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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Jul 11. 2016

낭만적 사랑은 홈드라마일뿐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 '홈드라마'

 낭만적 사랑은 홈드라마일뿐.  


 사랑의 반대말은 결혼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왜 모든 사랑은 결혼으로 끝날까. 지구가 멸망해도 내 연인만 살아있으면 된다는 마음가짐도 결혼하면 모두 없던 일이 되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내 남편, 아내만 없다면 지구가 멸망해도 좋다는 말도 우스갯소리로 들어본 것도 같다. 어쩌다 사랑해서 한 결혼이 반대말처럼 느껴질까.

 우리는 누군가와 사랑할 때 아무렇지 않게 상대방과 결혼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이내 얘는 좀 별로야, 나쁘지 않겠네 등 결론을 내리고 상상을 그만두긴 해도.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사랑의 환승역은 결혼이라고 생각하고 환승역에서 원활한 갈아타기가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금은 얕은 생각일 수도 있겠다. 길고 긴 마라톤의 급수대에서의 반가운 휴식은 남은 끝이 보이지 않는 남은 트랙에 압도된 우리의 다리를 다시는 못 떼게 할 수도 있다. 우여곡절의 사랑은 꽃피우지 못하고 결혼이라는 환승역에서 쉬다가 되돌아간다. 너무 환승역만 보고 달려온 탓이다. 환승역이 아닌 저기 저 종착역을 보고 좀 더 긴 호흡으로 달리기엔 서로는 너무 지쳐있다.

 그런데도 사랑은 낭만적이다. 수많은 영화들, 노래를 들어도 사랑보다 낭만적인 것은 없다. 낭만이라는 말은 사랑에만 어울릴 것 같다. 반면, 결혼은 현실적이다. 어떠한 연결고리 없이 만나서 한 지붕 밑에서 산다는 것은 낭만을 찾기에는 꽤나 자질구레하다. 설거지 문제는 항상 모든 집의 골칫거리이듯이.

 수진과 재호 그리고 유리 각 주인공들 역시 이미 결혼은 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너무 많이 알고 있었던 탓일까. 사랑은 결혼의 부속품 정도로만 생각했다. 사랑을 위해 결혼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결혼하기 위해 사랑이 있는 것처럼. 낭만은 결혼 전까지의 준비물인 것처럼. 그들이 생각하는 결혼의 예물에는 많은 것들이 있었지만 사랑은 없었다. 사랑은 결혼 전까지 만으로 충분했다. 다소 충격적인 내용 같이 느껴지는 설명이지만 설명의 대상인 소설은 기대와 달리 충격적이지 않다. 심지어 너무 뻔해서 아무것도 읽지 않은 기분마저 들게 한다. 왤까. 사랑 없는 결혼이 이제는 너무 뻔해진 것이다. 누군가 결혼을 한다며 서로의 사랑을 자랑하기보다 그 사람의 직업과 집안을 자랑해도 어색하지 않다. 누가 내 결혼에 사랑을 뺐을까.

 사실 범인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결혼 자체는 사랑의 반대말이기 때문이다. 반의어에 다른 반대가 포함되어 있다면 처음부터 반의어가 아니었겠지. 결혼이 사랑의 반대말이 된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사랑의 종착점이 된 것도 있지만 나아가서는 사회에 책임이 있다. 사회는 우리에게 결혼을 강요한다. 명절마다 들리는 결혼 얘기는 당연하게 가장 듣기 싫은 잔소리 1위를 기록한다. 왜 우리는 결혼을 해야만 하는가. 사회가 결혼을 강요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도 소설이 강조하는 것은 자본의 축적과 대물림이다. 각 소설의 주인공들은 결혼을 사랑의 윤활유보다는 경제적 합일 정도로 생각한다. 경제적인 융합에 있어서 어느 쪽이 이득을 보는지는 당사자들에게 주요한 관심사다. 상대방의 직업이 뭔지 집안이 뭔지 예물이 뭔지하는 사실은 상대방의 됨됨이보다는 결혼에서 훨씬 중요한 문제이다. 흔히 결혼 준비하다가 헤어진다는 말도 괜히 나온 말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돈으로 치환하는 사회. 돈이 지배하는 사회가 바로 그곳이다. 이제는 어떤 사람이 이성적으로 ‘얼마’ 짜리 사람인지 판단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결혼 중매 회사에서 상대방의 재력이나 직장을 보고 등급을 매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회이다. 이 곳에서 우리는 결혼이라는 그릇에 어떤 음식을 담을 수 있을까. 사랑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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