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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Mar 05. 2017

경칩 : 호접지몽과 개구리

우연은 필연이다.

옛날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나비들도 반가워하였다

편안하고 좋기는 하였지만

자신이 장주 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갑자기 꿈을 깨고서야

자신이 장주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주와 나비는 반드시 구별됨이 있거늘

이런 것을 물화(物化)라 이르는 것이다.

- 장자, 제물론편


 개구리가 겨울잠을 깬다는 경칩날, 문득 잠에서 깼다. 아빠가 거실에 소란스레 너스레를 떨고 있었던 탓에 개운치 않은 기상이었다. 어제 새벽, 술을 진탕 마셨는지 분위기를 한껏 들이켰는지 무언가에 취해서 거리를 빙빙 돌았던 것 같다. 영어로 대화하기도 했었던 것 같고 불어로 인사를 했었던 것도 같다. 나는 어쩌면 프랑스 사람일지도 몰라 가볍게 착각을 하고 한라산 소주를 몇 번 털어 넣었다. 여기는 제주도인가.

 

우연은 필연이다.

 무슨 개소린지 모를 화두. 불어보다 어려운 한국말에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다 결국엔 '모여봐' 한 마디로 모두 일단락되었던 것도 같다.


그러니까 그런 게 팔자라는 말로 갈음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흔히 글을 좀 쓴다는 사람은 운명이라는 말이 밉다. '운명'으로 쉽게 갈음되는 필연이라는 거센 물살이 얄궂기만 하다. 어떤 말로 풀어보려, 펜을 들어 물살을 연어처럼 거스를 수라도 있는지 하나하나 떼어서 곱씹고 곱씹어도 얄궂은 필연은 통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필연도 이런 사람이 얄궂으려나. 팔자라는 말은 그래서인지 왠지 무겁게만 느껴진다. '팔자려니 해'하고 대충 넘기려는 어른들의 못미더운 너스레 탓일까. 이처럼 어른들이 역사인냥 반복해온, 운명에 당연하게도 무너지는 순응은 젊은이들에겐 다소 가혹한 처사일 수도.


그게 알고리즘 같은 게 있다는 거지.

 뭐 어떻게 이해하려고 해도 쉽게 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앞 뒤가 안 맞는 것을 단박에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기도하지만. 우연이 필연의 반대말인데 우연이 필연이라니. 엄마는 아빠다. 아빠는 엄마다. 얼핏 이 정도의 궤변인가도 싶다. 궤변의 무례한 말장난에서 벗어나려 사전이라도 찾아본다. 벗어날 수 없겠지만.

 일례로, 연민의 감정에 휩싸여있었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연민을 사전에 찾아보았다.


 1.연민 : 불쌍하고 가엾게 여김

  2.불쌍하다 : 처지나 형편이 어려워 애처롭다.

  2.가엾다 : 딱 하고 불쌍하다.

    3. 애처롭다 : 처한 상황 따위가 슬프고 처량하여 가엾고 불쌍한 데가 있다

    3. 딱하다 : 애처롭고 가엾다.

 4. 불쌍하다, 가엾다.

 = 2.


 날 휘감고 있던 이 불쾌한 기분이 연민이라고 생각해서 시작한 작업은 불쌍하다를 거쳐 다시 불쌍하다로 되돌아왔다. 결국 불쌍하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내려 해도 알 수 없었다. 불쌍하다는 애처로운 것이고 애처로운 것은 불쌍한 데가 있다는 것인데, 다시 불쌍하다는 것은 불쌍하다는 것이므로 나는 불쌍하다는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끝내 이 감정에 대해서 나는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언어라는 것은 이토록 모호하였다. 언어가 지칭하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데, 표현된 언어는 다시 언어로 설명될 수밖에 없었다. 언어는 '의미하는 것'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만 할 뿐 절대 착륙하는 일이 없었다.

 우연은 필연이다 같은 것도 그렇다. 배회하는 언어의 헬리콥터는 절대 진리에 착륙하는 일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시끄럽고 복잡한 헬리콥터 안에서 '의미하는 바'가 살아 숨 쉬는 땅을 관찰할 뿐이다. 사전에 적힌 대로, 우연은 뜻하지 않게 일어난 일이고 필연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있는 일이다.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 반드시 그렇게 되어있는 일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수많은 일들이 결국엔 뜻하지 않게 일어났지만, 일어났다는 관점에서 그 일 모두는 필연적이었다고 생각하면 될까. 그렇게 단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여기서 '우연은 필연이다'는 좀 더 섬세한 관찰을 요구한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연남동을 거닐었다. 우리말고도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우리도 그에 뒤지지 않았다. 분위기가 좋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웃고를 반복했다.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머리를 맞대고 실실 대기도 했다. 언제부터 우리가 친구였는지도 모르게, 아니 전생부터 친구였던 것처럼 모든 걸 잊었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이유로 알게 돼서 이 자리에 술잔을 가득 채우고, 그 공간을 웃음으로 메우게 되었는지는 이미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다가 마시다가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날 때쯤, 언젠가 했던 얘기가 슬쩍 머리에 쉼표를 찍고는 어려운 마침표를 내놓지 않았다. 우연은 필연이라는데, 글쎄 참 어려운 말이다. 생각은 한발짝 더 나아가서, 이렇게 좋은 우리가 우리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단지 우연의 결합에 불과한 걸까. 괜한 생각에 놀란 가슴 쓸어내린다. 이윽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 한 잔 더 한 잔 더를 외친다. 그렇게 술을 먹다 보면 아주 이것들이 재잘대는 것이 내 새끼들 같기도하고, 꼭 개구리 같기도 하다. 개굴개굴. 그리고 눈을 떠보니, 오늘은 동면을 하던 개구리가 깨는 경칩이란다. 아빠는 거실에서 너스레를 떨고 있었고, 나는 우연인지 다행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개구리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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