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아무 영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올 Feb 25. 2017

싱글라이더가 주는 무기력

영화 <싱글라이더>

 '사실 그놈이 그놈이 아니었어.' 등과 같은 영화의 흔한 반전은 지루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왜 영화 <싱글라이더>는 나에게 불필요한 무기력을 가져다줬을까. 뻔하디 뻔한 반전인데 말이다. 어쩌면 싱글라이더의 경고는 뻔한 줄거리 중에 비수로 꽂혔는지도 모른다.


 줄곧 우리는 믿음을 이야기해왔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고, 종교든 사람이든 간에 믿지 않으면 이 세상에 남는 건 없다고 말이다. 세계 각지의 많고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가 꽂혀있는 세모난 집에 가는 것도 다 믿음이요, 남자는 턱시도 여자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파뿌리가 될 것을 약속하는 것도 다 믿음인 것이다. 그런데 싱글라이더는 외친다. 잠깐.


 2년간 아내를 호주로 보내고, 천진난만하게 순진무구하게 강재훈(이병헌이 연기한)은 아무 일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사실은 달랐다. 재훈이 믿어왔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아내는 호주의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고, 다른 삶을 꿈꾸고 있었다. 회사가 망해 갈 곳 잃은 재훈이 찾아간 호주에 그가 알던 아내 수진은 없었고, 크리스의 여자친구 수만 있었다. 재훈은 죽고 싶었을 것이다. 이젠 직장도 없는 그에게 돌아올 곳은 가족밖에 없었다. 그러나 돌아온 곳에 가족은 없었다. 집을 잃은 똥개처럼, 아니면 그림자처럼 재훈은 아내와 그 주변을 살핀다. 왜 자기는 집을 잃어야 했는지, 그림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알기 위해.

 재훈은 마침내 아내의 남자친구를 미행하여, 그의 아내를 마주한다. 병실에 누워있는 그녀는 이미 남편의 여자친구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한다. 그리곤,


아무것도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재훈과 같은 처지인 그녀는 단번에 자신의 처지를 인정한다. 병실에 누워서 자신의 남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본인의 처지를 단호하게도. 부정하면서 이곳저곳 누군가의 뒤를 쫓는 재훈과는 다르게 말이다.

 2년 동안 재훈이 키운 순진무구한 믿음 뒤에는 사실 숨은 그림자가 있던 것이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굳게 믿던 호주에는 다른 일이 있었다. 얼핏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고 단순한 애정문제로 갈음할 수도 있는 그렇지만 그러기엔 고독하고도 인간적인 일이.

 수진은 재훈의 아내이면서, 진우의 엄마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 남편에게 등 떠밀려 간 호주에서, 생면부지인 그곳에서 이방인 수진이 느꼈을 인간적인 고통을 '바람피웠다'라는 단순한 말로 갈음하여 때우기엔 부족하다. 아내 수진이 2년간 느꼈을 어떠한 고통에 대해, 재훈은 과연 무얼 보탤 수 있었을까. 2년간 전화통화와 생활비로 점철된 두 사람의 부부 관계에서, 재훈은 근거 없는 믿음이라는 시한폭탄만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바람을 피운 아내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게 아니다. 유죄와 무죄의 심판대를 건너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닿고 싶을 뿐이다. 결국 재훈은 끝내 그 인간에 닿는다.

 집에 와 외투를 벗으면서, 아 반전이 뻔한 영화라 가볍게 생각했다. 그리고 매일 앉던 의자에 앉았다. 나는 갑자기 급격한 무기력에 빠졌다. 매일같이 내가 믿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내가 믿는 사람들과 무형(無形)의 것들에 대해. 나는 혹시 시한폭탄을 달고 사는 것은 아닐까. 몸을 구석구석 훑어본다. 폭탄. 폭탄.

 아주 당연하면서도 내게는 익숙한 것들이 어쩌면 확신을 넘어 오만인 것은 아닐까 돌이켜 생각해봤다. 최선을 다하고 보상받을 것이라 기대한 일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진심은 통한다는 유치한 말을 되뇌면서 '열심'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삶이라 자부했건만. 지금 이 일이 행복한 내 미래를 과연 보장해줄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과연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깊어서 바닥이 보이지 않는 우물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시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우물 바닥에 두레박을 던지면 금세 철퍽하고 닿았던 것 같았다. 막상 던져보려니 두레박이 멈추질 않았다. 한없이 한없이 내려가다 지구를 관통할 것만 같았다. 내 두레박은, 결국 우주를 떠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컨택트:시간을 넘어, '나'에게 닿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