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일기 : 대학 이야기 4

by 제이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1학년 신입생 환영식을 실내체육관에서 했다.

사실 전체 입학생들을 대상으로 학교생활에 대한 정보와 시설물의 사용 안내 등 유익한 자리이기는 하지만 대학생들이 어린아이들도 아니고 혹시 신입생이 불참하면 불이익이 있을까 봐서 호기심 반, 귀찮음 반으로 두 귀를 열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회자가 진행상 여유를 주려고 신입생 중 무대 위로 올라와서 노래를 할 사람을 찾는다는 방송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떤 멀대 같은 친구가 씩씩하게 손을 들고 무대 위로 올랐다.

나는 속으로 ‘햐! 배짱 한번 좋구나.’ 그리고 내심 부럽기도 했다.

최소 천 명 이상의 신입생과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 선뜻 나서서 노래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물경 2,000개의 눈과 귀가 당돌한 이 친구를 겨냥하고 있었고 사회자와 선곡 과정을 거치더니 상당한 고음 영역의 노래를 시작했다.

당대 최고의 인기그룹 ‘송골매’의 ‘아가에게’ 였다. 도입부터 시원한 샤우팅으로 시작되는데 최고음과 중고음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신입생을 대표하는 패기와 열정을 제대로 표현한 훌륭한 공연이었고 자기소개를 하는데 나와 같은 학과였다. 그 시절부터 80년 중반 학창 시절을 함께 관통했고 90년대 민주주의 부활을 같이 지켜봤으며 격동의 2000년대를 지나 어느덧 2010년대 중년을 함께 했다.

뭇 40년 가까이 자유로운 젊음의 영혼으로 상징처럼 남아 있다.

술과 노래와 낭만을 아는 이 친구는 장수 집안의 후손으로 향후 40년도 문제가 없어 보이니 이 또한 다행이지 않은가?



봄 MT


부지런한 과 대표 형을 중심으로 봄 MT가 정해졌다.

당시 MT는 소풍과 같은 의미지만 영어를 섞으면 같은 이름도 세련되게 들린다.

이것도 영어로 익숙해진 사대주의가 아닌가 싶은데 하여간 당시에는 영어로 명사를 약칭하는 문화가 있었고 우리는 제대로 그 문화 중심에 있었다. 나중에 이러한 분위기는 86년 여름 대통령 직선제 시위가 정점을 이루기 전까지 약 2년 반 동안 위축되지 않았고 자유를 갈망하는 목소리도 나름 반향이 있었다.

당시 MT는 기본적으로 텐트와 캠프파이어로 상징되던 시대적 아이콘이었고 해방구 역할을 했다.

당연히 술과 음악과 디스코가 혼합되어 젊음의 향연이 펼쳐졌다.

학기 초 크고 작은 환영회에 참석하면서 나의 주량을 냉철하게 판단한 결과 내가 의외로 술이 세다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는 술을 즐겁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었다.

나라고 많이 마시면 왜 취하지 않겠는가? 다만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덜 취했고 다만 다른 친구들보다 약간 더 마실 수 있었다고 해석하시면 되겠다.

누구의 말처럼 인문대 입학 후 문학을 논하려면 특히 중국문학을 논하려면 술을 빼고 가능할 것 같은가?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당시 시인들의 시상은 실제로 술에서 많이 나왔고 술자리가 곧 시 발표회 자리였으니 말이다.

문학은 곧 술이다.


로댕Rodin


대학교 입학 전까지 약 2개월 동안 중국어를 공부하면서 남는 시간에 알바를 하려고 주위를 살폈다.

마침 사촌 형이 운영하는 로댕 커피숍에 알바 자리가 있어서 사촌 형과 상의하고 부모님께 알바를 시작한다고 알렸더니 어머니는 별말씀을 않으시는데 아버지가 반대의 눈치를 보내온다.

길어야 2개월인데 이 난관을 극복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와 집 근처에 있는 여중학교 농구장으로 가서 농구를 하다가 아버지한테 알바를 허락해 달라고 하자 중국어 공부나 하라는 메시지를 주신다. 그래서 내가 위기탈출용 긴급 제안을 드렸다.

자유투를 성공시키면 허락을 해 주시고 실패하면 포기하겠다고 했더니 그러라고 하신다.

사실 나는 중고시절까지 농구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공놀이 수준으로 성공 가능성은 별로 없었는데 이미 알바를 하느냐 마느냐는 자유투에 달렸으니 정신을 집중하고 공을 던졌다. 내 손에서 떠나가는 공의 출발 궤적이 깔끔해서 느낌이 좋았는데 역시 크린 샷으로 성공했다.

'원 샷! 원 킬!'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고 아버지는 속으로 애재를 불렀으리라.

