부인인 연교(조여정이 연기한)가 깜빡 속는 탓이다. 그렇게 다혜의 영어 선생님, 다송의 미술 선생님, 운전기사, 가사 도우미가 된 기우네 가족 일원들은 영화제목대로 박사장네에 기생에 성공한 듯하다. 그러나, 사건이 찾아온다.
기우네 가족이 박사장네에 기생한 첫 번째 사례가 아닌 데에서 사건은 비롯한다. 기우의 엄마, 충숙(장혜진이 연기한)이 하고 있는 가사도우미의 전임자인 문광(이정은이 연기한)은 사실 4년째 자신의 남편을 박사장네 지하실에서 몰래 살게 한 것이었다. 이른바, 문광네 가족은 선임 기생충이었다. 이 사실로 박사장네가 캠핑 간 그날, 집주인이 비운 그곳에서 기우네와 문광네는 부딪힌다. 선임과 후임의 싸움이었다. 두 가족이 조화롭게 사는 법은 없었을까 싶지만, 생각하기도 전에 두 가족이 몸싸움은 극에 달하고, 와중에 문광이 뇌진탕으로 부상을 입고 남편과 함께 지하실에 갇힌다. 하루 밤, 이틀 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하실에 갇힌 문광네 가족이 걱정된 기우는, 다송의 생일날 지하실에 내려간다. 마침 문광의 남편, 근세(박명훈이 연기한)는 지하실에 갇혀 어떤 조치도 할 도리 없이 뇌진탕으로 죽은 아내를 뒤로하고, 복수심에 찬 채로 칼을 쥐고 밖으로 나선다. 기우는 그런 근세에게 이미 가격 당해 기절한 후였고, 그 기세로 근세는 다송의 생일로 모인 많은 사람 중에 눈에 띄는 기정(박소담이 연기한)의 왼쪽 가슴에 칼을 꽂아 넣는다.
그 칼을, 기정의 아버지 기택은 주워 들고 박사장으로 향한다. 왜, 왜 하필 박사장이었을까. 나라면 언뜻 자신의 아내를 죽이려는 근세에게, 자신의 딸을 죽음까지 몰아간 근세에게 그 칼 끝을 향했을 것이라 이입해본다. 그리고 다시 기택의 마음을 헤아려보려 한다. 왜 하필 박사장이었을까.
먼저 떠오른 이유는 모멸감이었다.
자동차 키! 자동차 키!
기정의 왼쪽 상처에서 솟는 피를 막고 있던 기택에게, 박사장은 급하게 자동차 키를 요구한다. 박사장의 아들인 다송이가 기절한 탓이다. 15분 안에 다송이가 응급실에 가지 못하면 골든타임을 놓친다고 알고 있는 박사장은, 그래서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기택은 호통치는 박사장의 얼굴에서 뭔지 모를 위협 또는 모멸을 느꼈는지, 혹은 기정이 더 급한 상황이라 생각해 기정을 먼저 옮겨야 할지를 고민했는지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자동차 키를 박사장에게 던진다. 던져진 차 키는 몸싸움 중인 근세와 충숙 사이로 들어가 근세의 등에 깔렸으나, 기어코 박사장은 재빨리 키를 깔린 자리에서 건져낸다. 그런데 그때, 박사장은 온갖 인상을 찌푸리며 코를 막는다. 차 키에서 유독 가스라도 나오는 것처럼. 물론 차 키를 갖고 있었던 기택 혹은 깔고 있었던 근세의 체취가 벤 것이겠지만.
지난날 밤 박사장은 연교와 운전기사인 기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기사님은 다 좋은데 냄새가 너무 나. 차 타고 있으면 뒷좌석으로 자꾸 냄새가, 어후.” 기택과 그의 자녀인 기우와 기정은 거실 테이블 밑에 숨어 박사장 부부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기우와 기정은 그 대화를 듣는 둥 마는 둥 하였지만 기택은 그러지 못했다. 테이블 밑에 숨어서, 굳은 얼굴을 펼 수 없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모멸감?
부유층으로 대변되는 박사장네와 서민으로 대변되는 기택과 근세네 가족, 이 두 부류 사이에는 하나의 큰 차이가 있다. 그건 말그대로 ‘벌이’이다. 돈 없는 세상을 생각해본 적 없고, 생각하더라도 지금보다 나은 세상이 변변히 떠오르지 않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전히 돈은 정말이지 중요하다. 이 사회는 이름에 걸린 간판대로 ‘자본’이 주(主)인 사회인 것이다.
"낸들 마누라를 고생시키고 싶어 시켰겠소! 비단옷도 해주고 싶고 좋은 양산도 사주고 싶어요! 그러길래 왼종일 쉬지 않고 공부를 아니 하우. 남 보기에는 편편히 노는 것 같아도 실상은 그렇지 안해! 본들 모른단 말이요."
나는 점점 강한 가면(假面)을 벗고 약한 진상(眞相)을 드러내며 이와 같은 가소로운 변명까지 하였다.
"왼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비소(誹笑)하고 모욕하여도 상관이 없지만 마누라까지 나를 아니 믿어 주면 어찌한단 말이요."
- 현진건, <빈처>
그런 곳에서 벌이가 없다는 것은 그 뻔질난 간판 아래로, 사회라는 곳에 어엿하게 입장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벌이 있는 사람들 모여 호의호식하는 자본주의에서, 기생충인 기택과 근세는 그 문앞을 맴도는 사람이다.
