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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Jul 11. 2016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실존주의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실존주의보다 휴머니즘이 더 쉬운 말 같다. 그렇다고해서 금방 머릿속에 휴머니즘의 정의가 떠오르는 것은 또 아니다. 그렇다면 휴머니즘은 무엇인가. 휴머니즘은 르네상스 시대에 있었던 문화 운동 중 하나이다. 르네상스 이전의 중세 시대에 신을 기준으로 모든 사고와 행동을 했다면,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이제 인간을 기준으로 모든 사고와 행동을 하자는 것이다. 인간 문화의 부흥. 그것이 첫번째 의미의 휴머니즘이다. 하지만, 실존주의의 휴머니즘은 그것보다는 협의(狹意)이다.

  ‘인간은 부단히 자기 밖에 있는 것이며 자기 밖으로 스스로 투사하고 스스로를 잃어버림으로써 인간을 존재하게 한다. 한편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더 높은 목적을 추구함으로써다. 그처럼 사람은 자기 이상의 것을 행하는 것이며 그러한 초월에 비추어서만 인간은 사물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초월의 한복판, 즉 중심에 있다. 인간의 우주, 즉 인간의 주체성의 우주 이상의 다른 우주가 있을 수 없다.’

 대충 읽어보면 르네상스의 휴머니즘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인 것 같다. 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일까. 실존주의는 크게 두가지 갈래가 있다.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 사르트르가 나눈 구분에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 마르셀이라는 사람들이 유신론적 실존주의자이다.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본인이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이다. 실존주의라는 삶의 태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주장은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는 점에서 유신론적,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모두 실존주의의 울타리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같은 울타리에 있는 것이 상당히 맘에 들지 않는다.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는 울타리에 유신론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애플 맥북이 있다고 생각하자. 이것은 공장에서 찍어내기 전부터 일정한 설계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어떤 특수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제작되어진다. 애플 맥북이라는 개념에서 비롯하여 실제로 내가 두드리고 있는 애플 맥북이 제작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제작된 물건은, 물건의 본질이 존재에 앞서는 것이다. 내 맥북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전부터 애플 맥북이라는 개념, 곧 본질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인간이 있다고 생각하자. 신이 존재해서 한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서 인간이라는 설계도를 가지고 특수한 목적을 수행하라고, 혹은 어떠한 개념을 바탕으로 한 인간을 만들었다. 이제 창조된 인간은 생전(生前)의 본질이 존재보다 중요해졌다. 특수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인간의 존재보다는 인간의 탄생 이전의 목적이나 본질 그 자체가 중요해진 것이다. 존재가 본질을 앞선다는 실존주의 근본적 입장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실존주의에는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서 실존주의의 주장은 데카르트의 코기토와도 맞닿아있다. 코기토는 데카르트가 말한 것으로 알려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의 줄임말이다. 코기토는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과 확실하지 않은 것은 모두 부정하고 가장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것만을 이 세상에 남겨놨다. 그것은 바로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이다. 내가 듣고 있는 음악은 정말 음악 그대로일까. 팝송의 멜로디는 듣고 있지만 가사가 잘 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음악 그대로인 것인가. 흐릿한 저 작은 글씨는 과연 내가 보는 그 글씨일까. 숫자 2인지 영어 S인지. 조금이라도 확실하지 않은 것을 하나씩 지워가다보면 남는 것은 결국 의심하고 있는 자신 뿐이다. 결국 나 자신은 의심할 수 없는 최후의 존재인 것이다. 무언가를 의심을 하든 믿든 간에, 나는 그 자리에 존재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일까, 무엇일까라고 나의 본질을 고려하기에 앞서 '생각하는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어쩔 수없이 믿을 수 밖에 없는 진리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의 본질을 논한다는 것은 당연히 불필요하다. 나의 존재없이 무엇을 더 논하랴. 이런 관점에서 종교가 강조하는 선험적 가치는 역시 모래에 지은 성에 불과하다. 인간이라는 개념 이전에, 이미 탄생한 인간에게 ‘선험적’이라는 것은 무슨 소용인가. ‘인간은 본디~’ 로 시작해서 인간이 어떠한 가치를 가졌다던가, 무엇인가를 하기로 되어있다는 말은 실존주의에서는 전혀 어울지 않는 말이다.


