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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Jul 11. 2016

나는 정말 '꽃'이 되고 싶다.

알랭드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

사랑. 사랑만큼 흔한 말도 없다. 길거리에선 사랑을 다루는 노래가 항상 흘러나오고 텔레비전에선 어김없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부둥켜안고 사랑을 말한다. 노래와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많은 매체에서 사랑을 마주할 수 있다. 사랑은 이만큼 우리한테 흔하고 친숙하다. 도처에 널린 사랑들 때문에 우리는 문득 세상 사람들 누구나 다른 누군가와 어렵지않게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느낀다. 알랭드보통의 소설 ‘우리는 사랑일까.’의 주인공 앨리스와 에릭 역시 우리에게 우리도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다. 평생 혼자일 것만 같았던 앨리스가 누군가와 눈이 맞아 불같은 사랑을 시작하는 것을 보면 우리도 지금 당장 시내 어딘가로 나가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그래서 종종 거울 앞에서 옷을 차려입고 시내로 발을 내딛곤 한다. 설렘과 함께. 하지만 항상 시작은 곧 끝과 맞닿아 있다 했던가. 사랑도 이별과 맞닿아있다. 이 세상에 너와 나 단 둘밖에 없는 듯 사랑을 나누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차갑게 뒤돌아서는 게 연인 사이다. 차갑게 돌아서기는 앨리스와 에릭의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기적처럼 만났다고 믿었던 그들도 어느새 뒤돌아 언제 우리가 사랑했었냐는 듯 다른 사람을 만난다. 비단 소설의 주인공들 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도 무수히 많은 사례를 볼 수 있다. 불꽃같이 타올랐지만 얼음보다 냉정하게 헤어지는 연인들. 그런 연인들을 떠올리면 사랑을 찾아 시내로 발을 떼던 걸음이 무거워진다. 어차피 차갑게 돌아서게 될 것을 왜 우리는 사랑을 찾아 떠나고 차갑게 돌아서고는 다시 사랑을 찾아 떠나는지. 허탈해져서는 그냥 저녁만 겨우 때우고 돌아와 씁쓸한 맘에 책상 앞에서 영화를 보면서 잠든다. 무슨 영화든 나에게 사랑을 권유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드라마, 가요 등의 많은 매체에서 쉽고 흔하게 사랑을 다루는 탓일까. 우리는 사랑을 너무도 쉽게 생각한다. 그리고 사랑을 의무로 생각하기까지 한다. 어쩌면 우리가 찾는 사랑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 그 자체만을 찾았을 뿐, 사랑하는 사람을 찾은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이 그저 사랑의 부속품인 것처럼. 앨리스는 에릭을 사랑하지 않았다. 에릭은 앨리스를 사랑하지 않았다. 앨리스와 에릭은 그저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사랑했던 것이다. 마치 내가 고등학교에서 책을 펴놓고 연애하고 싶다 연애하고 싶다 늘어놓던 푸념의 한 종류와 같이. 그때는 누군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보다 그냥 연애를, 사랑을 하고 받고 싶었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앨리스와 에릭의 이와 같은 사랑은 다소 충격적이기도 하다. 서로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연애라는 상황 자체를 사랑했다니. 그러면서도 주위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사랑이 그렇다. 불타는 금요일 밤에 만나서 뜨겁게 사랑하다 싸늘한 토요일 아침을 맞는 연인들. 다정한 연인의 사진으로 가득 찼던가 싶은데, 어느 날부터 다른 연인의 사진으로 메꿔지는 SNS의 타임라인. 보면서 종종 사진의 주인공이 또 바뀌었네 하고 그러려니 하지만 곱씹어보면 씁쓸하다. 나도 누군가의 타임라인에서 ‘그러려니’하고 지나갈 사람이 되겠지하고.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는다는 노래가 있었던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사랑하는 사람으로 잊는다는 말보다 사랑을 사랑으로 잊는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을 보면 사랑을, 연애라는 상황을 통째로 사랑하는 일이 아닌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나보다. 우리가 아니 내가 매번 실패할 도전임을 알고서도 사랑을 찾아 떠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쉬운 사랑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이 아닌,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 사랑할 수 있는 ‘너’를 찾기 위해.

