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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니가 21세기 피카소로 불리는 이유

by 와이아트


데이비드 호크니에 대해 몰랐던 이야기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산중턱의 옥외 수영장. 핑크빛 재킷을 입은 한 남성이 평영을 하고 있는 누군가를 내려다보고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1937-)의 <예술가의 초상(수영장의 두 인물)>이라는 작품이다. 2018년 11월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9,030만 달러(약 1,265억 원)에 낙찰되며 당시 생존 작가 작품 중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다.


4000.png 데이비드 호크니, <예술가의 초상(수영장의 두 인물)>, 1972. ⓒDavid Hockney


수영장 밖에 서 있는 사람이 호크니 본인, 그리고 수영을 하고 있는 사람은 호크니의 전 연인인 미국 화가 피터 슐레진저(Peter Schlesinger)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슐레진저 본인이 아닌 그의 새 연인이라는 설도 있었다. 큐레이터 이안 알티비어는 “이 작품에는 관계가 종료된 연인에 대한 묘한 감정이 뒤섞인 작가의 작별인사가 담겨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1960년대부터 이미 명성을 누리며 동시대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준 데이비드 호크니는 ‘21세기 피카소’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피카소’라는 이름은 ‘위대한 예술가’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호크니는 실제로 피카소에게 큰 영감을 받아 그의 입체주의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냈기 때문에 이러한 별칭이 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호크니와 피카소의 연관성에 초점을 맞춰 그의 삶과 예술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한다.



호크니 & 피카소


영국 요크셔 지방에서 출생한 호크니는 1959년에 런던 왕립예술학교에 입학했다. 둥근 안경과 이마를 덮는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던 그는 학창 시절부터 독특한 외형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R1280x0.jpeg 젊은 시절의 데이비드 호크니 ⓒDavid Hockney


호크니는 예술학교 재학 시절부터 피카소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 피카소의 전시를 반복해서 관람했고, 그에게 완전히 매료됐다. 그는 피카소에게 영향을 받아 무릇 예술가라면 한 가지 방법만을 가지고 틀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동시에 여러 가지 표현 방식을 탐색해야 한다는 예술관을 갖게 된다.


호크니는 피카소 못지않게 ‘입체주의(Cubism)’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입체주의는 전통 회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형성을 추구하는 전위적인 예술 사조로 읽혔기 때문이다. 호크니는 이후 피카소의 입체주의를 새롭게 해석해 드로잉와 유화, 포토콜라주에 적용시킨다.


* 잠깐! 입체주의(Cubism)란?

: ‘입체주의’는 사물의 여러 방향에서 본 모습을 한 화면에 담아내는 혁신적인 화법으로, 대상이 파편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특징이 있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이 용어를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입체주의는 크게 분석적 입체주의와 종합적 입체주의로 나뉜다. 먼저 분석적 입체주의는 피카소의 작품보다는 조르주 브라크의 작품에서 나타나는데, 그는 일상의 여러 물체들을 소재로 삼아 소재들의 윤곽선을 깨뜨리는 기법을 선보였다.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파악한다는 것은 대상을 여러 각도로 해부한다는 말과도 같다. 종합적 입체주의에서는 사물 자체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서로 다른 대상을 도입하는 콜라주가 나타난다.


image-2020-03-09T123556.962.png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1907.


입체주의가 나오게 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근법’에 대해 간단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르네상스 이래 지속되어 온 미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고전적 규범을 실천해 오고 있었는데, ‘원근법’은 자연을 가장 잘 재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원근법은 한 마디로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평면에 묘사하는 방식이다. 가까운 것은 선명하고 크게, 먼 것은 흐리고 작게 그리는 기법이다. 원근법에서 중요한 것은 ‘소실점’이다. 평행한 두 선이 우리로부터 멀어지면 수평선상의 한 점에서 만나는데, 이때 만나는 점을 ‘소실점’이라고 한다. 화가들은 소실점을 중심으로 하는 원근법을 사용해 자연을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해낸다.


* 잠깐! 원근법(Perspective)이란?

: 원근법은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는 시각 양식이다. 르네상스는 ‘신’에서 ‘인간’ 중심으로 사고가 바뀌는 지적 흐름인 만큼 원근법은 인간적인 시각의 확립을 의미한다. 원근법은 이전에도 여러 방식으로 실험되었지만, 체계화된 것은 르네상스 시대 알베르티에 의해서이다. 그는 대상과 눈을 연결하는 직선에 의해 원근법이 산출되고, 크기와 형태는 상대의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원근법은 회화와 보는 이와의 공간 관계를 설정하면서 자연을 재현하는 고전적인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오랜 기간 서양미술을 지배해온 원근법은 인간이 시각을 정복하려는 욕구와 무관하지 않다. 눈앞에 보이는 세계를 사각형의 틀 안에 묘사함으로써 세계를 재현하려는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원근법은 현대미술가들에 의해 비판적으로 다뤄지면서 ‘다시점’ 회화로 이어진다. 가령 폴 세잔의 시각에서 대상들은 모두 납작한 입방체 형태로 화면에 존재하고, 피카소는 입체주의를 통해 대상을 다양한 방면에서 재구성했다.


