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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Feb 12. 2017

컨택트:시간을 넘어, '나'에게 닿기

영화 <컨택트 arrival>, 지나간 지나갈 너를 추모하며

1.

"왜 이리 화를 자주 내."


"나 화낸 적 없는데? 그냥 짜증낸 거지."


 다툴 때마다 누가 먼저 화냈는지는 대단한 관심사이다. 누군가가 먼저 불화의 씨를 던졌는가. 이건 연인 관계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불화를 항상 일으키는 사람은 관계있어서 마이너스이니까. 화를 누가 냈냐의 줄다리기에서 '화'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따지다가 다툼은 산으로 가곤 한다. 짜증내면 화인가, 소리를 안 지르면 화가 아닌가 등등의 복잡하고 다툼의 본질과 다른 이야기들. 결국 연인은 얼굴을 붉히고 뒤돌아 각자의 집으로 향한다. 집에 와 침대에 누우면 왜 싸웠더라, 생각하면 별 거 아닌 이유. 하지만 먼저 손을 내밀기엔 멋쩍은.

 그렇게 싸움은 이상하게 흘러간다. 왜일까. 언어라는 건 너무 복잡 미묘하다. 예를 들어, 아주 아름다운 풍경이 내 마음을 압도하여 나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느끼게끔 할 정도이다. 그 유럽의 피오르드나 연암 박지원 선생이 말하는 통곡할만한 자리 같이. 나는 그것을 온전히 다른 사람에게 언어로 전달할 방법이 없다. 표현이야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까. 이처럼 풍경조차 언어로 담기 어려운데, 보이지도 않는 사람 마음은 오죽할까. 어떤 것이 화인지 아닌지 따지기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언어를 다루는 사람도 모두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데, 사용하는 단어가 같다고해서 모두 한결같이 이해할 수 있을까.



 '무기를 사용하다.'

 다리를 일곱 개 가진 외계인이 한 달 동안 영어를 배워서 표현한 이 말의 의미는, 외계인의 뜻을 과연 잘 전달한 것일까. 수십 년 한 종류의 언어만 사용한 사람들도 애매한 언어의 의미 탓에 오해하고 다투는데. 언어는 사회의 약속이다. 이 안에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발화자의 뜻을 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람마다 약속된 의미를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언어는 말하는 사람의 생각을 제한하기도 한다. 언어는 불확실한 도구에도 불구하고 생각의 도구로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언어만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가 아프죠? 어떻게 아프죠라는  질문에 심장 언저리가 쿡쿡 정도의 말로는 내 아픔을 모두 표현할 수 없듯이.



2.

다른 언어를 공부하는 사람은 그 언어대로 생각한대요.

 제레미 레너가 연기한 이안 박사의 말은 인상적이다. 언어가 생각을 지배한다. 언어로 나를 다 담을 수 없지만, 언어가 나의 일부인 것은 사실이다. 영어공부에 열중하는 한국인이 영어로 꿈을 꾼다거나, 나아가서 청각장애인이 자막이 있는 꿈을 꾼다거나 시각장애인이 소리만 있는 꿈을 꾼다거나하는 모든 것은 언어가 나를 제어한다는 것이다. 언어의 형태가 소리든 글자든 무관하게 그렇다는 것이다. 이제 에이미 아담스가 연기한 뱅크스 박사가 겪는 일련의 현상은 일부 이해할 수 있다. 뱅크스는 헵타 포드와 언어교환을 하고, 이내 헵타포드의 언어를 이해한다. 글자라고 하기엔 우스운, 원으로 된 언어. 시작과 끝이 없는 언어, 시제가 없는 언어.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그런 언어를 이해한 뱅크스는 시작도 끝도 없이, 오늘 그리고 어제와 내일의 구분도 없이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어떻게보면 당연하다. 생각의 도구인 언어가 바뀌었으니 말이다. 지금인 것처럼 죽은 딸을 다시 만나고, 미래인 것처럼 죽은 딸의 어린 시절과 대화한다. 그렇게 뱅크스에게 내일과 어제의 구분의 희미하게 지워진다. 희미하게. 시작부의 '언어는 무의미하게 순서대로, 시간의 순서대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한다'라는 뱅크스 박사의 말은 정말이지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사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지루한 순서는 언어가 이미 만들어낸 결말일지 모른다.