 학창시절 배웠던 김춘수의 시처럼 나는 누군가에게 하나의 ‘몸짓’이 아닌 ‘꽃’이 되고 싶다.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줄 누군가 만나 그 누군가의 꽃이 되고 싶다. 그저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사람으로 몸짓에 지나고 싶진 않다. 비로소 나를 사랑해줄, 내 이름을 불러줄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분명히 쉽지 않을 것이다. 비로소 내가 사랑할, 그 이름을 불러줄 내가 되는 것 역시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쉽다면 앨리스와 에릭은 그저 그런 연인들처럼 그저 그런 이유로 한순간에 남남이 되었을까. 왜 주변의 연인들은 타임라인 사진 옆에 애인을 수시로 바꾸고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할까. 앨리스와 에릭 그리고 주변의 연인들 역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그들은 모두 꽃이 되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라 믿고 싶다. 비가 오고 땅이 굳으면 언젠가는 꽃이 피는 것처럼.

 비단 누군가의 ‘꽃’이 되고 싶은 마음은 사랑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 보통 의례적인 인사를 내뱉고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몇 개 늘어놓는다. 안녕하세요. 저는 어디 소속 무슨 담당 누구입니다. 그리고 반대쪽에서 들리는 비슷한 어구들 몇 개를 듣는다. 어디 뭐 담당 누구. 시간이 흘러 그 사람을 기억해야 될 일이 있으면 그가 늘어놓았던 단어 몇 개를 나열해본다. 어디 뭐 누구. 어디 뭐 누구.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은 이것뿐이지만 그 사람과 생활하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다. 심지어 어디 뭐 누구에 대한 정보가 가득 쌓여 그 혹은 그녀와 ‘친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느낀다. 그러다 문득 친하다는 사람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그들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을 나열해보면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정보들이다. ‘그들을’ 담고 있는 그릇들에 대한 정보가 전부이다. 어디 다니는지, 무엇 전공을 하는지, 무슨 담당인지, 어떤 이름인지. ‘그들이’ 담은 정보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부터 시작해서 고민은 무엇인지 힘든 점은 없는지. 이렇게 한번 떠올리고 나면 자책을 하고는 내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갖자고 다짐하지만 금세 다시 돌아와서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 예전엔 사람을 만날 때 이렇지 않았었는데……. 누구나 나이가 들면 들수록 만나는 사람이 점점 늘기 마련이다. 나 역시 나이가 들고 만나는 사람이 늘다보니 나를 스쳐간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내가 정말 관심을 쏟았던 사람들. 아니었던 사람들. 이제는 모두 지나간 사람들이고 지금은 나와는 멀어진, 연락하기에는 조금 어색한 사람들이 되었다. 친했지만 어색해진 사람들을 떠올린다. ‘사람들, 알아서 뭐해 어차피 다 멀어질 텐데.’

 내가 누군가의 ‘꽃’이 되고 싶다면 나 역시 누군가를 ‘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누군가를 ‘꽃’으로 만드는 방법이 단지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라면 너무 막연하다. 그 사람의 본연의 모습을 이해하는 내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 사람의 껍데기를 줄줄 외우는 내가 되어있진 않을까. 좀 더 꽃을 만드는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알랭드보통의 작품에서  앨리스와 에릭의 사이에서 고민해보았다. 상대방을 하나의 몸짓이 아닌 꽃으로 만드는 방법은 내 행동에 대해서 상대방의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앨리스는 항상 에릭을 챙겨주지만 에릭은 그렇지 않다. 어찌 보면 둘은 다른 사랑 방식을 가진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다. 앨리스는 이것이 에릭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앨리스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선의는 에릭으로부터 보상받아야 마땅하지만 에릭은 앨리스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보상을 기대한 앨리스는 에릭에게 실망을 느낀다. 실망은 쌓이고 쌓여 둘의 관계는 파국에 치닫는다. 이처럼 기대한다는 것은 상대의 적절한 보상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연인 사이에서 위험하다. 에릭이 앨리스가 보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자신 나름의 사랑을 베풀어 급한 불을 끌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랑은 거래가 아니다. 상대방에게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사랑한다면, 베푼다면 그것은 거래에 불과하다. 굳이 사랑이 아니더라도 사람 사이의 관계는 다 그렇다. 무언가를 바라고 부모님, 형제, 친구들에게 베푼다면 단순히 미래의 보상을 약속하고 거래한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내가 상대방에게 생일 선물을 주고 상대방이 내 생일을 챙겨주기를 기대한다면 내가 준 생일 선물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거래의 선금이나 계약의 조건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자연스럽게 기대가 될 수 있다. 내 생일이 되면 그가 줄 생일 선물을 앉아서 기다리고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의 생일을 축하해서 주었던 선물이라면 다시 돌아올 선물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역시 쉽지 않겠지만 앨리스와 에릭과 같이 시련이 주인공이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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