11257401.jpg 데이비드 호크니, Pearblossom Hwy., 11-18th April 1986, #2, 1986. ⓒDavid Hockney


호크니에게 피카소의 입체주의는 새로운 조형성이자 평생 붙잡고 있어야 할 과제로 다가왔다. 당시 피카소는 전통적인 회화와는 전혀 다른 조형적 접근을 하면서 현대미술의 등장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호크니는 피카소의 입체주의 미학이 시도하는 새로운 예술이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고 다양한 예술적 실험을 거듭하게 된다.




1973년 피카소가 작고한 이후, 호크니는 피카소에 대한 경의를 표현하는 작품을 다수 제작한다. 먼저 <학생: 피카소에 대한 경의>는 피카소에게 드로잉을 검사 받기 위해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가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했다. 피카소는 젊은 시절의 모습인데, 자신은 나이든 학생으로 표현한 부분이 재미있다.


데이비드 호크니, <학생: 피카소에 대한 경의(The Student-Homage to Picasso)>, 1973. ⓒDavid Hockney


다음으로 <화가와 모델>은 피카소 앞에 나체로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호크니의 겸손한 자세에서 피카소에 대한 경외심을 엿볼 수 있다. 피카소 쪽으로 내민 왼손의 동작을 통해 그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열망도 느낄 수 있다. 호크니는 피카소를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 작품을 통해 그와의 만남을 상상해본 듯하다.


데이비드 호크니, <화가와 모델(Artist and Model)>, 1973-1974. ⓒDavid Hockney



호크니의 입체주의 실험


피카소의 모습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작품 외에도 입체주의를 실험한 작업들이 눈에 띈다. 먼저 호크니가 1976년부터 제작한 <푸른 기타> 연작은 피카소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모티프를 발전시켜 새로운 조형적 형상을 발견했다는 의의를 지닌다. 피카소의 <늙은 기타리스트>를 주요한 모티프로 삼은 이 판화에는 하나의 화면에 다양한 시점이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입체주의 화가들이 형상을 쪼개 파편화시킨 것처럼, 호크니는 관습적인 재현에서 벗어나 새로운 상상적 공간을 구현해낸다.


Old_guitarist_chicago-side.jpg (좌) 파블로 피카소, <늙은 기타리스트>, 1903-1904. (우) 데이비드 호크니, <늙은 기타리스트(푸른 기타로부터)>, 1976-1977.


<푸른 기타와 함께 있는 자화상> 또한 피카소의 영향이 나타나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작업실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튤립 화병과 그림 도구들인 놓인 공간 속에는 피카소가 즐겨 그렸던 프랑스의 사진가 도라 마(Dora Maar)의 두상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자화상은 화가 자신이 거울로 스스로를 바라보는 형태로 그려지곤 하는데, 이 작품은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점으로 표현되어 있다.


Portrait_of_Dora_Maar-side.jpg 파블로 피카소, <도라 마의 초상>, 1937. (우) 데이비드 호크니, <푸른 기타와 함께 있는 자화상>, 1977.




피카소의 영향은 1980년대 드로잉에서도 나타난다. 영상 작품이 아닌 이상 사실 2차원의 회화에서는 ‘움직임’을 묘사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호크니는 인물이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연속적인 드로잉을 통해 움직임을 표현했다. 그는 <읽으면서 마시고 있는 데이비드 그레이브스>라는 작품에서 크로키처럼 빠른 선을 사용해 관람자가 그림에서 스토리를 읽을 수 있게 했다.


스크린샷 2022-11-07 오후 8.18.05.png 데이비드 호크니, <읽으면서 마시고 있는 데이비드 그레이브스(David Graves Reading and Drinking)>, 1983. ⓒDavid Hockney


회화에 스토리를 얹는 방식은 피카소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피카소가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얼굴의 다양성을 표현한 것처럼, 호크니 또한 시간에 따른 움직임과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표정 변화를 화면에 담아낸 것이다.



나는 많은 시간 동안 피카소가 그렸던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연구했다. 그러나 사실상 피카소처럼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피카소의 방법이 더 진실하다고 생각해서 그와 같은 이치로 행하려 했다.
- 데이비드 호크니




호크니의 포토콜라주


호크니의 피카소에 대한 열정은 그의 예술세계 전반에 걸쳐 나타나지만, 피카소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지는 때는 1980년대 ‘포토콜라주’ 작업 시기로 볼 수 있다. 포토콜라주는 여러 장의 사진들을 결합하여 다양한 시점을 표현한 호크니만의 예술 기법이다. 처음에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사용해 ‘폴라로이드 콜라주’를 제작했고, 이 작업은 스냅사진을 이용한 ‘포토콜라주’로 전환된다.