 와중에 실존주의는 몇몇 비판들에 휩쌓여있었다. 일부를 소개하자면, 실존주의가 정적주의를 부추긴다는 것이다. 정적주의는 인간의 의지를 최대한 부정하고, 인간이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더하여 실존주의가 인간을 업신여긴다는 비판이 있다. 제시된 비판들은 실존주의의 기본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한 탓에 비롯된 것이다. 앞서 논한대로 실존주의는 인간의 본질보다는 인간의 존재에 사상의 중점을 두고있다. 인간은 인간의 본질을 논할 필요없이  인간 존재 자체로써 정의되고, 존재는 존재하는 인간의 행동들의 총합으로 결정된다. 내가 만약 한량이라면, 사람들을 괴롭히고 나쁜짓을 일삼는다면 나는 그런 존재로 귀결되는 것이다. 내 존재를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서, 팔짱끼고 상황만 보거나 살아지는대로 산다고 해서는 이룰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정적주의에 빠진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리고 인간의 가치 역시 인간의 개개인의 행동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므로, 인간 자체를 업신여긴다는 말은 옳지 못하다. 물론 한량을 업신여길 순 있겠지만.

 한편, 코기토는 우리에게 이기적인 개인으로 존재할 가능성을 남긴다. 내가 ‘태어나서’ 생각함으로써 존재해서 세상을 인지한다면 ‘나’보다 중요한 가치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아닐까. 내가 없다면 세상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잊지말아야할 것은 코기토는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코기토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순간! 동시에 생각하고 있는 다른 ‘나’에게도 적용된다. 타인. 타인의 존재는 그야말로 위압적이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존재하고 생각한다니. 나라는 존재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 생각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니. ‘나’의 코기토에서 생각할 수 있는 존재는 유일하게 나 하나였다. 내 존재가 세상의 근거였다. 타인의 코기토에서 ‘나’는 생각의 재료로 추락하고 만다. 얼마나 처참한가. 산 정상에서 털레털레 내려오고 있다. 동네산인 탓인지 사람은 없고, 경치는 이상하게 아름답다. 콧노래가 절로 나와 노래를 부르면서 내려온다. 벚꽃잎 휘날리며. 순간, 건너편 산길에서 누군가 올라오고 있다. 이내 콧노래는 멈추고 아무일 없었다는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방을 지나쳐 내려간다. 단지 상대방을 마주한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코기토는 불편함을 호소한다. 하던 것처럼 콧노래를 부르면서 지나가기엔, 타인의 머릿속에 그려질 나의 모습이 유쾌하진 않기 때문이다. 타인 생각의 재료가 된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저자인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그렇다고해서 타인의 코기토가 ‘나’를 온전히 지옥 구덩이로 밀치는 것만은 아니다. 구원을 줄 수도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옥 구덩이에서 악마로 변하는 것을 막는 정도랄까. 타인이 존재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존재에서 타인을 완전히 지울 수 없다. 우리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타인의 생각과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만으로 맘대로 행동할 수는 없다. 결국 한없이 이기적일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그럴 수가 없어진 것이다. 이것이 아이러나하게도 불편한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는 실마리인 것이다. 나의 행동이 나 자신의 존재만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 역시 구성할 수 있기 때문에. 반대로 우리는 우리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행동으로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이 네 존재에, 네 행동이 우리의 존재를 결정한다는 것. 이기적인 나에서 이타적인 우리로 탈바꿈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등잔 밑에 있었다. 타인은 지옥이라지만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 역시 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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