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아무 영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올 Mar 03. 2017

우리들의 어머니

영화 <눈길> / 이나정 감독

1.


 일제가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강제적으로 납치, 매수한 한국인 여성들은 수도 없이 많았었다. 17세에서 30세까지 미혼인 대한민국 여성들 모두가 일제에 의해 성노예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당장 내 동생이, 학교의 내 후배가, 회사의 내 동기가 더러운 전쟁을 위해 성노예가 되어야 했었던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흘러, 단 239명만이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피해자이다. 수치스러운 기억을 잊고 싶어서, 다른 사람의 시선이 고통스러워서 등 피해자들은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입을 굳게 닫고 살아야만 했었다. 심지어 가족에게도 밝힐 수 없었던 참혹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 강일출 할머니의 그림,  <태워지는 처녀>

 현재(2017년 1월 1일), 정부에 등록된 239명의 피해자 중에서 생존자는 39명에 불과하다. 수많은 대한민국의 일반 여성들이 고통과 오욕 속에서 평생을 보내야 했지만, 전범인 일본은 제대로 된 사과 없이 돈 몇 푼에 입을 씻었다. 서러운, 한스러운 그대들이 바란 건 돈 몇 푼이 아닌데도 말이다.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되었다가 살아남은 여성들은 귀국도 여의치 않았다. 연합군의 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귀국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현지에 버려지다시피 했다. 일본군이 패전 후 ‘위안부’를 살해하는 일도 있었으며 대부분의 업주는 피해 여성들을 버려두고 귀국길에 올랐다. 피해 여성들은 일본 패전 후 혼자 힘으로 살아남거나 고향에 돌아올 방법을 찾아야 했다. ‘돌아갈 방법을 구하지 못해서’,‘고향에 돌아갈 면목이 없어서’등의 이유로 동원된 타국에 눌러앉는 경우도 많았다.
 살아남은 피해자들은 귀국 후 심각한 육체적‧정신적 후유증으로 끊임없이 고통받았다. 구타 및 가혹행위로 인한 외상, 불임, 성병 등 일본군‘위안부’ 피해로 인한 직접적인 후유증이 오랜 시간 피해자들을 괴롭혔다. 육체적 고통은 진통제 등의 약을 계속 복용하게 하여 약물 중독도 뒤따랐다. 또한 자신의 몸에 대한 자결권을 가지 못했다는 모욕감, 피해 사실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 받아야 할 불이익과 낙인에 대한 두려움, 삶의 패배감, 우울증 및 불면증 등의 심리적 외상 등으로 힘겨운 삶을 이어갔다. 피해 사실 때문에 적극적인 사회 활동을 하지 못하고 가족제도에 편입되지 못한 피해자는 빈곤의 악순환에 몰리기도 했다.
 [출처 :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일본군‘위안부’구술기록집 『들리나요? 열두 소녀의 이야기』중 발췌



2.


 종분(김영옥이 연기한, 김향기가 아역 연기한)은 극 중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중의 한 명이다. 그리고 우리의, 민족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낸 우리들의 딸이고 어머니이다. 그러나 오욕의 시간을 이겨내고 고향으로 겨우 돌아갔어도 종분에겐 고향이 없었다. 어느 누구도 그녀를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종분은 역사의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시선에선 가해자였다.

 어쩔 수 없이 종분은 고향을 떠난다. 모졌던, 모진 삶을 살아내고 살아내어 이제와 겉보기엔 다른 누구와 다를 것 없는 할머니가 된다. 속은 썩어 문드러졌어도, 살아내야 되는 것이 가혹하게도 삶이었다. 그런 종분에게 옆집 사는 고등학생인 장은수(조수향이 연기한)는 안타깝기만 하다. 작은 반지하 빈집에 몰래 숨어서 사는 여학생이, 학교에도 잘 나가지도 않는 여학생이, 평범하지 않는 삐뚤어진 고등학교 생활을 하는 여학생이. 종분의 눈에는 방황하는 젊은 영혼이 그저 당신들의 어린 시절처럼 보여서였을까 아니면 당신들의 지옥이 당신들의 잘못이 아닌 것처럼 은수의 방황 역시 온전히 은수의 잘못은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일까. 괜히 연고도 없는 옆집 은수에게 자꾸만 눈길이 간다.


"어떻게 어떻게 장터거리로 들어서서 차부가 저만큼 보일 만한 데까지 가니까 그때 마침 차가 미리 불을 켜고 차부를 나오는구나. 급한 김에 내가 손을 휘저어 그 차를 세웠더니, 그래 그 운전수란 사람들은 어찌 그리 길이 급하고 매정하기만 한 사람들이더냐. 차를 미처 세우지도 못하고 덜크렁덜크렁 눈 깜짝할 사이에 저 아그를 훌쩍 실어 담고 가 버리는구나.

(중략)

 어떻게 하기는야. 넋이 나간 사람마냥 어둠 속에 한참이나 찻길만 바라보고 서 있을 수밖에에야… 그 허망한 마음을 어떻게 다 말할 수가 있을거나…."

노인은 여전히 옛 얘기를 하듯 하는 그 차분하고 아득한 음성으로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나갔다.

