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아무 영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올 Feb 21. 2017

더큐어, 웰빙을 찾아 떠나는 여행

영화 <더 큐어, a cure for wellness>

 록하트 역의 데인 드한의 외모는 정말이지 수려하기 이를 데 없다. 꽃미남 같은 부드러운 외모에도, 곳곳에 숨어있는 남성미 역시 아주 그럴듯하다. 연기도 역시 일품. 하지만 이내 실망하게 되는 건, 마주한 데인 드한의 벗은 몸이다. 데인 드한의 벗은 몸은 여타 헐리우드 배우와는 다르게 밋밋하다. 데인 드한의 몸 하나로 영화는 영화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그럴 듯 하지만 결국은 밋밋한.

 고어 버빈스키의 <더 큐어>는 스릴러 영화가 갖는 기본적이고도 필수적인 요소를 갖추려고 하였다. 이를테면 미스터리를 쫓는 주인공. 이런 주인공에게 불구가 된 다리와 언어적으로 소외된 환경 등의 장애요소를 삽입하여, 관객은 제한된 정보로 인해 스릴을 느낀다. 작은 틈 사이로 조금씩 새어 나오는 실마리는 극의 주제를 향해 흘러들어간다. 여기서 버빈스키는 미스터리를 쫓는 주인공에게 장애요소를 입히는 것엔 성공했다. 한편, 스릴을 더하는 것에는 실패하였다. 늘어지는 내용 전개와 무의미한 장면의 삽입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달아오른 긴장감을 누그러뜨리는 데에 충분하였다. 장어는 무엇이며, 뽑은 이빨을 어느새 임플란트하질 않나, 슈퍼히어로 무비가 되질 않나 등등. 그랬다. 영상미를 얻기 위해 스릴러 영화가 포기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스릴러' 그 자체였다.


 그러나 영화 <더 큐어, a cure for wellness>는 그 자체로 정말 졸작인 것은 아니다. 기가 막힌 메시지 하나만으로 더큐어는 관객들을 의자에 앉히기에 충분했다.


우리 안엔 병이 숨어있네
역류한 담즙처럼 목구멍에 쓴맛을 남기는 병이
탁자에 둘러앉은 자네들도 마찬가지라네
치료법도 원인을 알아야 찾는 법이라네
(중략)
한 번 진실을 보게 된 사람이 진실을 다신 모른 척할 수는 없네.
한 번 눈을 뜬 장님이 다시 눈을 감을 수 없듯이 말이네.

 카톡으로 친구와 만날 약속을 정하고, 그 장소에 친구가 안 오면 바로 전화를 건다. 끊으면서 '우와 폰 없었으면 어쩔 뻔했지.' 어느 날 우리들은 폰을 사용하지 않기로 하였다. 하루 종일. 폰과 괴리된 편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누구도 날 찾지 않고, 나도 누구를 찾지 않고. 나는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퇴근길이 지루해 폰만 들여다보면 어느새 집에 닿았다면, 생각해보니 예전의 하굣길엔 재미난 것들이 정말 많았다. 폰 없이도 금세 집에 와 닿을 수 있었다. 쭈그려하는 오락기부터, 동네에 항상 떠돌아다니는 개, 앞집 할머니, 옆집 누나.

 <더 큐어>는 무심코 지나갈 수 있는 당연한 것들 대해 다시 주목할 것을 요청한다. 아무렇지 않게 하던 출근과 퇴근. 그 사이에 빽빽하게 시야를 가로막은 스트레스에 대해, 그리고 한편에 아주 한 구석에 박힌 통장잔고.

 늘어나는 통장잔고 숫자로만 버텨야 하는 수많은 시간들에, 우리는 너무나 많은 걸 내어주고 있다. 적어도 인생의 일부분을 포클레인으로 한 바가지 떠서 허공에 날려보고 있다. 원치 않는 일을 하면서 나의 생명의 일부를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어떡해, 남들 다 그렇게 살잖아라고 어른들은 격언처럼 말한다.

 그러기엔 남들 전부 그렇게 산다는 말로는 지워질 수 없는 '나'가 떡하니 있지 않나. 내가 남이면 '나'이겠냐는 거다. 적은 돈 몇 푼으로 생활하면서 술잔을 기울이던 대학교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주억거리기엔, 우린 늦지 않았다. 자동차를 버리고, 자전거로 산을 내려가는 록하트처럼.

 그렇다, <더 큐어, a cure for wellness>는 우리에게 웰빙에 대한 새로운 큐어(처방)를 내리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리메이크의 세 가지 모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