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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Apr 18. 2017

정유정이 말하고 싶은 것

정유정 <종의 기원> 서평

*스포일을 최대화하였음. 소설을 설명하고자 함.

스포일 없는 리뷰는 해당 링크


 소설은 주인공인 유진이 형과 함께 성당에서 세례를 받는 모습에서 시작한다. 아픈 몸으로 바들바들 떨면서, 유진이 주님의 어린양이 되려는 모습은 고결하고도 외로운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선인(善人)처럼 보였다. 허나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유진은 정반대의 사람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커진다. '악인(惡人)에 가깝지 않나.'라는 의문은 결국엔 '악인이다.'에 수렴한다. 책을 닫고서, 오른손을 책의 뒤표지에 무겁게 올려놓고는 '그래서 뭐?', '악인인데, 어쩌라고?'라는 반문이 나온다. 그렇다면 정유정의 소설 <종의 기원>은 악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 말고는 볼 것 없는 소설인가. 정유정이 직접 말한 대로 '악인의 자기 변론서'에 지나지 않을 뿐인가. 굳게 닫힌 책을 보면서 이 녀석의 깜냥을 따져보았다.


 주인공인 유진은 사이코패스이면서, 그중 최상위 레벨인 포식자이다. 최근 들어 뉴스에 심심치 않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이코패스 범죄를 목격한 우리들은 쉽게 유진의 생각과 행동을 예상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이코패스는 다른 사람의 행복과 불행에 어떠한 감정적 동요나 공감을 하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사이코패스는 극악무도한, 사람으로서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다. 유진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범죄에, 악행에 특별한 동기나 감정적 충동 없는 사이코패스를 위한 변론을 보통 사람인 우리가 왜 들어야 하는 것일까. 정유정은 왜 하필 사이코패스로 악(惡)을 변론하려 한 것 일까. 인간 누구에게나 선과 악이 공존하며, 운명의 잔혹한 폭력성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선과 악을 풀어낼지 표현하고 싶다던 정유정이었다. 그렇다면, 보통사람의 악(惡)을 표현해야 신빙성 있는 악인의 자기 변론서를 작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사이코패스를 변호할 피고인으로 설정한 것은 언뜻 무리한 설정처럼 보였다.


 하지만 의문인 점은 사이코패스인 유진이 엄마의 그늘은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이코패스라면, 부모의 통제를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을까? 이는 언뜻 소설의 개연성을 지적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부모에겐 유약한 사이코패스라는 설정은.


 반면, 실생활의 뉴스를 헤아려보면 오히려 이것이 현실 세계의 탁월한 표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매체를 통해 가해자로 지목된 사이코패스 역시 가족이 있는 사람이다. 사이코패스의 부모는 종종 티브이나 신문지면에 얼굴을 비춰 비슷비슷한 얘기를 한다. "우리 아이는 원래 착한 애였는데. ", "저한테는 한없이 여린 애예요. " 이는, 찰스 다윈이 밝힌 인류의 기원이 원숭이라는 사실보다 놀랍다. 20명 이상의 사람을 연쇄 살인하는 자, 어린아이를 유괴해 해부하고 토막 내 죽이는 자를 설명하는 말이 착하다(善)라니.

 그러고 보면 어떤 사람이든, 모든 기원은 부모에게 있다. 그런 연유로 사이코패스도 부모 앞에선 착하고 여린 것이다. 기원마저는 부정할 수는 없던 것이다. 이것을 본능적으로 아는지, 사이코패스인 유진 역시 자신의 기원인 엄마 앞에서는 한없이 약하다. '무기한 수영금지'라는 엄마의 위엄 있는 벌칙은 유진을 마치 동물원 우리에 갇힌 원숭이에 불과한 존재로 만든다.


 어머니는 더 추궁하지 않았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성경 말씀을 들려주지도 않았다. 대신 수영장 출입 금지령을 내렸다. 당연히 수영부 훈련도 빠져야 했다. 형량은 무기한이었다. 도둑질에 거짓말, 형을 모욕한 죄까지, 중차대한 규칙 위반이 세 가지였으므로. 나는 인천으로 이사할 때까지 수영장 근처조차 가지 못했다. 매일 밤, 침대에 엎어져 가상 수영을 하는 걸로 물을 향한 그리움을 달래야 했다.
 -정유정, <종의 기원> 中



