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주목하는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 작가들
일주일 안에 친해지는 현대미술 (일요일)
요즘에야 한국미술과 서구미술이 동시대적으로 발생하지만, 20세기 초반만 해도 이 둘은 큰 차이가 있었다. 서구의 현대미술은 19세기 후반 인상주의나 입체주의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며, 한국의 현대미술은 빨라도 1930년대로 기점을 잡을 수 있다.
하지만 보다 본격적으로 모더니즘 미술이 등장한 것은 1957년 전후이다. 이때 한국 미술계에는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 경향이 나타나면서 본격적으로 현대의 미술이 시작되었다.
6·25전쟁이 휴전된 것이 1953년 7월 27일이니까 1953년부터 1956년까지 약 3년 간은 사실상 ‘복구’의 시기였다. 여기서 복구는 폐허가 된 도시에서의 복구이기도 하지만,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창작 욕구의 재기도 포함된다.
복구의 시기가 지나자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무엇보다도 의식의 변혁이 두드러졌는데, 본래 미술이 가지고 있던 창조적 정신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1957년 한 해 동안 무려 5개의 미술단체가 출범했다는 사실만 봐도 커다란 변화의 시기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전의 미술단체들이 같은 학교 출신들끼리 모이는 친목단체 느낌이었다면, 1957년에 등장한 단체는 조형이념에 따른 것이었다. 다섯 개의 단체는 모던아트협회, 현대미술가협회, 창작미술가협회, 신조형파, 백양회였다.
“작년 가을부터 화단의 질서와 방향을 새롭게 진전시키고자 각성한 작가들에 의해서 몇몇 그룹이 형성되었다. 그룹을 통해서 과제를 내세우고 아울러 행동이념을 통해서 작가의식을 드높이는 그 일이 화단의 현황과 한국미술에 있어서의 현대적 의의를 밝히는 데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문제는 거듭 말할 필요도 없다.”
- 김영주·화가
다섯 개의 단체 중 오늘의 이야기는 ‘현대미술가협회’로부터 시작한다. 현대미술가협회는 애초에 제도권에 편입되지 못한 채 재야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신예작가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단체이다. 이들은 ‘구상’ 계열의 작품을 중심으로 하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와는 내용상, 형식상으로 구별되는 미술을 암중모색하면서 등장했다.
이들은 단체전으로 작품을 발표하면서 ‘앵포르멜’ 미술에 점점 다가서게 된다. 당시 미술비평가 이경성은 이들을 가리켜 “미의 전위부대”라고 표현하기도 한 만큼, 이들이 발표한 앵포르멜 미술은 상당히 전위적이고 현대적인 것이었다.
앵포르멜은 전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뜨거운 추상’을 뜻한다.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추상표현주의가 뜨거운 추상의 한 축이라면, 프랑스의 앵포르멜이 또 하나의 축을 형성한다.
앵포르멜은 비정형(Informal)을 뜻하는 불어로, 프랑스 앵포르멜 운동의 창시자이기도 한 미술평론가 미셀 타피에(Michel Tapié)가 까미유 브리엥(Camille Bryen)의 작업을 규정하기 위해 1950년도에 창안한 용어이다. 당시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근본적인 허무감과 좌절감이 팽배해 있던 상황에서 자발성과 형태의 자유로움, 그리고 실존적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위 그림을 보면 몬드리안의 ‘차가운 추상’ 같은 그림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기하학적 패턴을 가진 추상보다는 예술가의 사고와 감정을 표현하는 미술을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그 주도적인 흐름으로 나타난 것이 앵포르멜이었다.
앵포르멜 미술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또 다른 작가는 장 뒤뷔페(Jean Dubuffet)이다. 다소 서툰 기교로 형상을 제작하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그의 그림은 ‘아르 브뤼(Art Brut)’라고 불릴 만큼 원시적이고 가공되지 않은 근원적인 미술을 표현한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와 프랑스의 앵포르멜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구조적인 조형에 반대하며 대형 화면에 격렬한 붓 터치를 사용하고 강렬한 색채로 두꺼운 텍스처를 강조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 두 운동을 구별하지 않은 채 현대미술가협회를 중심으로 앵포르멜 미술 담론이 형성되어간 것이다. 현대미술가협회 회원들이 선보인 앵포르멜을 한국 현대미술의 기점이라고 보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국의 현대미술가 중 많은 인지도를 갖고 있던 박서보는 ‘단색화’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뒤에 ‘단색화’ 파트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그는 앵포르멜 운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작가이다. 한 명의 화가가 이렇게 여러 미술사조에 두루 걸쳐있다는 점은 참으로 대단한 점이 아닐 수 없다. 박서보는 현대미술가협회의 단체전인 《제3회 현대전》에서 <회화 No.1>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최초의 앵포르멜 회화’로 일컬어지며,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부여받고 있다.