호크니는 피카소가 인간의 신체를 주제로 삼아 특수한 앵글로 비틀어 표현한 기법에서 영향을 받아 이것을 자신만의 예술적 방법으로 재창조해낸다. 호크니의 <셀리아>라는 작품은 피카소의 <붉은 팔걸이 의자>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두 개의 눈, 두 개의 코, 두 개의 입을 지니고 있다. 정면과 옆모습이 동시에 나타난다는 점도 같다. 물론 외형적으로 비슷함을 추구하려는 것은 아니었고, 피카소의 ‘회화’에서 표현하지 못했던 순간적인 시간의 흐름들을 ‘사진’과 ‘콜라주’를 통해 담아내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femme-assise-dans-un-fauteuil-rouge-side.jpg (좌) 파블로 피카소, <붉은 팔걸이 의자(Red Armchiar)>, 1931. (우) 데이비드 호크니, <셀리아(Celia)>, 1982. ⓒDavid Hockney


만일 화면에 세 개의 코가 있다면 인물이 세 개의 코를 가진 것이 아니며, 그 코가 세 가지 측면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코를 세 번 보았을 때 그와 같이 보였다.
- 데이비드 호크니



호크니는 포토콜라주 연작을 통해 큐비즘이 시도한 화면 분할을 사진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여러 장의 사진 조각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하나의 시점이 아닌 ‘복수시점’을 구현한다. 호크니는 이러한 복수시점을 통해 관람자가 원근법 작품에서 느꼈던 시점과는 확연하게 다른 시선을 제공하고 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차원의 시각을 표현하고,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W1siZiIsIjE1MTI2OCJdLFsicCIsImNvbnZlcnQiLCItcXVhbGl0eSA5MCAtcmVzaXplIDIwMDB4MTQ0MFx1MDAzZSJdXQ-side.jpg (좌) 파블로 피카소, <바이올린과 포도>, 1912. (우) 데이비드 호크니, <노란 기타가 있는 정물>, 1982. ⓒDavid Hockney


다음으로, 호크니의 <정물-푸른 기타>와 <노란 기타가 있는 정물>은 피카소의 <바이올린과 포도>를 떠올리게 만든다. <정물-푸른 기타>에는 담배 캔, 과일, 꽃, 기타가, <노란 기타가 있는 정물>에는 기타, 신문, 과일 등이 등장하는데, 이는 모두 피카소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물들과 유사하다. <정물-푸른 기타>에는 “HALF AND HALF”와 같은 문구도 얼핏 보이며, 피카소가 화면에서 재현과 환영을 지워버리듯이 호크니 또한 실제 신문 사진을 콜라주함으로써 전통적인 재현의 방식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528248.jpg 데이비드 호크니, <정물-푸른 기타(Still Life-Blue Guitar)>, 1982. ⓒDavid Hockney


호크니가 피카소의 작품을 외형적으로 흉내 내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호크니는 피카소가 추구한 새로운 시각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이루어내고자 했다. 그는 특정 순간의 장면들을 사진으로 찍고, 각 사진에 포함된 다양한 시점과 시간을 경험하도록 만든다. <그레고리>라는 작품을 보면 한쪽을 응시했을 때는 볼 수 없는 다른 쪽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관람자를 시간의 흐름 속에 놓아둠으로써 정지된 시간을 극복하게 만든 것이다.


Hockney_Gregory_LA_March_31_CP-055.jpg 데이비드 호크니, <그레고리>, 1982. ⓒDavid Hockney


호크니가 이처럼 피카소와 입체주의에 몰입했던 이유는 입체주의가 시도했던 원근법의 환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호크니는 화면에 ‘시간’이라는 개념을 포함하려는 시도를 했는데, 피카소가 여기에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준 것이다. 화면에는 하나의 시점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점이 동시에 드러나며, 이는 인간 시각의 다양성을 의미한다. 하나의 순간만을 포착해 담아내지 않고 시간의 변화에 따른 다양한 시점을 포함함으로써 관람자가 지니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입체주의는 직관적인 지성으로써 시각적인 분석을 했다.
- 데이비드 호크니



호크니가 구성하는 화면에서 관람자들은 흘러가는 시간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실제 인간의 시각은 어느 한 시점에 머물러있지 않다. 호크니는 인간의 직관적인 시각을 다시점으로 표현함으로써 원근법에 한정되었던 지금까지의 시공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지속했다. 호크니가 기존의 시공간 개념에서 변혁을 시도할 수 있도록 영감을 준 것은 단연 피카소와 입체주의였다. 그는 피카소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어 원근법에 의해 영원히 멈추어진 상태로 존재하는 정지된 시간을 극복하고, 관람자를 움직임으로 이끌어냈다. 호크니는 원근법이 만들어낸 환영이 실재가 아님을 밝히고, 원근법에서 벗어나면서도 새로운 공간감을 느낄 수 있도록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21세기의 피카소’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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