이른바 주류인 박사장의 시선에 이들, 맴도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비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박사장의 부(富)가 본인의 훌륭한 능력으로 일궈낸 결과라면, 기택 류의 사람들은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로 비쳤을 테고 그것이 아니라면 태생적으로 천한 사람들로 느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고 있는 ‘냄새’는 극 중 적절한 장치이자 증거다.
“냄새가 선을 넘어, 냄새가.”
자기 위치에서 선을 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박사장은 늘 말한다. 그리고 운전기사인 기택의 ‘냄새’가 빈번히 그 선을 넘는다고 경계하고 또 경멸한다. 지난밤 나누는 대화를 본의 아니게 엿들은 기택은 그 경멸을 온몸으로 느꼈다. 비단 냄새 자체가 그 이유는 아니다.
그건 바로 넘을 수 없는 선에서 오는 모멸감 그 자체 였을 것이다. 기택 역시 박사장처럼 벌이가 그럴듯하고, 자녀에게 고액 과외를 시켜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을 거다.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라도. 그러나 삶이 마음처럼 되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을 뿐더러, 어느새 자녀의 사기행각을 혼내기는커녕 사기행각에 동조하고 있는 꼴이 되었다. 박사장이 혐오하는 냄새는 밑바닥에 있던 모멸감을 상기시킬 뿐이다. 모멸감을 내뿜는 근원에는 '냄새'가 될 수 없다. 박사장처럼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지 못한, 박사장과 기택 사이의 넘을 수 없는 선은 냄새가 아니라 “계급”이다. 냄새는 단지 그 선을 강조하는 스포트라이트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이제 기택은 칼자루를 손에 쥐었다. 어디로 향해야 좋을까. 경멸의 주체인, 모멸감의 근원인 박사장이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가 없듯이, 기택은 선을 없애려 칼을 든다.
그래도 그렇지, 딸은 죽인 건 근세가 아닌가? 기택이 느낀 모멸감이야 이해할 만 하지만, 근세의 잘못을 아무리 적게 쳐줘도 '딸을 살해한 것'인데. 그건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이었다. 근세는 딸의 부모인 기택에게 심판받아 마땅했다.
문득 생각해보면 기택과 근세는 많이 닮아있다. 두 사람은 1)부계 가정의 가장으로 시작해 2)비슷한 실패로 인해 몰락하여 3) 모계사회의 일원으로 살고 있다. 기택과 근세, 모두 좋은 남편 가장이 되고 싶어 사업을 벌였었다.('대만 카스테라' ; 두 사람이 벌렸던 사업은 심지어 업종, 사업명까지 같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 사업에 실패하였고, 결국 전의(戰意)마저 상실한 채 각자의 아내에게 기생하는 꼴로 생계를 이어나간다.
근세는 기택의 처지를 몰랐어도, 기택은 근세의 이러한 비슷한 처지를 알고 있었다. 기택이 근세를 찌르지 못한 이유는 바로 '비슷한 처지', 동질감이지 않았을까.
그러면 반대로, 애초에 근세는 무슨 이유로 기택네 딸을 찔러야만 했을까. 우리끼리 꼭 칼부림을 부려야 했을까. 힘든 사람들끼리 말이다. 충숙의 말처럼 ‘우리끼리 좋게 좋게’ 끝낼 수는 없었을까.
그 이유로 근세가 기택의 사정을 몰랐으므로, 기택네가 근세의 아내를 상해 치사했으므로 등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주목하고 싶은 점은 근세네와 기택네는 가난을 겪어내는 방식이 달랐다는 것이다. 그 두 가족은 빈(貧)층이라는 것만 같았지, 가난을 겪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근세네는 가난 자체가 자신들의 원죄라고 여겼고, 그런 자신들을 빌어먹게 하는 박사장네를 고마움과 존경으로 숭배하였다.
리스빽드, 리스빽드.
라고 외치며, 스위치에 머리를 박는 근세의 모습은 가난을 숭배와 자학으로 겪어내는 모습의 단편이다. 비단, 이는 근세네뿐 아니라 쉽게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빈곤할수록(마음이든, 지갑이든) 믿어야 할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이는 금욕주의적 윤리관과,즉 기독교적 윤리관과도 맞닿아있다. 여기서 인간은 자신의 행위와는 무관하게 죄를 짓고 태어난다. 이 원죄는 인간의 탄생과는 무관하게 평생 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된다. 출생과 동시에 죄인이 되다니! 비록 약 2000년 전에 누군가가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고는 하지만 그 일이 인간 모두의 탓이 되다니!
한편, 기택네는 달랐다. 가난은 그들의 원죄가 아니라 그저 '재수 없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을 속이는 일에 아무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가짜 과외선생님이 된 기우, 이어서 온 가족이 가짜 "무엇'이 된다니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기행각에 가족 전체가 즐거워한다. 오히려 속는 사람이 '재수 없'었던 거라고 생각하면서.
이러한 이질감에서부터 이미 두 가족의 결말은 정해졌을지도 모른다. 기생에서 공멸로 이르는 결말 말이다. 그렇다면, 공생의 조건은 과연 동질감과 이질감을 넘어선 연대감이 아닐까! 기택네, 근세네 그리고 박사장네까지 공생할 조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