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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Mar 12. 2020

외로움

 문득 무척이나 나는 외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가끔 혼자라고 느껴질 때면 소주나 맥주 한 잔 해줄 친구는 있다. 그리고 그들은 내게 대단히 소중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과연 나는 외롭다 외로운 사람이다 이런 감각이 스멀스멀 몸 전체를 감는다. 무엇을 어찌해야 하나 하는 막연한 기분이다. 그럴 때마다 친구를 불러내어 의미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일도 이제는 그다지 즐겁지 않다. 열정을 뽐내는 친구의 자랑을 들어도 별 흥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서로 침묵하고 있자니 내 앞의 이 사람은 왜 여기 있나 싶기도 하다. 


 어찌할 바를 찾을 수 없는 외로움, 고독함 앞에 이제는 무기력하다. 비참하거나 무능력하거나 절망스럽거나 등등의 부정적인 수식어를 늘어놓을 수 있지만 무기력이라는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 무능력했을 때도 있었다. 친구를 불러 술을 마시거나, 연인을 만나 언제나처럼 비어있던 시간을 채우면서. 그렇게 하면 덜 외롭고 덜 고독하고 더 살만하다고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속였던 것 같다. 이런 일은 마치 아침을 먹고 속이 비어 다시 점심을 먹고, 또다시 속이 비어 저녁을 먹는 행위를 반복하는 일처럼 '원래' 반복되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생존이 걸린 문제니까.


Jean Michel Basquiat, <Obnoxious Liberals>, 1982


 그러나 이 허기가 다 가짜라면, 가짜여서 끊어내도 생존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생존과 무관한, 이 먹고 싸는, 그러니까 외로움을 달래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은 무능력하기 그지없는 일일 것이다. 원래 그렇게 사는 거라는 말은 또 아무런 위로도 증거도 되지 않는다. 과연 다르게 살아본 적 없는 사람들의 말인데. 무엇을 알랴. 외로움이란, 고독이란 바로 그럴 테다. 


 결국은 이렇게 되었다. 조금씩 무아지경의 발버둥을 끊고 살려다 보니 무기력한 경지가 된 듯하다. 덜 만나고 덜 마음 쓰며 사는 일이 익숙하고 그러다가 이내 고독을 마주한다. 안녕? 고독이니. 종종 외로움, 고독과 함께 있으면 가끔은 후회와 비슷한 감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후회의 종류는 대충 이렇다. 그때에, 친구나 연인을 만날 때에 좀 더 용기 낼 걸. 나는 고독하다 나는 외롭다. 이렇게 고백하고 나를 나누어주고 너를 나누어 받을 걸. 그러나 나누는 일도 나누어 받는 일도 그럴만한 상대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소리를 알아주는 이가 없으면 가야금이든 거문고든 반으로 잘라내고 말듯이. 나눌 그리고 나누어 받을 이가 없으면 무엇이든 잘라내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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