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올 Dec 27. 2016

착한 사람 증후군

나는 원래 나쁜 사람이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타인으로부터 착한 아이라는 반응을 듣기 위해 내면의 욕구나 소망을 억압하는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심리적 콤플렉스를 뜻한다. 이러한 형태는 유기 공포를 자극하는 환경에서 적응하기 위해 어린이의 기본적 욕구인 유아적 의존 욕구를 거부하고 억압하는 방어기제로 탄생한다.  이는 바르게 해결되지 않아 그대로 성장하게 된 어른에게는 '착한 아이' 대신 '착한 여자, 착한 남자, 좋은 사람' 등으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돼. 벌써 안돼라고만 세 번을 말했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다. 나는 정말 거절을 잘하는 성격이다. 중학생 시절 컵볶이 좀 사달라는 친한 친구의 부탁 따위, 나는 단칼에 거절할 수 있다는 말이다. 체육복을 빌려달라는 옆반 친구의 부탁 역시 어림없다. 대학교까지 졸업하고 이제 어느덧 일명 '거절하는 기계'가 되었다. 딱히 정해놓은 건 아니었지만, 자연스레 좌우명 같은 것도 '나쁜 사람이 되기'가 된 듯 느껴졌다. 남에게 나쁜 사람이 곧 나 스스로에겐 좋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근거 없는 결론 또는 착한 사람 증후군에 대한 반발. 아주 적어도 이 둘 중에 하나는 '나쁜' 내가 되는 것에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처음부터 내가 착한 사람 증후군을 알고 이에 대한 반발로 나쁜 사람이 되기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원래부터 나쁜 사람이었다. 원래부터. 착한 사람 증후군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대 초반,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익숙해질 쯤이었다.


 넌 아무래도 착한 사람 증후군인 것 같아.

 물론 나쁜 내가 들을 리는 없는 이 말은, 나를 지나 내 옆의 다른 누군가에게 향하고 있었다. 나를 살짝 스치고 간 그 말이, 나는 처음 듣는 그 말이 어떠한 설명 없이도 이름 하나만으로도 이해되었다. 착한 사람 증후군. 대부분의 사람은 어릴 때부터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교육받아왔을 것이다. 받아왔음이 분명하다. '우리 아이 착하지'라는 엄마의 말은, 엄마들이 엄마라는 단어를 처음 자녀에게 가르치고 바로 다음 가르칠 말일 정도로. 아니면 그것이 엄마들의 유행어였을까.

 걷게 되고 뛰게 되고 알 걸 알게 된 청소년 또는 청년에게 사회는 다음의 '말', '유행'을 가르친다. 대부분의 그런 말이나 유행은 '착한 사람 되기 운동'에 동참케 하는 것이었고, 반운동권은 나쁜 새끼로 몰리기 쉬웠다. 이른바 반동. 대학교 1학년, 새내기 오리엔테이션의 서먹한 펜션에서 그녀의 소주를 대신 마셔주지 않는 너는 개새끼라는 타이틀을 얻을 텐가. 일종의 세뇌가 만연한 분위기에서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착한 사람으로 거듭나길, 주변의 기대를 받고 자라왔다. 착하다, 나쁘다. 선과 악의 철학적 의미는 논외로 하고 우리는 남들이 흔히 말하는 '착하다'라는 수식어를 받기 위한 삶을 살도록 강요받았다.


 그러나, 나는 나쁜 사람이 되었다. 남들의 시선보다 내 안위가 중요한.


 넌 아무래도 나쁜 사람 증후군인 것 같아.

 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그런 나쁜 사람. 까칠하다, 비판적이다, 부정적이다, 비도덕적이다 등등 내포한 의미야 어떠하든 나쁘다는 말 혹은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이 내 마음을 한결 가볍게 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나를 나쁘게 만드는 '안돼'에는 항상 이유가 있다. 돈이 없다고 컵볶이를 사달라는 녀석의 주머니엔 돈이 가득한 걸 이미 알고 있다. 체육복을 빌려달라는 녀석은 저번에 내 체육복을 돌려주지 않았다. 소주를 마셔달라는 그녀는 마셔달랄 정신이라도 있지만, 난 그녀가 그놈인지 그녀인지 아저씬지 할머닌지 구분조차 안 되는 꽐라가 되었다. 등등의 안돼의 이유들.

 이 쯤되면 나쁘다는 말이 좋게 들릴 수도 있겠다. 이유는 뻔하다. 착한 증후군에 대한 반발을 제쳐두더라도, 나쁘다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달리 들리기 때문이다. 나쁘다를 듣기 위해 정말 나쁜 짓, 예를 들면 지나가는 행인을 무심코 칼로 쑤신다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래 다르게 말하면 나는 합리적인 사람으로 살고 싶었던 모양이다.


 안돼. 역시 나쁘게 보이더라도 나 스스로에겐 비합리적이라는 멍에를 남기지 않기 위해, 오늘 마지막 안돼를 뱉었다. 피(被)안돼가 나를 째려보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에겐 피안돼의 부탁을 들어줄 이유가 눈곱만큼도 없다. 피안돼의 부탁이 어떤 인류의 상황을 개선시키는 데에 기여하거나, 최소한 누군가의 기분을 좋게 할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있다면 단지 본인의 만족뿐. 본인의 만족을 위해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수고스럽다면 거절해야 한다. 안돼. 이윽고 피안돼를 화를 냈고 분개했으며 강요했다. 어림없다. 안돼.

 피안돼는 끝내 거친 몸부림을 포기하고 피투성이의 몰골로 최후의 저항을 포기하였다. 나는 피안돼의 어림도 없는 몸부림에 치를 떨었다. 처음부터 의미 없는 몸부림이었다. 추잡한 새끼. 다음날, 피안돼는 다소 기운이 없었다. 피안돼는 나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다. 어찌 되든 간에 나는 피안돼를 돌볼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어디서 불쾌한 것이 속에서 메슥거렸다. 윗 배의 부근이었다. 그것이 거기서 스멀스멀 거리더니 머리에까지 기어올라가서는 '된다고 할 걸 그랬나'라고 떠올리게 했다. 아이쿠. 머리가 지끈했다.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무슨 정신으로 내가 들어줘. 난 나, 쁜, 사, 람, 이면서. 그렇게 메스꺼운 녀석을 눌러 넣고는 아무렇지 않게 피안돼를 대했다.

 피안돼는 떠났다. 나는 아직도 여전히 나쁘다. 나는 나를 지켰다. 뿌듯했다.

 피안돼가 떠난 자리 곳곳엔 몸부림의 흔적들이 있었다. 책상 서랍엔 피안돼와 찍은 사진이 있었다. 나는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 기분에 깔려 죽을 수 있다는 듯이, 몸들 바를 찾지 못하고 수그리고만 있었다. 이상한 기분을 잊으려 피안돼를 욕했다. 뭣도 모르는 게 말도 안 되는 부탁이나 한다고. 지껄여봐도 수그려 구겨진 몸은 펴질 줄 몰랐다. 피안돼와의 사진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피안돼와 나는 웃고 있었다. 몰려오던 이상한 기분이 이젠 수면 위로 떠올랐다. 뻐끔. 그건 미안함이었다. 미안함이라고.

 나는 착한 사람 증후군을 앓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하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