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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Mar 13. 2017

죽지 못해 사는 로건 그리고 우리

탄핵 정국과 영화 <로건>

 요즘 같은 때는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도 같다. 나를 비롯한 삶의 새로운 국면(취직, 진학, 결혼 등의)을 맞는 이들은 '엔포 세대'라고 불린다. 예전 같으면 이들을 대략 무슨 세대라고 짧게 표현했었다. X세대, Y세대, Z세대 등등 그렇게. 그런 식으로 N세대라고 명명될 줄 알았던 우리의 세대는 N포세대가 되었다. 포기가 늘고 늘어서 셀 수 없을 만큼 늘어서 이른바 N개가 되었다는데. 이만큼 다 포기하고 살면,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딱 들어맞지 않는가.

 비록 2017년 3월 10일, 일반 대중은 일종의 정치적 해방을 경험하였다. 광장으로 대표되는 민주주의에서 어둠을 뚫고 나오는 빛 한 줄기를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마음이 마냥 살 맛이 난다고 하기엔 부족하다. 촛불과 태극기로 상징하는 두 무리는 하루가 다르게 서로를 보며 혀를 찬다. 서로가 아니꼬워 보이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말도 있듯이 말이다. 물론 간혹 떼지도 않은 굴뚝에 연기도 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좌우 혹은 상하로 나뉜 양 극단(極端)의 한 쪽에서 반대쪽을 멀리 내다보면, 그 심연의 끝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다. 그러다 문득 다시 내게 눈을 돌리면, 나도 혹시 언젠가 저 반대쪽 극단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기도 한다. 그럼 나는 나로서 살고 있는 것이면서도 내가 아닌 그 극단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 삶이란 극단에서 극단으로의 경주인가. 내가 없길 바라는 그곳에 내가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축제 속에서도 죽지 못해 사는 기분을 피할 수 없는 이유.



 영화 <로건>의 울버린, 그니까 로건을 보면 딱 그렇게 보인다. 죽지 못해 산다. 자신의 특수한 능력 때문에 죽지 못하는 것임에도, 로건은 보통 사람이 사는 바로 그 '죽지 못해 산다'를 몸소 보여준다. 강인한 몸과 두 주먹에 달린 아다만티움 클로로 인류를, 돌연변이를 구하던 그가 그저 기사 아저씨로 전락한 탓일까. 콜을 받고 손님을 태워 손님에게 돈 몇 푼을 받는 것, 돈으로 찰스의 약을 사고 저축을 하는 것, 가끔의 위스키를 마시는 것 말고는 로건의 삶을 설명할 문장이 필요치 않을 정도이니. 이쯤 되면 로건의 삶은 N포세대인 우리와 그다지 다른 것 같지도 않다. 고시원에 내 한 몸 눕히기도 어려운 공간에서 죽지 못하는 삶을 영위하는 것과 멕시코 국경 근처 폐공장에서 죽지 못해 숨어 사는 로건과 크게 다를 바는 무엇이랴.


0.

 돌연변이(Mutant)가 아닌 인간이 만든 유전자 조작 식품이 돌연변이를 약하게 만들었다. 또한, 인간은 현존하는 돌연변이의 개체수에 대해 지속적으로 감시하며 그들의 멸종을 도모하고, 자체적으로는 인조 돌연변이를 만들어 군대를 조직하고자 한다.


1.

 로건을 포함한 돌연변이들은 그들끼리 모여 살며, 그들 스스로 돌연변이는 신의 계획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인간의 탓인지, 신의 탓인지 돌연변이의 개체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태어나는 돌연변이 수가 감소하고 현존하는 돌연변이는 힘이 약해지거나 인간에게 사살되어 사망)


2.

 찰스, 로건, 칼리반 이 세 명은 극 중 배경인 2024년에 남은 마지막 돌연변이 생존자이다. (세 명이 알기로)


3.

 그렇다면 돌연변이는 신의 계획이 아니라 실수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남은 셋은 그렇게 여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뿌리째 흔들린다면, 제 아무리 슈퍼히어로라도 버틸 수 있을까.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도 고뇌했던 이 문제는, 이제 돌연변이인 로건에게도 찾아온다. 신의 계획이라고 믿었었는데, 졸지에 돌연변이는 신의 실수가 된 것이다. 돌연변이인 로건은 깊이도 가늠할 수 없는 심연을 건너 반대쪽 극단에서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축제의 광장에서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는, 일명 닭장차 너머에 보이지 않는 심연의 공포에 사로잡힌 내가 맞이할지도 모르는 문제의 한가운데에 로건은 이미 서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어찌하여 혼돈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로건은 벗어나게 된다. 그 방법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에덴으로 가기)하는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삶이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다시 말해, 선택 없이 흘러가는 삶이 도달할 곳은 단조로운 죽음(Death)밖엔 없다는 것이다. 단조로움 죽음, 이는 오늘날처럼 죽지 못해 사는 것이다.

 알고 있음에도 내 삶에는 그다지 선택할 기회가 많지 않다. 포기를 강요받는 사회에서 선택할 무언가를 찾기란, 요즘 시기에 타고난 운이 없다면 어려운 일이 되었다. 헬조선이라는 말은 이해가 좀처럼 되지 않는 게 지옥을 아직 가보지 않아서 그런 것이었지만, N포세대라는 말은 가슴속 깊이 이해가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린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을 기필코 찾아야만 한다. B와 D 사이에 C(Carnival, 축제)는 반드시 있다. 로건처럼. 3월 10일의 광장처럼.

 우린 수백만 불꽃이 만개하던 광장에서 아름다운 선택을 하였고 축제를 즐겼다. 폭죽이 하늘을 수놓았고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얼싸안고 춤을 추기도 하였다. 비록 몸이 안 좋아 광장에는 못 나가도, 누군가는 TV 앞에서 혹은 컴퓨터 앞에서 작은 축제를 즐겼다. 광장엔 어둠이 다시 찾아오고 우린 모두 방으로 돌아가 TV를 켰다. 들뜬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라앉았다. Carnival(축제)는 막을 내리고 다시 D(Death)가 기다리고 있다. 다시 단조로움(Dull)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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