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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Jul 11. 2016

흐트러진 추억을 주워담아 버릴 수만 있다면,

기형도, '추억에 대한 경멸'

추억에 대한 경멸

                                                                                    기형도


손님이 돌아가자 그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어슴푸레한 겨울 저녁, 집 밖을 찬바람이 떠다닌다

유리창의 얼음을 뜯어내다 말고, 사내는 주저앉는다

아아, 오늘은 유쾌한 하루였다, 자신의 나지막한 탄식에

사내는 걷잡을 수 없이 불쾌해진다, 저 성가신 고양이

그는 불을 켜기 위해 방안을 가로질러야 한다

나무토막 같은 팔을 쳐들면서 사내는, 방이 너무 크다

왜냐하면, 하고 중얼거린다, 나에게도 추억거리는 많다

아무도 내가 살아온 내용에 간섭하면 안 된다

몇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사내가 한숨을 쉰다

이건 여인숙과 다를 바 없구나, 모자라도 뒤집어쓸까

어쩌다가 이봐, 책임질 밤과 대낮들이 아직 얼마인가

사내는 머리를 끄덕인다, 가스 레인지는 차갑게 식어있다

그렇다, 이런 밤은 저 게으른 사내에게 너무 가혹하다

내가 차라리 늙은이였다면! 그는 사진첩을 내동댕이친다

추억은 이상하게 중단된다, 그의 커다란 슬리퍼가 벗겨진다

손아귀에서 몸부림치는 작은 고양이, 날카로운 이빨사이로 독한 술을 쏟아붓는, 저 헐떡이는, 사내


 추억은 누구나 가지고 있겠지. 지나간 시간은 대부분 추억이 되니까. 다신 그때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인지 추억은 그저 아름다운 것만 같다. 시간을 내서 추억의 얼굴들을 만나면, 나는 잠시라도 그 아름다움에 한 가닥이라도 될 수 있을까. 추억을 잠깐이라도 만나고 돌아오는 날은 생각보다 발걸음이 무겁다. 그리웠던 얼굴들을 봐서 마냥 재미있었다라고 끝내고 싶은 마음은 헛된 바람 뿐일까. 집에 돌아와 몸에서 한꺼풀씩 벗겨내 옷걸이에 거는 천조각이 더이상 무거울 수 없다. 추억에 한바탕 빠져있다 온 나는 무엇이 아쉬워 이렇게 무거워하는지.

 생각해보면 추억의 무게는 이제껏 한번도 가벼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학창시절 동안 친구들과 나눠온 편지들을 책상 서랍 깊은 곳에서 꺼내보면. 왜 나는 지금 그들과같이 있을 수 없는지, 마음 한구석에 찬바람이 분다. 그들과의 기억으로 어떻게든 막아보려하지만 그들과의 아름다웠던 추억이 막는 것은 내 숨 뿐이다. 아, 그때 우리. 하며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코 끝까지 아쉬운 한숨만 지나간다. 살아있는 추억들과 술자리도 역시 다르지 않다. 저기 저 코가 삐뚤어진 사람들은 그래서 2차, 3차, 4차를 끝없이 달리나보다. 추억이 만든 상처를 잊기 위해서, 추억이 만들 길고 긴 밤을 보내기 위해서. 술자리는 추억으로부터의 도피처이다.

 이럴거면 어쩌면 추억 따윈 없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추억이란 허울 좋은 이름으로 잘 살고 있는 나를, 잘 살아갈 나를 옭아매다니. 그땐 좋았는데 그땐 좋았는데라며 부질 없는 말을 내뱉는것으로 시간 보낼 필요도 없을텐데.

 추억이 없다면, 추억이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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