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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Jun 23. 2020

안부


저는 먼저, 그동안 되게 정신없게 보냈었던 것 같아요. 가게를 운영하는 친구가 4년이 넘도록 운영한 가게를 그만둔다 하여 가서 함께 가게를 추억하고 또 2010년대를 마무리하는 자리를 가졌었어요. 같은 이유로 모인 친구들이 중학교 때부터 친구인데, 이렇게 저렇게 다들 열심히 살기도 하고 저 역시 그 안에서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문득 귀엽고 앙증맞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그 며칠 남지 않은 가게의 간판에 새벽에 불을 켜고 사진도 여러 번 찍었어요. 별 약속 없이 동네를 배회할 때에 고향처럼 절 반겨주던 그곳 그 가게에서, 이제 친구와 정겹던 메뉴를 볼 수 없다고 하니 저까지 서운하더군요. 친구도 많이 씁쓸해하던데, 그러나 저는 알아요. 모든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정들었던 가게를 보내고, 또 앞으로 다가올 많은 시련과 기쁨을 이겨내고 만끽하면서 또 서운할 시간들을 삶의 순간순간에 새기어내는 게 삶이라는 것을요. 친구도 이를 자연스레 아는지 눈물 따위는 보이지 않고 다가올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고민하고 또 기대하더군요. 그 모습이 고맙고 또 저에게 힘을 주었어요.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아득한 미래를 생각하면 머리가 어지러웠고 또 지나간 추억들을 떠올려보면 가슴이 미어졌어요. 이루지 못한 것들과 내가 하고 싶은 것들 사이의 간극이 원망스러웠고 이제는 볼 수 없는 사랑했던 사람들과 그리운 사람들이 눈 앞에 아른거렸거든요. 그런데 연륜 탓일까요. 무뎌진 탓일까요. 어느덧 모든 게 자연스러운 일이고, 혹여 지금은 부자연스럽다고 느낄지라도 나중의 언젠가에 자연스럽게 될 것이라 느꼈어요. 아니면 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 이유에 제 얘기를 덧붙이면 편하겠지만, 저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온 니체의 "영원회귀"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아주 첫 페이지부터 그렇게 어려운 말이 나오는데요. 어설프게 요약해보자면, 니체는 지금과 같은 삶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말했어요. 그런 이유로 인간은 현재에 놓인 선택의 기로에서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라고 니체는 말했어요. 이번 생이 앞으로도 무한히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여기에 밀란 쿤데라는 같은 인생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것은 한 사람에게 굉장히 무거운 일일 텐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어차피 무한히 반복되는 인생은 결국엔 하나인 것 아니냐고 되물어요. 아무리 많이 반복되더라도 그게 단 하나의 인생의 과정이라면, 결국 인생은 한 가지로만 살아지는 것 아니냐고 했어요. 즉, 무거운 것만 같았던 인생이 아주 가벼워지는 장면이지요. 단 한 번뿐인 것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니까, 밀란 쿤데라 말로는요. 


Andre Derain, < Two Barges>, 1906


 그렇게 생각하면 또 모든 게 자연스럽게 느껴져요. 선택과 이에 따르는 책임의 무게야 항상 삶을 짓누르지만, 나는 나대로 살뿐이고 또 그 대가를 받는 거라고 이렇게요. 쿤데라 말대로 삶도 가벼우니. 그래서인지 남들에게 제 이야기를 하는 일도 그다지 어렵지 않아요. 다른 사람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제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거든요. 자연스럽게! 말하고 싶으면 말하고 안 내키면 안 하고! 물론, 회사여서 인사고과가 걸리면 피곤하고 학교여서 뒤에서 말이 돌면 골치야 아프겠지만요. 그건 실생활의 문제지(먹고살려고 조금 걱정은 하지만) 실제로 제 마음의 어떠한 불안도 일으키질 못해요. 다만, 제 이야기를 상대방이 들을 수 있느냐 없느냐만 저는 걱정해요. 단순히 '듣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겠지만, 정말 가슴으로 듣고 있는지가 항상 궁금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저는 친구들 사이에서 두 가지 종류로 불리게 되었던 것도 같아요. "진지한 얘기 하는 사람", "웃긴 얘기하는 사람". 제가 나가는 모임에 따라 다른데, 이렇게 상반된 사람으로 불리는 이유는 제가 사람들을 가리기 때문이에요. 가슴으로 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저 자리에 필요한 우스운 얘기만 할 뿐이거든요. 하지만, 진심인 이에게는 항상 진심이죠. 


 연애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요. 긴 연애를 했었는데요. 모든 연애가 그렇듯이 끝이 났어요. 결혼이든, 이별이든 연애는 끝이 있으니까요. 결혼은 당연히 아니고 이별이었는데, 그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일상이 되었던 탓인 것 같아요. 물론 이별의 이유를 떠올리는 시기에 따라 이유를 다르게 말하고 있는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요. 프로필의 말들처럼 식사 메뉴나 읊는 사이가 되고 귀가시간이나 체크하는 관계가 되었죠. 지루했고, 사랑보다는 일상만 남은 사이 같았어요. 그렇게 연애를 지속하다 다가오는 이별에 서로 부정하고 발버둥 치며 많이 싸웠었어요. 그러나 피할 수는 없었죠. 그 후에 연애라고 일컫는 관계를 몇 번 맺었었지만 영원처럼 반복되는 일상 같은 사랑에 지루했어요.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어요. 왜 사랑을 해야만 하는가.


 세상에 이타적인 사람은 없어요. 어떤 식으로 행동하든 그것이 자신에게 이롭기 때문인 거죠. 기부나 봉사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폄하하진 않고 오히려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내어주면서도 자신이 이로움을 느낄 수 있다니! 자신의 이기(利己)를 나를 넘어서 가족, 동네 사람들, 국가, 세계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넓힐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에요. 사랑도 마찬가지예요. 다 자기 좋으려고 하는 거예요. 오래 사귄 연인에게 왜 나를 떠나갔냐고, 배신이라고 울고 불며 난리 칠 필요도 없는 거예요. 나는 그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더 이상 이롭지 못한 사람이었던 거죠. 인정하면서도 이별은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그 탓인지 연애로 일컫는 만남은 아직도 불편하기만 할 뿐이에요. 만남과 이별의 사이에 그, 게장 속 속살 같은 그것 때문에 벌리는 일들이란 골치만 아픈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우스운 건, 사랑할 사람을 찾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야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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