“탈이미지 또는 탈표현을 강조하는 까닭은 행위의 무목적성을 통해 행위 그 자체에 살고자 함이며 이 무위순수한 행위 속에서 나는 크나큰 해방감을 맛보고자 함이다.”
- 박서보·화가
박서보는 앵포르멜을 “새로운 모험에의 치솟는 의욕이 일체의 이론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창조적 에너지”라고 표현했다. 즉, 감성 충동이나 격렬한 행위를 두터운 질료로 표현한 것이다.
당시 박서보의 작품과 함께 출품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병재의 <노점> 또한 선, 면, 형태를 거부하는 비형상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이 시기 앵포르멜 작품들은 마크 로스코와 잭슨 폴록, 이브 클라인 등 서구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국의 화가들은 미국과 일본의 미술잡지를 통해 서구의 경향들을 잘 알고 있었고, 자료에서 보았던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의 다양한 양식을 조합해 시도해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전시를 본 비평가들은 젊은 열정에 응원에 보내면서도 외래 사조를 자기화하지 못한 미숙함을 지적하고 있다.
한국 작가들에게 서구의 앵포르멜을 소개하고 작업 방향을 제시한 비평가로 방근택을 들 수 있다. 방근택은 1958년 2월 연합신문에 실린 「화성(畵聖) 조르주 루오의 생애와 예술」이라는 기사로 미술평단에 등단한 이후, 앵포르멜 이론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만약 방근택이라는 비평가가 없었다면 한국의 앵포르멜이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미국 잡지 등을 참고하여 박서보를 비롯한 화가들에게 소개하였으며, 현대미술가협회 회원들을 본격적인 앵포르멜 회화의 길로 이끌었다.
현대미술가협회가 막을 내린 뒤에도 앵포르멜의 열기는 계속 되었다. 1960년대를 이끌었던 앵포르멜 2세대는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다. 1950년대 앵포르멜 작품들이 액션페인팅의 느낌을 주었다면, 1960년대는 정적이고 내면화된 마티에르나 색면이 주는 효과에 관심을 둔 작업이 주를 이루었다. 50년대의 작품들보다 좀더 앵포르멜 미학을 자기화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앵포르멜 1세대가 현대미술가협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면, 앵포르멜 2세대는 ‘벽’ 동인, ‘60년미술가협회’가 주축이 되어 작품을 선보였다. 먼저 ‘벽’ 동인은 덕수궁 서쪽인 정동 골목길에서 전시회를 열면서 다음과 같은 취지문을 내걸었다.
“「벽」 동인전의 첫 전시회에서 우리들은 가능한 한 모든 불필요한 형식과 시설을 거세해 버렸다. 여기에 전시될 작품은 그대로 우리들의 동체요, 사상이요, 피요, 그밖에 모든 것이다. 우리들은 벌거벗은 몸뚱이 그대로 차단된 벽 앞에 서 있다.”
취지문을 보면 4·19혁명이라는 당시 사회 분위기와 잘 연결돼 보인다. 국전을 겨냥하여 국전과 같은 기간에 개최한 것과, 기존 공간을 무시하고 굳이 거리 전시를 택했다는 점은 기성미술에 대한 저항으로도 볼 수 있다.
국전의 출품작들이 캔버스 100호 정도의 사이즈였다면, ‘벽’ 동인들은 500~600호의 대형 작품을 출품하여 크기 면에서도 차이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작품의 형식과 내용적 측면에서도 실험적인 작품들이 대거 등장했다. 쇳조각, 콘크리트, 자갈과 모래 등이 캔버스 위에 등장하는 등 추상표현주의를 수용하면서도 과감한 시도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시기 활동한 60년미술가협회는 서울대와 홍익대를 갓 졸업한 이들로 구성된 단체였는데, 덕수궁 돌담길에서 《60년전》을 개최하면서 새로움을 보여주었다. 당시 참여 회원은 12명으로, 국전을 포함한 기성세대와의 단절과 혁명을 부르짖으며 재야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이들의 작품은 강렬한 원색과 검정색을 주요색으로 하는 격렬한 붓놀림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앵포르멜 1세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이처럼 앵포르멜은 2세대를 통해 더욱 자리잡아 갔으며, 1961년에는 현대미술협회와 60년미술가협회가 공동으로 연립전을 열고 결국 ‘악뛰엘(Actuel)’로 통합되어 1962년 창립전을 연다. 이는 앵포르멜 진영의 승리가 가시화된 것으로, 구상미술 중심이었던 국전이 추상미술을 수용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악뛰엘이 해체되는 1964년까지 앵포르멜은 미술계를 평정하게 된다.