"한참 그러고 서 있다 보니 찬바람에 정신이 좀 되돌아오더구나. 정신이 들어 보니 갈 길이 새삼 허망스럽지 않았겄냐. 지금까진 그래도 저하고 나하고 둘이서 함께 헤쳐 온 길인데 이참에는 그 길을 늙은 것 혼자서 되돌아서려니… 거기다 아직도 날은 어둡지야… 그대로는 암만해도 길을 되돌아설 수가 없어 차부를 찾아 들어갔더니라. 한 식경이나 차부 안 나무 걸상에 웅크리고 앉아 있으려니 그제사 동녘 하늘이 훤해져 오더구나… 그래서 또 혼자 서두를 것도 없는 길을 서둘러 나섰는디, 그때 일만은 언제까지도 잊혀질 수가 없을 것 같구나."

-이청준, <눈길> 中


3.


 방황하는 은수를 감싸주는 종분의 마음은, 추운 겨울 새벽에 아들을 타지로 보내는 어머니 마음과 같을 것이다. 어머니 당신이 어떠한 아픔과 고통을 겪었어도, 아들의 몸의 작은 상처에도 눈물짓는 그런 마음. 어머니는 아들 떠난 자리를 한없이 한없이 바라보다, 앓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려오던 눈길 걸음걸음마다 아들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발자국 하나에 아들을 찾고 둘에 눈물을 떨군다

 마찬가지로 위안부 피해자인 종분은, 전쟁의 모진 폭력 속에서 닳고 무뎌진 자신이지만 은수에게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따뜻한 잠자리라도 나누고 싶었다. 종분 자신도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전기세 만원 이만 원에 울고 웃는 살림이었지만, 연고도 하나 없는 은수였어도 종분은 그러고 싶었다.


 "길을 혼자 돌아가시던 그때 일을 말씀이세요?"

 "눈길을 혼자 돌아가다 보니 그 길엔 아직도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지나간 사람이 없지 않았겄냐. 눈발이 그친 신작로 눈 위에 저하고 나하고 둘이 걸어온 발자국만 나란히 이어져 있구나."

 "그래서 어머님은 그 발자국 때문에 아들 생각이 더 간절하셨겠네요."

 "간절하다뿐이었겄냐. 신작로를 지나고 산길을 들어서도 굽이굽이 돌아온 그 몹쓸 발자국들에 아직도 도란도란 저 아그의 목소리나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듯만 싶었제. 산비둘기만 푸르륵 날아올라도 저 아그 넋이 새가 되어 다시 되돌아오는 듯 놀라지고, 나무들이 눈을 쓰고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뒤에서 금세 저 아그 모습이 뛰어나올 것만 싶었지야. 하다 보니 나는 굽이굽이 외지기만 한 그 산길을 저 아그 발자국만 따라 밟고 왔더니라.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너하고 둘이 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 것 혼자서 너를 보내고 돌아가고 있구나!"

-이청준, <눈길> 中


4.


 어머니 마음에 무엇을 더 보태어 설명할 수 있을까. 오랜만에 아들 온다고 아픈 몸에도 된장국을 끓이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에서 종분이, 눈길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어머니가 겹쳐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은수를 바라보는 종분의 따스한 눈길도, 결국엔 어머니의 마음인 것이다. 자신들이 걸어온 길이 꽁꽁 언 눈길이어도, 그것이 시리도록 차가운 눈길이어도 따뜻한 밥 한 끼, 포근한 잠자리 하나 내어주는 것이 어머니 마음인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맨발로 가시밭길을 걸어왔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가시 돋친 세월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살아온 종분에게도 눈에 밟히는 건 자신의 삶이 아니라 우리들이었다. 오욕으로 얼룩진 당신의 세월보다 눈에 밟히는 것은 우리의 방황이었다. 어머니처럼.

 생각해보면 나는 이제까지 그대들에게 해준 것이 없었다. 우리의 어머니일 수도 있는 당신들에게 나는 아무것도. 난 운이 좋아서 지금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 시대였어도 내가 지금처럼 편할 수 있을까. 그대들은 단지 그 시대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몸이 뜯기고 분리되는 그런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자신을 부정하고 살아야만 했다. 그 희생의 대상은 어쩌면 우리일 수도 있었다. 지금의 내 것이라 여긴 내 몸이 내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누군가에 의해 뜯기고 분리되어 갈기갈기 나를 지워가는 과정을 겪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서 단순히 내가 당한 일이 아니라고 해서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우린 자신의 불행에 동정을 기대하는 모순적인 행동조차 하지 않아야는 것이다. 지나가는 길에 아무 이유 없이 폭력을 당했다고 경찰서에서 억울함을 표할 수 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대들의 불운함에 책임을 질 도의가 있다.


여기 우리 애들
네가 기억해야 돼.

난 한 번도 혼자인 적 없었다.
네가 있어 여태 내가 살았지.

 그런데도 난 이제껏 나 대신 오욕을 견뎌준 그대들을 위해 한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단지 기억하는 일 외에는.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도 솟구쳐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는 것은 이것밖에 할 수 없음에 대한 사죄인지, 무엇이라도 돕겠다는 다짐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건 종분의 친구인 영애의 기억해달라는 말과 종분의 '네가 있어 여태껏 살았다'는 말이었다. 마치 기억 외엔 당신들을 도울 길이 없는 나를 외려 위로하는 듯하였다. 어머니의 품은 따스하기만 했다.

 우리의 어머니, 당신들이 걸어온 눈길에 따스한 눈길을 보내고 싶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더큐어, 웰빙을 찾아 떠나는 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