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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Jul 11. 2016

너에게서 두려움으로. 사람실격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타인의 심연으로 추락


 농담을 하고 있었다. 내 농담이 나와 저 사람의 대화를 서먹한 인사말에서 친근한 미소로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기를 바라면서. 아주 절친한 사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 불편한 사이는 되지 않도록 다른 사람에게 농담을  꺼내는 게 이제는 자연스러워졌다. 이제는 거짓 미소가 얼굴에 남겨놓은 주름도 자연스럽게 접혀 농담이 그럴듯하다. 여느 날처럼 다른 누군가와 의무적인 농담을 나눌 때 문득 요조가 떠올랐다. 다자이 오사무가 <인간실격>에서 그린 주인공 요조 역시 농담을 즐기곤 했었다. 나처럼 그 농담이 그에게도 진짜 농담 그 자체를 의미하지 않았다. 요조의 농담은 나의 농담과 닮아있었다. 농담은 일종의 인간에 대한 마지막 구애였고 인간과 이어질 수 있는 가느다란 선이었다. 농담은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사람들과 그나마 ‘잘’ 지내게 해주었다. 주위 사람들이 어떤 괴로움을 안고 사는지, 그 괴로움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 나 역시 웃고 있지만 속으론 울고 싶은데, 다른 사람들도 그러지 않을까. 아니면 더 복잡한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 웃고 있는 저 사람도 슬플 수 있겠지. 겉보기에 삐에로는 항상 웃고 있어서 마냥 행복해보이지만 웃는다고해서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누구라도 안다. 우리도 그러하기 때문에. 그래서인지 웃고 있는 삐에로 가면 속에 숨겨진 슬픈 맨 얼굴을 무심코 외면하기에 너무 나도 익숙하다. 익숙하지만 익숙한 그들의 맨 얼굴을 마주하기란 너무나도 어렵다. 웃는 가면과 그 맨 얼굴의 간극은 아득할 정도로 멀다. 마주할 무언가 방법이 없을까. “진심으로 상대방을 대하면 상대방도 당신을 진심으로 대할 것입니다.”라는 빛바랜 말이 와닿지는 않는다. 간단히 진심이라는 말로 그 간극을 건너기엔 절벽이 너무 가파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농담이다. 농담이라는 가느다란 선에 몸을 맡기고 조금씩, 천천히 다른 사람들의 맨얼굴에, 진심에 다가가는 것이다.

 요조에게는 이것마저 쉽지 않았나보다. 그는 화를 내고 있는 인간의 얼굴에서 사자나, 악어, 용보다 더 무서운 동물적 본성을 보았다. 평소에는 그 본성을 숨기고 있다가 어느 순간, 예를 들어 소가 풀밭에서 느긋하게 낮잠을 자다가 갑자기 배에 앉은 파리를 꼬리로 탁 쳐서 죽이듯 한 인간의 본성을. 인간을 향한 막연한 두려움, 그것은 어쩌면 농담이라는 가느다란 연결고리로는 뛰어넘기 어려운 절벽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무모한 기대를 해본다.


- 기대에서 두려움으로

 “고등학생 3년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만 해. 그러면 남은 인생 행복하게 살 수 있으니까.” 꿈 많던 고등학생 시절, 교실에 앉아서 각 수업시간마다 들어오는 모든 선생님의 말씀은 녹음기를 반복 재생하는 것처럼 한결같았다. 행복한 인생이라는 기대는 자유분방한 나를 교실 한 구석 의자에 앉혔다. 3년이 어떻게 지났는지 엉덩이와 의자는 떨어질 줄 몰랐고, 무던히 노력한 내 고등학생 3년은 쓰디 쓴 실패를 맛보았다. 실패는 쓰고 써서 무언가를 다시 도전하려해도 실패의 쓴 맛이 떠올라 쉽게 전념할 수 없었다. 물론 내 앞에 놓인 길은 무수하고 그 험난한 길 뒤에는 달콤한 오아시스도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내게 달콤한 오아시스보다 앞에 놓인 험난한 길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지난 날의 오아시스에 대한 기대는 노력을 낳았지만 불가피하게 이어진 실패는 나를 다시 일으킬 수 없는 두려움 속에 빠뜨렸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은 항상 진실일까. 진실여부를 떠나서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는 말은 희망을 담고 있어 말 자체로 아름답다. 간절히 바랐던 일들이 모두 이뤄졌던 것은 아닌 걸 보면,  씁쓸하게도 그 말이 아름다운 만큼 진실을 보장하는 것은 아닌 것 같지만 말이다. 아름다울 것만 같은 꽃길의 종착지가 추한 실패 뿐이라면 그 여정보다 슬프고 절망스러운 여정은 없을 것이다. 최선을 다했고 좋은 결과였다 생각했지만 알아주지 않는 직장상사, 동료, 후배들 혹은 친구들. 더 이상 공부할 것이 없을 정도라며 자부했지만 증명해주지 않는 학점. 충분히 표현했지만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가족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大天命).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리면 내 뜻은 이뤄진다던가! 오랜 격언과는 다르게 보상되지 않는 노력들은 허공에 흩어져 허망하고 심지어 두렵다. 기대는 필연적으로 노력이라는 꽃을 피웠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고 고사(枯死)하였다.


