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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Jan 24. 2017

영화 더킹, 중요한 건 왕이 아니야!

영화 <더 킹, 2016>

 크레디트의 머리가 보이고, 어둡던 영화관이 밝아졌다. 사람들은 외투를 주섬주섬 챙겨서 자리를 일어났다. 영화 <더 킹, 2016>이 긴 러닝타임의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영화에 대한 감상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공익광고'. 두 단어로 표현하자면 '아웃백의 공익광고'. 좀 더 늘여보자면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와 함께하는 정치참여 독려 광고'라고 할 수 있겠다. 아웃백이 생각나는 것은 정우성(한강식 역)이 너무나 자주 스테이크를 - 약간 오버다 싶을 정도로- 썰고 먹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웃백 CF모델이었던 조인성(박태수 역)이 종종 그 스테이크 썰기에 동참하거나 스테이크 잔상이 남은 스크린에 겹쳐서 비쳤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공익광고가 생각나게 하는 것은 영화 말미에 다다라서 조인성(박태수 역)이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는 장면 - 플래시백- 이 음주운전 근절 공익광고, 금연 독려 광고류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종종 '당신이 만약 운전대를 잡지 않았다면'이나 '당신이 만약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면' 등의 문구와 함께 사고나 발병의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장면의 공익광고가 있지 않은가.



 아웃백 얘기를 하니까 말인데, 초등학교 시절쯤 유행하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당시에는 꽤나 비싼 가격으로, 부모님들과 다녀온 애들 사이에서는 자랑하는 것이 어떤 유행 같은 것이었다. 그런 애들 주변에는 더러 모여서 레스토랑 얘기를 듣거나 새로 산 컴퓨터 게임에 대한 자랑을 듣는 것이 그 시절 진풍경이었다. 자연스럽게도 레스토랑에 다녀온 아이들의 부모는 게임 CD까지 흔쾌히 사주는 편이어서 파스타나 스테이크라는 음식에서 테란이나 액트 1의 안다리엘 얘기를 꺼내기는 아주 물 흐르듯 흘러갔다. 모여서 떠들다 어느새 레스토랑에 자주 가는 그 친구가 하사하는 게임 CD를 종종 빌릴 수도 있었다. 듣고 듣고, 빌리고 빌리다 어느덧 레스토랑 친구는 반의 중심에 있게 되었다. 그렇게 1학년 3반의 분위기는 레스토랑 친구의 것이 된다.





 이 영화 <더 킹>도 레스토랑 친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쁜 마음을 먹은 레스토랑 친구와 그 주변의 이야기이다. 정우성(한강식 역)의 주변에는 그를 추종하는 많은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후배 검사인 배성우(양동철 역), 조인성(박태수 역)에서 기자, 조폭 등등. 그의 추종자들은 레스토랑 친구의 게임 CD를 고대하거나, 나아가서는 잘하면 컴퓨터를 주진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진 무리들이다. 레스토랑 친구인 정우성(한강식 역)은 더 높은 권력을 위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분위기를 쥐락펴락하는데 추종자들 역시 그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다. 레스토랑 친구의 말을 듣는 것은 반 분위기에 도움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는다면 반 분위기를 흐리는 놈이 될 뿐이기에. 그런 놈은 주로 왕따가 된다.



 다수의 말은 옳은가. 분위기를 저해하는 것은 그릇된 행동인가. 우리나라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지내다 보면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의문이다. 연상호 감독의 영화 <돼지의 왕, 2011>에 등장하는, 학교의 분위기를 맘대로 하는 손석응과 그 무리들이 떠오른다. '학교 분위기 망치는 애들은 아주 맞아야 돼'와 같은 말로 덧칠되는 개개인의 면면. 환한 얼굴은 하굣길에 울상이 된다. 어려서부터, 무의식적으로 개개인은 자기를 숨기면서 살고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행동한다. 1학기 첫 수업, 선생님의 질문에 적극적으로 손을 뻗어 올리던 녀석은 종업식쯔음이면 말이 없는 녀석이 되어버린다. 고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대한민국의 학생부터 회사원까지, 우리는 분위기에 반발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우린 분위기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분, 위, 기.


 그러면, 정우성(한강식 역)은 나쁜가. 배성우(양동철 역)는? 박태수(조인성 역)는? 박태수는 분위기에 동조했지만 잘못을 뉘우쳤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는가. 양동철 역시 지방으로 쫓겨나고 누렸던 호사로움을 모두 잃고 반성하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는가. 반대로 한강식은 반성이 없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가. 생각해볼 일이다. 그들은 모두 권력 추종의 대가로 호의호식을 하였다. 우리 주인공 역시 그러하다. 무리에서 버림받아 양심 고백한 박태수가 반성하게 된 계기는, 무리에서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버림받지 않았다면 그는 죽을 때까지 호화롭게 살았을 것이다. 체육교사에게 성폭행과 구타를 당해 얼룩진 지민이의 인생은 어떻게 되돌릴 것인가. 그 이후 생략되는 많은 얘기 속 피해자들은. 구태여 양동철, 한강식의 얘기는 할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저명한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의 통찰은 가슴에 깊이 박힌다. 그녀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은 나치에 부역한 관료이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수용소에서 수많은 유대인의 사형을 집행하였다. 나치가 몰락하고 아이히만은 법정에 섰다. 아이히만은 억울한 듯이 '자신은 정부의 관료로서 위에서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답하였다. 아렌트가 보기에 그는  악(惡) 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근면한 관료일 뿐이었다. 그에게 죄가 있다면 무사유가 그 죄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이하만은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 것이다. (중략)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였다. (중략)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한나 아렌트, [예루사렘의 아이하만]

 

마찬가지로 나쁜 레스토랑 친구와 그 무리들의 죄는 단순 무사유라는 이름으로 치환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면 무사유는 아렌트 말마따나 무죄인가. 할 수 없다면 죄는 용서 받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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