한국 앵포르멜 회화의 화풍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서구의 것과 차별화된 요소들이 화면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앵포르멜 운동이 비록 서구의 영향 아래 전개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동양적인 특성들이 융합된 독자적인 성격들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앵포르멜을 선보인 화가들은 ‘그린다’는 것 자체를 하나의 실존적 물음으로 제기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 앵포르멜이 처음 등장한 것도 제2차 세계대전 직후였고, 한국에서 앵포르멜 경향이 나타난 것도 6·25전쟁 이후라는 점에 비추어봤을 때 내가 그림을 그림으로써 살아 있다는 절실성이 반영된 것이다. 이들은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온 극한상황을 딛고 일어난 세대라는 점에서 기존의 가치관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절실성을 내장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서구의 미술을 수용하면서도 점차 자기화하여 보여준 당시 젊은 화가들은 우리 화단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추상미술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앵포르멜의 열기가 조금씩 식어가면서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실험미술의 경향이 나타났다. 미술에서 ‘실험’이라고 했을 때는 새로운 방법이나 형식을 시험 삼아 해 본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실험미술은 전통적인 장르인 회화나 조각에 국한되지 않고 오브제와 설치, 해프닝과 영상 등 다양한 작업을 총칭하는 말이다. 현재 시점에서 봤을 때는 그리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지만, 1960-7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작품들이 상당히 전위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960-70년대 한국은 제3공화국에서 제4공화국으로 이어지는 박정희 정부 시기였다. 경제발전이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정치사회적으로는 암울하고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을 거치며 민주화의 열망이 좌절당하는 경험을 했고, 언론의 자유가 크게 위축된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은 기성세대와 제도를 비판하기 위해 아방가르드한 미술을 선보였다. 본래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전쟁터에서 가장 선두에 선 ‘전위대’를 뜻하는 군사 용어인데, 미술에서 아방가르드는 ‘혁신을 추구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한국의 아방가르드 미술은 1970년대 중반 이후의 단색화 운동에 가려 그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경향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했다. 그러다 2000년대 초반부터 미술사학자 김미경 등 여러 연구자들을 통해 한국의 실험미술이 재조명되기 시작했고, 한국 현대미술사의 큰 줄기에서 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실험미술은 기존 미술에 대한 거부와 저항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실험미술은 ‘국전’에 대한 반발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국전은 1949년부터 1981년까지 총 30회 동안 이어져온 정부 주도의 미술 공모전으로, 젊은 작가들은 보수적이었던 ‘국전’에 대항하여 실험적이고 새로운 미술을 선보였다.
젊은 작가들은 국전에 반발하는 의미로 《청년작가연립전》(1967)을 개최하게 된다. ‘오리진’, ‘무동인’, ‘신전동인’과 같은 그룹에 소속된 작가들은 국전 반대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당시 미술계의 주류는 앞서 살펴본 ‘앵포르멜’ 경향이었는데, 이에 반발해 ‘반(反)예술’을 주창한 것이다.
가령 ‘신전’의 멤버였던 정강자는 여성의 입술을 거대 조각 작품으로 형상화했다. 핑크빛의 거대한 입술이 치아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흰 치아 사이에는 듬성듬성 벗겨진 치아들이 보이고, 치아 사이에는 오브제들이 부착돼 있다. 고무장갑, 여성의 얼굴, 얼굴에서 떨어져 나온 두 개의 눈과 같은 이 오브제들은 당시의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의 신체 부위를 과감하게 내세움으로써 억압당한 여성의 몸을 극대화한다. 여성의 입술을 확대해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은 여성의 욕망을 당당하게 드러내려는 시도로도 읽힌다.