-타인이라는 기대의 결말

혹시라도, 어쩌면 진심을 다한다면 나의 맨 얼굴과 타인의 맨 얼굴을 마주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역설한 만큼 극복하기 어려운 ‘다른 사람’을 어쩌면, 정말 어쩌면 온 힘을 다한다면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고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고 한다. 분명히 어떤 방법으로는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 어려운 난관일수록 극복 했을 때의 기쁨은 다른 어떤 난관을 극복 했을 때의 기쁨보다 클 것이다. 비 온 뒤 땅은 굳고, 어려운 시기를 함께 극복한 친구들이 다른 누구보다 더 내 마음에 가까이 있는 것처럼. 이정도면 한번 부딪혀 볼만하지않을까.

하지만 가장 높이 올라가는 롤러코스터가 가장 낭떠러지로 추락 하듯, 멀리 쓸려간 썰물이 가까이 밀려오는 밀물이 돼 돌아오듯. 큰 기대일수록 실패했을 때의 두려움은 단 한번의 새로운 시도도 용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열 번 찍어서 안넘어가는 나무는 없다지만 한 번 찍어서 도끼가 부러진다면 나무는 어떻게 쓰러뜨릴 것인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지만 단 한 번의 실패가 더 이상의 시도조차 용납하지 않는다면 과연 성공을 낳을 수 있을까.

사람을 무서워하기까지했던 요조도 어쩌면 사람을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아주 큰 기대여서 요조에게 닥칠 결말을 예고하는 듯하다. 요조는 사람이 속을 알 수 없고 잔인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사람들 속에서 사는게 당연한 이 세상은 그에게 지옥이었다. 두렵기만한 지옥에서 요조는 농담과 익살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最善)이었고, 차악(次惡)이었다. 그런 그의 삶에도 먹구름 가운데 한줄기 빛이 나타났다. 사람이 두려워 자신조차 자신을 믿지 못하는 요조에게 요시코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주었다. 그와 다르게 그녀는 순수하게 사람을 믿었던 것이다. 그 점이 요조를 구원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뒤에 찾아온 요조의 슬픔은 처참하다는 말로도 모자랄 뿐 아니라 요조에게 실로 상상을 초월할만큼 큰 것이었다. 불 켜진 방에는 짐승 두마리가 있었다. 하나는 요시코였지만, 다른 하나는 요조가 아니었다. 요시코는 겁탈 당한 것이었다. 의심할 줄 모르는 요시코는 의심이 없었다는 것 말고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잘못이라면 요시코를 겁탈한 괴한에게 있었다. 요조는 이후 요시코를 예전처럼 대하지 못했다. 요시코 역시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요조의 농담에도 안절부절못하고 벌벌떨기만 했다. 그저 요조에겐 요시코가 더렵혀졌다기보다 요시코의 믿음이 더렵혀졌다는 것이 살아갈 수 없을 만큼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불씨가 되었다. 믿음이 죄가 되는 걸까. 아, 맑고 순수한 믿음은 죄의 원천이 되는 건가. 요조는 세상과의 최후의 연결고리인 농담과 익살마저 잃고 폐인이 되었다. 삶을 비웃듯이. 더 이상은 세상 따위는 필요 없듯이.

요조는 실패하고 말았고 요조의 타락을 목격한 나로서 두렵기만하다. 언젠가 내 노력은 커다란 행복을 낳을지 모르겠지만 혹시 있을지 모를 실패가 두렵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조심스럽게 다가가 익숙하게 농담을 건네고 웃음을 사고 속으론 쓴 웃음을 짓는 것 뿐이다. 조금만 더 나를 알아 달라 다가가면 알아줄까. 내가 보여준 진심이 그들에겐 거짓처럼 보일 수 있지 않을까. 그들에게 진심을 보여도 그들이 불편하진 않을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나와 너의 관계는 이렇게 시야에서 멀어진다. 큰 기대도 두려움으로 끝날 희망고문이라 자조(自嘲)하면서 농담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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