 너는 내 곁을 떠났을까. 바짝 자른 짧은 머리로 창백한 얼굴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가쁜 숨을 토했던 넌.



3.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고, 미래의 뱅크스가 현재의 뱅크스를 뒤흔들 쯤이면 이제 영화는 행로를 벗어난 것만 같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 무슨 이야기를 말하려는 건지.

 뱅크스는 미래에서 실마리를 얻고, 과거에서 삶의 이유를 찾는다. 마치 미래나 과거가 일상의 현재인 것처럼 서랍을 꺼내어 그때 적었던 메모를 확인하듯 말이다. 보통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이라는 것이, 마치 기다란 줄에 작은 불씨가 도화선을 사르륵 타들어가 마침내 죽음이라는 폭탄에 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우리에게, 수천 알의 쌀알을 바닥에 뿌리듯 과거 현재 미래를 한 번에 뿌려버리는 뱅크스는 낯설다. 처음과 끝의 구분이 없는, 시제의 구분 따위는 없는 헵타포드의 언어 탓일까. 딸이 죽고 나서야, 처음 만난 이안(제레미 레너) 박사가 자신의 남편이고 딸의 아버지라고 인식하는 뱅크스는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인과가, 시간의 흐름이 맞아떨어지지 않는 줄거리에서 영화의 메시지는 정점을 찍는다. 딸을 낳고 그의 아버지를 처음 만난다? 그런 인과와 시간의 개념은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우린, '삶'을 통째로 살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메시지는 그것이다. 인과나 시간은 이미 저편, 헵타포드가 사는 별 어딘가의 쓰레기통에 있을 것이다. 나는 삶이라는 기나긴 도화선을 태우면서 남은 재를 도처에 버리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남은 삶 역시 단지 없어질 무언가가 아니다. 지나간 수많은 인연들 역시 그대로 '나'인 것이고 앞으로 만날 인연들 역시 '나'인 것이다. 지나간 사람들, 사랑했지만 이젠 볼 수 없는 사람들, 정말 서로를 아꼈지만 멀어진 사람들 모두 나의 과거에 살고 있고 나의 일부인 것이다. 아직도 지나간 그들을 생각하면 그때의 내가 떠오르듯, 그들이 과거에 살고 있으므로 나는 그 과거가 현재처럼 생생하다. 이는 곧 현재이다. 앞으로 만날 나의 누군가 역시 나에게 그러하다, 현재인 것이다. 그러면, 과거는 무엇이고 미래는 무엇이람. 나는 단지 '나'이고, 곧장 현재의 바로 그 '나'로 귀결될 뿐이다.



0.

https://youtu.be/zK7e-PedR1M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그래 오르기 전에

미소를 기억해두자


 정인이 부른  <오르막길>의 가사이다. 앞으로의 고된 여정을, 미래를 뻔히 알고도 서로에게 자신을 내맡긴다.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뻔히 알면서도.

 딸은 오래전에 죽었지만 항상 뱅크스의 안에 살아있다. 오늘이 태어난 날인 것처럼. 순간순간, 딸의 삶의 모든 단면들이 뱅크스에게 생생하게.

 뻔한 미래, 생생한 과거는 곧 현재이고 나인 것이다. 굳이 무엇이 먼저냐를 따지지 않아도 말이다. 뱅크스가 이안에게 고백하면서 과거인지 미래인지 모를, 힘든 고통을 떠올리는 장면은 가히 '나'로 살기이며 '사랑'하기라고. 삶은 고통의 바다라는데, 너에게 미래의 고통을 위로하고 과거의 고통을 공감한다고. 그렇게 우리는 모든 시간을 현재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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