《청년작가연립전》이 미술 전시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국내 최초의 ‘해프닝’이 시도되었기 때문다. 해프닝은 일종의 퍼포먼스로, ‘화가의 연극’이라고도 불린다. 해프닝은 혼란스러운 행위 예술을 뜻하기도 하는데, 일회성이 강한 공연 예술이나 작품 전시 등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국내 최초의 해프닝인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1967. 12. 14.)은 미술비평가 오광수가 각본을 쓰고, ‘무동인’과 ‘신전동인’ 멤버들이 참여했다. 여자 2명과 남자 8명, 비닐우산 1개, 새끼줄, 촛불 10개, 성냥 1통, 의자 1개, 휴지 등이 등장했고, 노래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합창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비닐우산에 꽂힌 촛불을 끄고, 마지막에는 우산을 짓밟는 행위로 끝이 나는데, 이는 문명에 대한 비판의 내용을 담으려는 의도로 전해진다. 작가들은 이 작품에 대해 정치사회적 의미를 애써 부인했지만, 1960-70년대 한국 사회의 분위기는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회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작품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1969년은 아폴로 11호가 처음으로 달에 착륙한 해이다. 당시 TV 등 매스미디어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던 시기여서 달 착륙 장면이 한국 가정에도 중계됐었다. 달 착륙은 인류의 역사상 한 획을 긋는 사건으로, 문명 발전을 확인시켜주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김구림은 <1/24초의 의미>라는 작품을 통해 한국의 물질적 풍요와 균열의 신호 등을 담아낸다. 작품 제목은 1초당 24개의 프레임을 연결해 제작했다는 의미로, 24컷 중 1, 즉 필름이 ‘정지된 순간’을 뜻한다. 일관성이 없는 수백 커트가 1초씩 상영되는 장면들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단면을 그려낸다. 이는 고속 성장으로 달려가는 사회에 대한 청년 작가들의 반항을 은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1969년 3월에 개통한 삼일고가도로를 달리는 차에서 촬영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중앙극장, 교차로, 공사장과 송전탑을 빠르게 비추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 놀이공원에서 노는 아이들, 거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아낸다. 작가의 시선에서 바라본 이러한 풍경은 대도시로 변모해가는 서울을 표현한 것이다. 화면은 점차 도시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비추기 시작하는데, 거리에서 자는 사람, 길가에서 꽃을 파는 노파, 기계 뒤에서 일하는 공장 노동자, 폐허가 된 낡은 문의 모습이 카메라를 하나 둘 지나쳐간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카메라는 한 남자의 등장과 함께 비로소 멈춰선다. 이 남자는 바로 정찬승 작가인데, 그는 서양식 정장을 차려입은 채 혼자 어슬렁거리면서 하품을 하거나 카메라를 응시한다. 도시 생활에 대한 무관심과 권태감을 보여주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과도한 자극과 피로에 굴복하지 못하도록 저항하고 간섭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흔한 말로 전위영화라고 할 만한 영화가 최초로 시도, 만들어졌다. (…) 표현기법의 해방을 부르짖는 이 사람들의 <24분의 1초의 의미>의 성패는 막이 내린 뒤에 따져 볼 일.” - 『선데이 서울』 (1967. 7.)
《청년작가연립전》을 기반으로 해서 등장한 그룹이 바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이다. AG는 “전위예술에의 강한 의식을 전제로 빚은 빈곤의 한국화단에 새로운 조형질서를 모색 창조하여 한국 미술 문화 발전에 기여한다”는 모토를 내걸고 시작되었다. AG는 1969년 창립되어 1972년까지 《환원과 확장의 미학》(1970), 《현실과 실현》(1971), 《탈관념의 세계》(1972) 전시를 개최함으로써 실험미술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보여주었다.
AG의 창립 회원은 곽훈, 김구림, 김차섭, 김한, 박석원, 박종배, 서승원, 이승조, 최명영, 하종현이며, 여기에 오광수, 이일 등의 미술평론가가 합세했다. 이들은 서구와 일본의 미술잡지에 의존하던 당시의 사조에서 벗어나 한국 미술이 처한 상황을 새롭게 인식하고 방향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지속했다.
AG의 2회전부터 참여하기 시작한 이강소의 <소멸-화랑 내의 술집>은 서울 중구 YWCA빌딩 지하 명동화랑을 실제 술집처럼 꾸며놓은 작품이다. 작가는 실제 술집에서 사용하는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 놓은 뒤 무교동 길거리에서 주워온 메뉴판까지 설치했다. 이강소가 만든 선술집에는 술을 마시려는 문화예술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작가는 이처럼 관객들이 주체가 되는 미술을 시도하면서 미술이 현실에 깊숙이 개입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우리 일상의 관습적인 현실을 떼어내어 화랑이나 미술관의 시공간으로 옮겨 실행했을 때, 우리의 일상 혹은 주변을 무엇인가 조금 다른 위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란 데 관심이 있었다.”
