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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Apr 11. 2017

우주는 간다

영화 <봄날은 간다 2001>, 허진호 감독, 이영애 유지태 주연

재밌는 얘기 좀 해봐요

 아무렇지 않게 재밌는 얘기를 시작할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어디든 뛰놀 수 있는 무대와 소주병의 초록빛이 무대를 밝혀주기만 하면 아무렇지 않게 나는 광대가 될 수 있었다. 어때요? 재밌어요? 재밌죠? 되물을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왕의 남자>의 공길이 만큼의 흥이 핏줄 가닥가닥에 흘러, 온몸이 날뛰고 있었던 때였다고 자부했다.


 재밌네

 부채 하나만 달랑 쥐고 외줄에 올랐었다. 그때는 그게 그리도 좋았나 보다. 줄을 튕겨 몸을 훽 돌리고, 거칠게 팔을 몇 번 흔들면 박수가 나오곤 했다. 이제는 굳이 팔을 흔들지 않아도 발은 외줄에 붙어있지만, 의미 없이 팔을 흔들어본다. 이어 박수가 나오니까.  놀란 척하는 내 표정은 아무것도 담지 못하고, 우쭐하는 궁궐 뒤의 산만 바라본다. 검은 눈동자는 궁궐 앞 어딘가의 빨간 옷을 입은 그나 그녀에게 있었으려나. 그래도 시선만은 궁궐 뒤로만 향한다. 뭐라도 있을 뒷산에. 은수(이영애가 연기한)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2.


 책방인지 도서관인지 모를 곳에서 우연히 마주한 그 사람의 눈엔 우주가 있었다. 들여다보면 사방이 캄캄해지고 우주복을 입은 나와 그 사람밖에 없는 것만 같았다. 지구에 돌아가고 싶으세요? 아니요. 여기가 좋아요. 여기가 좋았는데, 어둑한 공간이 차츰 밝아지면서 우주가 사라지고 있다. 우주는 막차를 타고 멀리멀리 간다 한다. 책방인지 도서관인지 모를 곳에서, 화가 난 지구가 책을 사정없이 떨어트렸다. 한 권을 밀고, 두 권을 밀고. 아무리 책을 떨어뜨려도 막차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쿠퍼 박사가 밀어낸 수많은 딸아이의 책들도 비할바가 아니었다. 지구에게 우주는.

 이윽고 우주 대신 남은 닭발들만 눈 앞에서 잔뜩 약을 올렸다. 너무 답답해서 터지는 속을 붙잡았다. 닭발을 앞에 두고 걸상이나 책상에 대해서 좀 아냐고 물어본 것도 같았다. 모르는지 아는지 모를 이상한 말만 잔뜩 늘어놓았다. 아니면 혹시 공에 대해서는 좀 아시냐고. 뭐 아는 것처럼 대충 말을 했다. 듣다 듣다 탁상공론을 댕강 자르고 급하게 택시를 잡았다. 어디로든 데려가 주라. 어디로든. 우주 어디로든. 이곳은 너무 숨이 막혀.



3.


사랑이 변하니

은수는 라면을 좋아했다. 비교적 최근에 유행한 "라면 먹고 갈래요?"는 은수가 만든 유행어이기도 했다. 그리고 반찬으론 아마도, 아니 확실히 닭발을 즐겼다. 닭발은 라면을 굉장히 잘 끓였으므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은수에게 상우(유지태가 연기한)는 닭발만한 사람이었다. 닭발은 우주를 담을 수 없다. 단지, 술자리에 잠깐 라면과 함께 등장해서 적적함을 달래줄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뼈 있는 닭발이든, 뼈 없는 닭발이든, 아니 그냥 곰장어든 뭐든 아무 상관없다. 그저 상우는 그런 사람이었다. 우주를 담을 수 없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상우가 스스로 알기로, 그가 담을 수 있는 건 소리뿐이었다. 사실, 소리조차 제대로 담을 수 없지만. 은수의 노랫소리를 담아도 은수를 담을 수 없는데.

 사랑이 변하냐고 소리를 질러봐도 돌아오는 건 침묵이었다. 사랑하긴 했니라고 악다구니를 써도 돌아오는 건 침묵이었다. 은수 입에서 어떤 소리가 나와야 상우의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을까. 은수의 말소리를 담은 대답이 어차피 은수의 마음을 담을 수 없는데.



4.


 텐트를 쳤다. 그곳엔 소리 말고 우주가 모이길 바랐다. 맑은 하늘에 거짓말처럼 비가 내려, 시야를 지워나갔다. 그리고 장어, 삼겹살, 목살 같은 게 밀릴 듯이 텐트에 모여들어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그래서 이름이 뭔데요. 그래서 몇 살인데요. 그래서, 그래서.

 답답해서 다시 오른손에 부채를 쥐고 다시 외줄에 올랐다. 저기 외줄에 서있는 이가 누구인가, 이름이 뭔가, 나이는 몇 인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저요? 중요한가요. 이름이요? 중요한가요. 나이요? 중요한가요. 우리가 지금 이 어둑한 밤이 어수룩하게 닭발로 남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하죠. 기왕이면 우주로 남게 해주세요. 우주로요.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은수와 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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