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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Mar 23. 2017

'나'를 벗어, 광야에 홀로 서기

세계관과 의미 - 공각기동대(1995)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공각기동대 : 고스트인더쉘 (2017)(해당 영화 리뷰로 링크)이 아닌,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1995)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음. (두 작품이 내용은 다르나, 세계관을 공유함)

지금 우리가 자신을 거울로 보듯 보이는 건 희미하도다.

 요즘엔 도무지 정신이라는 것을 어디에 두고 사는지 모르겠다. 집을 나와서 사무실 책상에 앉으면 늘 그래 왔던대로 일상적인 일을 한다. 일상적인 도중에도 가끔 비정형의 어떤 과업이 주어지는데, 그럼 잠깐 짜증이 났다가도,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평범해서 이내 일상에 젖어든다. 일상적이고 지루한 하루 일과에 몸을 푹 적시고 집에 돌아오면, 조금은 쉬어야 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쉰다는 것 역시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로 일상적이다. 영화를 본다던지, 책을 읽는다던지 등 그런 일상적인 '쉰다'의 것들. '나'라는 존재는 의식의 저편으로 도망가곤 한다. 나는 굳이 '나'라는 의식이 없이도 저절로 굴러가는 기계인 것도 같고. 그나마 쉰다는 느낌을 비로소 자각할 때는, 글을 쓸 때이다. 글쓰기가 일상에 담가진 나를 잠깐 건져 올려주는 기분이다. 건져 올려진 나는, 나를 흠뻑 적신 탕을 내려다보고는 놀란다. 이곳이 내가 있던 곳이었나. 내가 죽은 사람인지 산 사람인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늙어 죽어도 모르겠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1995)는 기업 네트워크가 지구를 뒤덮고 전자와 빛이 거리를 휘저어도 국가, 민족은 사라지지 않은 가까운 미래 정보 사회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그중에서도 공각기동대, 미래사회 군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극 중에 그려진 인류의 경계는 참으로 모호하다. 인류의 대부분이 몸의 일부를 기계 또는 컴퓨터에 기대고 있다, 심지어는 뇌까지도. 주인공인 쿠사나기 소령(메이져)은 온몸이 기계와 컴퓨터로 이루어진 '인간'이다. 뇌까지 컴퓨터로 이루어진 탓인지 '사이보그'로도 통한다. 이쯤 되면 인간의 정의조차 흔들린다. 심지어는 인간의 뇌마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부터 해킹을 당해 기억이 바뀌기도 하니.



 컴퓨터에 의해 바뀐 기억으로,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제대로 기억 못 하는 것이 사람인 것이다. 영화라서 가능한 일이라고 구석에 던져두려 해도, 그러기가 쉽지 않다. 자신의 이름도 기억 못 하는 치매 노인, 어머니 아버지도 분간이 안 되는 정신질환자, 기억상실증 환자 등등. 도처에 실제 사례는 널려있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전혀 기억 못 하는 과거를 오래된 친구들이 굳이 술자리에서 꺼내어도, 어린 시절의 나는 내 기억엔 없다. 그러면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포함하고 있는 존재인 걸까. 소중히 여겼던 누군가의 기억에서 내가 말끔히 지워진다면, 그 사람을 아낀 나는 존재했던 걸까. 나는 존재하는 걸까.


인간으로 분류되는, 쿠사나기 소령
 인간이 인간으로 살기 위해 많은 부품이 필요하듯이,
 자신이 자신답게 살려면 아주 많은 것이 필요하지.
 타인을 대하는 얼굴, 자연스러운 목소리, 어린 시절의 기억, '나'.
 (중략)
 그 모든 것이 '나'의 일부이며 '나'의 의식을 낳고 동시에 계속해서
 '나'를 어떤 한계로 제약하기도 하지.

순수한 컴퓨터 프로그램의 일종, '인형사'
 하나의 생명체로서 망명을 희망한다.
 인간의 DNA도 자기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불과해.
 생명은 정보의 흐름 속에서 생긴 결정체 같은 거지.
 인간은 유전자라는 기억 시스템을 통해 기억에 대해 개인이 되는 것뿐이야.
 기억이 환상이라 해도 인간은 기억으로 살아가는 거지. 컴퓨터가 기억을 조작할 때 인간은 그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했어야 해.

 쿠사나기 소령의 말마따나 나는 결국 '나'라는 존재에 갇혔거나 인간의 몸에 잠입한 인형사의 말마따나 나는 내 기억에 의존해 항상 '평소처럼', '상습적으로' 살고 있을 뿐인걸지도 모른다. 기억이 나면 나는 대로, 안 나면 안 나는 대로. 나는 이제 '나'로서, 저절로 살아지는 것인가. 그것이 '나'인가.


 한동안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었다. 술을 밤새 퍼마신다든지, 친구들과 오묘한 얘기로 밤을 지새운다든지, 여행을 간다든지, 잠을 불규칙적으로 자본다든지 평소에는 잘하지 않는 일이거나 기억에 남을 만한 일들. 내가 그런식으로 쌓은 시간들이 나를 보고 놀랠 만큼 행동해봤지만, 결국 돌아 돌아 돌아온 건 '나'였다. 내가 살아온 방식과 시간 그리고 기억에 갇힌 '나'였다. 평소와 크게 다른 행동을 해도, 귀결되는 것은 '나' 속에 갇힌 '나'에 지나지 않았다. 더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인공인 쿠사나기 소령은 그 점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던, 그 굴레에서 마침내 그녀는 결말을 찾는다. 그것은 컴퓨터 프로그램이면서도, 자신을 생명체라고 주장하는 '인형사'와의 융합이다.


인형사와 융합 후의 쿠사나기 소령
어릴 때는 말도 어린아이답게 생각도 어린아이답게 이해도 어린아이답게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면 어린 시절을 버리네. (고린도전서 13:11)

 융합 후의 쿠사나기 소령은 사뭇 다르게 보인다. 그녀 스스로 말하길 그러나,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고 한다. 그녀 안에는 쿠사나기 소령도, 인형사도 없다. 그녀는, 그는, 아니 그것은 '나'를 뛰어넘은 것이다. 어떤 존재로 제약되는 몸뚱아리나 정신 일체를 뛰어넘어, 그것은 광야 위에 선 것이다. 융합한 그것에게 그녀나 그가 살아온 삶과 기억, 정보 따윈 중요하지 않다. 오직 앞에 놓인 '네트'만이 중요하다. 네트, 그 광야만이.

지금 우리가 자신을 거울로 보듯 보이는 건 희미하도다. (고린도전서 13:12)

 나에게 너른 광야는 올 것인가. 서늘한 바람에 실려가고 싶은 듯이, 나뭇가지는 우짖었다. 머리맡까지 덮은 이불에는 다음 날이 그려지지 않았다. 태양도 피할 수 없는 굴레 아래, 좁은 방에서 내리는 물에 몸을 적시고, 1과 0이 교차하는 빛에  마른 눈을 혹사하였다. 다시 돌아와 차갑게 내리는 물에 다시 몸을 적신다. 그리고 이불을 덮는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도 변하는 것은 없다. 일상에 흠뻑 젖었고, 일탈이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일상은 일탈이 되었다. 광야에 서있을 쿠사나기 소령에겐, 나뭇가지도 이불도 태양도 물도 없다. 일상도, 일탈도. 광야뿐.


 잠시라도 일상에 젖은 몸을 닦아본다. 광야에서.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마태오복음 1:1)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마태오복음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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