- 이강소
1975년 파리 비엔날레에 출품된 이강소의 <무제 75031>은 현지에서 ‘닭’을 빌려 만든 것으로, 나무로 된 모이통에 닭을 줄로 묶어둔 뒤 바닥에 석고 가루를 뿌려 놓는 것으로 시작된다. 제한된 행동반경 안에서 움직이는 닭의 발자국은 가루 위에 그대로 묻어나게 되는데, 닭이 다시 주인에게 돌아가고 나면 가루 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동물의 흔적만이 남게 된다.
당시 이강소는 생명의 근원이 소실된 상태에 관심을 두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변화하며 소멸한다는 깨달음 속에서 존재를 탐구한 것이다. 가루 위에 발자국을 통해 무엇이 없어졌는지, 무엇이 과거의 것인지를 보여주는 이 작업은 ‘고문’을 은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엄혹하게 진행된 검열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 AG의 창립 회원이었던 하종현의 작품도 주목할 만하다. <작품 73-13>은 전통적인 캔버스의 틀 대신 합판 위에 마포를 덮어씌운 뒤 그 위에 철조망을 설치하고 나사로 고정한 작품이다. 작가는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합판과 마포, 나사와 같은 재료를 통해 도시의 급격한 변화를 담아냈다. 또한 격자 형태의 철조망은 6·25 전쟁 이후의 한국의 상황을 은유하기도 한다. 사진에선 잘 보이지 않지만 실제 작품을 보면 캔버스 뒤쪽을 파고드는 철조망의 뾰족한 부분이 눈에 띄는데, 이는 당시 유신정권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이승택의 ‘거꾸로’ 작업도 흥미롭다. 전위미술은 전통을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만큼, 전통예술의 재발견을 통해 ‘거꾸로’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승택은 고드랫돌, 성황당, 옹기, 낫 등의 전통적인 오브제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았다.
“나는 세상을 거꾸로 보았다. 거꾸로 생각했다. 거꾸로 살았다.”
- 이승택
이승택이 AG 2회전에서 선보인 <바람> 시리즈는 바람, 물, 불, 연기, 안개 등 형체가 없는 소재를 가지고 자연의 움직임과 형태를 만들어낸 작품이다. 조각이라는 개념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 작품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이승택의 조각 작품들은 ‘비(非)조각’으로 불리는데, 반(反)조각이 조각 개념에 반대하는 것이라면, 비(非)조각은 ‘조각이 아닌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당시 조각의 재료로 인지되지 못했던 소재를 선택하고 현대 미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설정함으로써 당시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에 반기를 든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작가는 ‘비조각’ 개념을 통해 우리에게 ‘조각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승택은 고드랫돌을 감거나 묶은 작품도 선보였다. 일반적으로 조각은 깎거나(carving) 살을 붙이는(modeling) 방식으로 제작되는데, 조각의 개념에서 탈피하려는 시도를 지속했던 이승택은 ‘감기’와 ‘묶기’라는 방식을 고안해낸다. 그는 ‘감기’와 ‘묶기’의 대상으로 시멘트, 석고, 기와, 나무 등 여러 소재를 선택했고, 그 중에서도 ‘고드랫돌’을 자주 사용했다. 고드랫돌은 손으로 돗자리를 엮을 때 사용하는 홈이 파진 돌이다. 민속품으로서의 고드랫돌이 한민족의 과거 일상을 대변하는 문화의 영역에 속한 사물이라면, 이승택의 고드랫돌은 미술가라는 개인에 의해 미학의 영역으로 진입하게 된 사물로 볼 수 있다.
이승택의 작품세계는 ‘조각’에서 출발해 ‘비조각’에 이르고, 이러한 ‘비조각’은 다시 드로잉, 회화, 퍼포먼스, 사진-회화 등으로 제작되며 장르를 뛰어넘는다. 그의 폭넓은 예술 세계는 당시 한국 조각가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승택은 이처럼 실험적인 행위를 통해 기존의 고정된 형태를 새롭게 바꾸는 형태로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한국의 실험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룹은 바로 ST이다. ST는 Space & Time의 약자인데, 화가이자 미술비평가인 김복영이 ‘현대미술의 차원’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진행하며 만든 용어이다. 1971년 활동을 시작한 ST는 비평가 김복영을 비롯하여 이건용, 박원준, 김문자, 한정문, 여운 등이 참여했다.
ST는 AG와 비교했을 때 좀 더 철학적이고 미학적으로 작업을 해나갔다. 특히 이들은 ‘개념미술’에 주목했다고 볼 수 있는데, 개념미술은 아이디어 그 자체가 작품이 되는 미술인 만큼, ST의 시도는 현대미술에 다가가기 위한 본격적인 시도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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