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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Apr 07. 2017

리메이크의 세 가지 모순

공각기동대:고스트 인 더 쉘 (2017)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 리뷰(1995) 참조


개봉 전부터 고스트 인 더 쉘(2017)은 말이 많았다. 화이트 워싱, 원작의 깊이를 담지 못할 것이다 등 쏟아지는 관심은 대부분 우려였다. 루퍼트 샌더스 감독의 고스트 인 더 쉘(2017)은 차라리 스칼렛 요한슨의 고스트 인 더 쉘(2017)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정도로, 감독의 예술적 깊이보다 배우의 캐스팅이 주목받은 영화였다. 그러면 루퍼트 샌더스의 공각기동대 : 고스트 인 더 쉘(2017)은 과연 어땠을까. 필자는 그것을 세 가지로 간추려서 설명하고자 한다.


 줄거리부터 살펴보면, 루퍼트 샌더스 감독은 원작인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 : 고스트 인 더 쉘(1995)의 줄거리를 따르지 않았다. 원작의 주인공, 소재, 장면 등은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줄거리는 원작을 따르지 않았다.

 루퍼트 샌더스의 공각기동대(2017)는 원작과는 달리 거대 자본과의 싸움을 그렸다. 모코토(메이저, 미나로도 불리는 스칼렛 요한슨 역)는 의체(로봇으로 된 몸)를 만드는 회사 한카 로보틱스의 만행에 의해 뇌만 남기고 강제로 사이보그로 변했다. 모든 기억을 잃은 모코토는 이제 정부기관인 섹션9에서 메이저로 불리며, 대테러 활동을 하는 군인이 되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강제로 심어진 테러에 대한 분노만이 그녀의 유일한 기억일 뿐. 그런 그녀의 대테러 활동이 활약할수록, 한카 로보틱스는 경제적 주가는 상승한다.  모코토는 대테러 활동 중 자신이 사실은 사고가 아니라, 한 기업에 의해 강제로 사이보그로 변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그녀는, 거대 자본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1.

 여기서, 루퍼트 샌더스는 원작에 있던 '자아실현' 모티브를 전혀 다른 '거대 자본과의 싸움'  모티브로 바꾸어놓았다. 물론, 고스트 인 더 쉘(2017)에서도 자아실현의 흔적이 조금씩 보인다. 과거를 기억해내려는 모토코의 모습이 조금조금씩 화면을 스치듯 지나가는 것이 그렇게 보일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 역시 거대 자본과의 싸움을 준비하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잘 기억나지 않은 과거를 떠오리려 하는 것이 어떻게 자아 실현과 맥을 같이할 수 있겠는가. 원작에서 섬세하게 표현되었던 '나'와 세계와의 경계는, 이제 루퍼트 샌더스가 높이 든 '거대 자본과의 싸움'이라는 무디고 굵은 붓에  지워지고 흐릿해진다. 빤질하게 남은 '거대 자본과의 싸움' 모티브는 고스트 인 더 쉘(2017)을 기존의 여타 히어로 무비 수준으로 이끌어 내린다. 거대 자본에 피해 입은 히어로와 거대 자본의 싸움은 이젠 실물이 날 정도이다.


2.

 주인공 모토코 역시 '거대 자본과의 싸움' 모티브가 무분별하게  휘젓는 붓질을 피할 순 없다. 이전 리뷰(링크)에도 언급했듯이, 원작 공각기동대(1995)는 주인공인 쿠사나기 소령(메이저)이 '나'를 벗고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섬세하고 문학적으로 그려냈다. 반면, 고스트 인 더 쉘(2017)의 모토코는 단순히 과거의 기억에 집착하는 개인으로만 비친다. 모토코가 과거를 기억해내려 하면서, 자의식을 분별하려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하지만 이 역시 과거의 '나'에 침잠하는 것일 뿐 그 이상이 아니다. 모토코는 이제 쿠사나기 소령과는 달리, 미래 시대의 기억을 잃은 여타 다른 조연들처럼 자신의 기억에 집착하는 개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다른 조연들보다 더 심한 사고(강제로 사이보그가 됨)를 겪었다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관객은 왜 하필 모토코의 시선에서 미래사회를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스칼렛 요한슨이어서?



3.

 여차저차, 조연 같은 모토코는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화려한 얼굴로 크레디트를 장식한다. 사이보그인냥 고개를 삐죽 내밀고 연기하는 스칼렛 요한슨이 무언가 어색하기도 하지만, 할리우드의 간판인 그녀의 얼굴이 보기 싫은 건 아니다. 하지만, 기억을 되찾고 미래를 혹은 다음 편을 기약하는 장면에서 모토코의 대사는 맥락에 전혀 맞지 않는다. 전혀.


우리는 우리의 기억이 아니라, 행동으로 정의된다.

이것은 무슨 헛소리인가. 이제껏 긴긴 시간 동안 모토코는 과거의 기억을 찾기 위해 달려온 것이 아닌가. 없어진 자신의 몸과 기억에 대한 합리화인지 모를 마지막 대사는, 오랜 시간 영화를 본 관객을 허탈케 한다. 아니, 그러면 왜 찾아 뛰어다닌 거야.


 루퍼트 샌더스가 원작 공각기동대(1995)에 반한 것은 이해할만하나, 원작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필요한 부분만 차용한 것에 대해서 가슴 속부터 분노가 일른다. '자아실현' 모티브에 대한 몰이해로 잃는 것은 단순히 줄거리만이 아니다. 주인공의 격을 조연과 다를 바 없는 수준으로 낮추었으며, 영화 끝에선 주인공이 영화 전체를 부정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어차피 항아리에서 엎질러진 물이어도 조금은, 아니 조금이라도 물을 아끼지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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