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시간이 어디에 붙고, 어디로 가는지 도대체 알 길이 없다. 내가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더라 생각해보면 자연스럽게 몸을 흘려보내 이 공간을 내 몸으로 메우고 있었다. 그 과정을 굳이 되새겨 보면 머리가 아플 것이다. 아플 것이라 일찌감치 단념하고 내가 채운 이 공간에서 상습적으로 하던 일을 한다. 상습적으로 밥을 먹는다든지, 상습적으로 일을 한다든지, 상습적으로 펜을 들고 무언가를 적는다든지. 그렇게 상습적으로 무언가 ‘자연스럽게’ 하는 것에 익숙해있다가 다시 시간을 찾는다. 그러니까, 오늘이 몇 년 몇 월 며칠이더라. 떠올려보면 나는 어느새 이렇게 자라 있다. 내가 아는 나는 분명 학교를 마치고 와서 엄마가 허락하는 시간의 컴퓨터 게임에 아쉬워하고 시스템 종료를 누르던 초등학생이었다. 나는 그때와 전혀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직도 무언가를 마치고 오면 컴퓨터를 켜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누군가 그것을 말린다면, 아쉬운 채 노트북 대가리를 접어버릴 뿐이다. 달라진 것은 내게 말릴 사람이 딱히 없다는 것과 내 몸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의 시간적 좌표의 숫자가 꽤나 늘었다는 것이다. 아 내가 벌써. 하고 한숨을 푹 쉬어봐도 달라지는 건 없다. 내가 그 어릴 적보다 더 많은 걸 이뤘다거나 대단히 성실해진 것도 딱히 아니다. 나는 그 시절, 코흘리개 그때부터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살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사실 우스운 일이다. 자연스러운 것을 다시 되새겨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쩌면 살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살고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살아진다는 표현이 맞겠다. 아니면 이미 죽었거나. 영화 <컨택트>에서 나온 시간 개념은 이런걸까. 또는 '우연은 필연이다'라는 격언이 시간적 의미는 이런 것일지도.
어렸을 때는 운명이라는 말이 정말 싫었다.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정해지는 수많은 것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져 있었던 수많은 것부터 내가 살면서 만나게 될 사람과 수많은 일이 정해진 것이라니. 그것만큼 끔찍한 것이 또 있나 싶었다. 뭐, 태어나기 전의 일이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내 인생을 내가 개척해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자연스럽게’ 살아지는 나를 보면 운명이라는 말의 감칠맛이 느껴진다. 단순히 운명이란 그저 ‘자연스럽게’ 살아지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나는 정말 운명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릴 적부터 온 몸으로 거부했던 그것을 내가 온몸으로 겪어내고 있다. 내가 곧 운명이라는 듯이.
음, 아니야. 아니야. 고개 저으며 운명이라는 자연스러움에 반항해본다. 책상에 앉고 책을 편다. 마지막 수단이라는 공부라는 것을 조금 하다가 다시 덮고 운명을 생각한다. 혹은 책 속의 어려운 문제를 직면하고 운명을 곱씹어본다.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좋다는데, 자연스러운 것은 운명에 굴복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단 기대를 잠깐 하지만. 그래도 자연스러운 것을 거스르기란 어쩌면 불가능할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