 또한 유진은 사이코패스이지만, 평범하게 대학교까지 졸업하였다. 실제로는 남들과는 조금 다를 수 있었어도, 그래도 평범한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그 이면에는 유진의 피나는 균형 잡기가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는 모호한 외줄 위에 서서, 유진은 어쩌면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곡예를 하고 있던 것이다. 갸우뚱, 저절로 악(惡)에 몸이 기울어도 선(善)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사건은 터졌고 유진은 악에 온전히 고꾸라졌다. 정유정은 여기서 악인을 위한 변론을, 사이코패스를 위한 변론을 아예 포기한 것만 같았다. 선이고 악이고 변론이고 뭐고 그냥 유진은 나쁜 놈이고, 정유정의 <종의 기원>은 스릴러 소설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정유정 표현대로, 악인을 변론하고 싶다더니 인간 모두 다 악을 갖고 있어 그것을 보여주고 싶다더니. 다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괜히 누구든지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이코패스를 등장시켜, 그 사이코패스에게 모든 악을 뒤집어 씌우는 것이 아닌가. 이러면, 굳이 악(惡)을 위한 변론을 무엇하러 하는가. 이렇게 미운 마음이 들었다가, 문득 나쁜 게(惡) 무엇일까.


하느님이 창조한 동물들에 남자가 이름을 붙여준다. 남자의 배필이 될 한 여자가 남자의 신체 중 일부로써 창조된다. 뱀이 여자를 유혹하고, 여자가 남자를 유혹한다. 그래서 하느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의 열매를 먹는다. 저주가 뱀, 여자, 남자에게 내린다. 두 사람은 에덴에서 쫓겨난다.
 - 창세기 2장 ~ 3장, 태초의 악(惡)을 배우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선과 악에 대해 많은 것을 듣고 배우며 자랐다. 그럼에도 선과 악을 묻는 질문에는 대답이  쉬이 나오질 않는다. 길가는 노인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었다면 선이다. 아버지의 구두를 닦아드렸다면 선이다. 반대로, 선은 무엇인가? 선은 노인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는 것인가, 아버지의 구두를 닦아드리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은 선에 대한 답변은 선의 아주 작은 부분만 설명할 뿐 선의 정의는 될 수 없다. 다른 설명, 교회에 매주 나간다든지 신을 믿는다든지도 그렇다. 마찬가지로 악(惡)의 정의 역시 그러하다. 사이코패스 한유진은 악인가. 그렇다. 그러면 악은 무엇인가. 악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여기서, 그 기원을 따져보자. 무언가를 고민할 때, 그것의 기원을 따져보는 것은 꽤나 의미 있는 일이다. 다시, 정유정의 <종의 기원>에서 악의 기원을!



뮤턴트(돌연변이) 우월주의, 뮤턴트가 인간 이후의 새롭게 진화된 종족이라 주창한 매그니토 (영화 X-Men 시리즈 中)


 그러기에 앞서, 찰스 다윈의 저서 <종의 기원>에서 인간은, 인간 모습 그대로 한 순간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원숭이의 모습에서 진화를 거듭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밝혔다. 가령, 네 발로 기어 다니던 원숭이 중 직립하는 원숭이가 하나 둘 등장한다. 직립하는 원숭이가 생존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어 그 개체수가 늘어나는 반면, 네 발로 기어 다니던 원숭이의 개체수가 감소한다. 이에 따라 직립하는 원숭이들이 최종적으로 살아남고 그것들이 추가적으로 다른 진화를 거듭하여 지금의 인간 모습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돌연변이 발생, 부적응 개체 퇴화, 적응 개체 존속의 방식으로 현재의 생물학적 인간의 모습을 갖추었다.



 정유정의 저서 <종의 기원> 역시 마찬가지로 인간의 기원을 찾고 있다. 앞선 명저서와 다른 점은 찰스 다윈이 찾은 생물학적 인간의 기원이 아니라 도덕적 인간의 기원을 찾고 있다는 점이다. 윤리 시간에 종종, 혹은 사람의 인성을 가늠하다가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하는 머리 아픈 논쟁에 빠져든다. 사이코패스를 범죄를 보니 사람은 성악설이 확실하다는 둥, 갓난아이의 해맑은 표정을 보면 성선설이 확실하다는 둥. 하지만, 정유정의 입장에서 이런 논의는 전부 창조된 인간의 도덕적 상태일지도 모른다. 찰스 다윈의 입장에서 인간이 인간의 모습으로 한 순간에 창조된 것이 아니듯, 인간의 도덕도 성악설 성선설과 같은 어떠한 특정한 도덕적 상태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생물학적 조상이 원숭이라면, 인간의 도덕적 조상은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선과 악의 개념 자체가 없는 생명체로서의 인간. 정유정은 이를 한유진이라는 사이코패스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다윈의 네 발로 기어 다니던 인간의 도덕은 지금의 도덕의 모습이었을 리 만무하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 한유진의 도덕은 가히 '인간 도덕의 살아있는 화석'이라 칭할만하지 않은가. 그렇다. 정유정은 '악인의 변론'을 자처하면서도, '종의 도덕적 기원'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선과 악을 모르는 '악인'을 도덕적 조상으로 둔 덕에, 정유정의 변론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6101900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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