그래도 구두 약속도 약속이니 아버지도 그 후로 입학 전까지 두말없이 알바에 대하여 뭐라고 하지 않으셨으니 그날의 크린 샷은 내 인생의 샷이었다. 성공한 포물선은 그 궤적이 그림과 같이 아름답다.

결국 알바를 시작했다. 아마도 1월 초부터 2월 말까지 하루 6시간 정도 2교대로 12시간으로 운영되었는데 불친들과 교회 그리고 훗날 학과 친구들이 자주 찾아오는 일명 젊음의 아지트가 되었다.

가게도 시내 한 중심부에 있었고 주변에 백화점, 옷집, 술집 등 유흥가라서 유동인구도 많았다.

로댕의 알바는 나와 사촌 형수님의 여친이 주로 나누어 맡았고 그때만 해도 손이 잘 트는 시기였기에 손님 앞에서 튼손을 꺼내어 보이기가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었는데.

‘탄생과 성장 1”편 엄마의 튼손을 기억하는가?



新生入学教育


一年级新生欢迎仪式在室内体育馆举行。

事实上,以全体新生为对象,虽然是有关学校生活的信息和设施的使用介绍等有益的场合,但是大学生们又不是小孩子,担心新生不参加的话会有不利影响,所以既好奇心又嫌麻烦,打开双耳坐在座位上。 主持人为了从容地进行节目,在新生中走上舞台寻找唱歌的人,节目还没结束,某个傻傻的朋友就勇敢地举手登上了舞台。

我心里想'嘿! 真是有股子胆量啊",内心也很羡慕。

至少在1000多名新生和家人聚集的场合,爽快地站出来唱歌不是件容易的事情吗? 他瞄准了2000个物镜的眼睛和耳朵唐突的朋友,经过主持人和选曲过程,开始了相当高音领域的歌曲。

那就是当代最高人气组合"松骨梅"的《致孩子》。 从导入开始就以清爽的呐喊开始,自由穿梭于最高音和中高音之间,是代表新生的霸气和热情的优秀演出,自我介绍时和我是一个专业。 从那时开始,一起贯穿了80年代中期的学生时代,一起见证了90年代的民主主义复活,经过了动荡的2000年代,不知不觉间一起度过了2010年代的中年。

在近40年的时间里,它一直是自由的年轻灵魂,就像象征一样。

这位懂酒、懂歌、懂浪漫的朋友是长寿家族的后人,今后40年看起来没问题,这不也是万幸吗?


春季团结大会


以勤劳的科代表哥为中心决定了春季MT。

当时的MT虽然和郊游是一样的意思,但是如果加上英语,同样的名字听起来也很干练。

这也许也是用英语熟悉的事大主义,总之当时有用英语简称为名人的文化,我们处于文化中心。 后来,这种氛围在86年夏天总统直选抗议达到顶峰之前的近两年半时间里没有退缩,渴望自由的呼声也有自己的回响。

当时MT基本上是帐篷和篝火晚会象征的时代标志,起到了解放区的作用。

当然,酒、音乐和迪斯科混合在一起,上演了一场年轻的盛宴。

在学期初参加大大小小的欢迎会时,冷静地判断了我的酒量,结果发现我酒量出乎意料地好后,就自然而然地掌握了如何愉快地享受酒量的方法。

我喝多了怎么不醉呢? 只是比其他朋友醉得少一点,只是可以解释为比其他朋友喝得少一点。

正如谁所说,考入文大后要谈文学,尤其是要谈中国文学,除了酒,还有可能吗? 我认为不可能。 因为当时诗人的颁奖实际上是在酒中出现的,酒席就是诗发表会。

文学就是酒。


罗登


在大学入学之前学习了约2个月的中文,为了剩下的时间打工观察了周围。

正好表哥经营的罗丹咖啡厅有兼职,所以和表哥商量后告诉父母要开始打工,母亲没说什么,但父亲却给我来了反对的眼色。

最长也只有2个月,但感觉要克服这个难关。

和父亲去家附近的女子中学篮球场打篮球时,父亲要求父亲允许他打工,父亲就告诉他学习中文。 所以我提出了摆脱危机的紧急提案。

如果罚球成功,就给予允许,如果罚球失败,就放弃。

其实我在初高中时期都没有好好打过篮球。

虽然只是单纯地玩球,成功的可能性不大,但是已经取决于是否打工的罚球,所以集中精神投出了球。 从我手中离开的球的出发轨迹非常干净利落,感觉很好,但果然还是用干净的击球成功了。

"一口闷!一口闷!"

我心里叫着快哉,父亲心里叫着哀哉。

即使这样,口头约定也是约定,父亲在入学前二话不说对打工说什么,那天的截图就是我人生的截图。 成功的抛物线的轨迹美如画。

最终还是开始了打工。 大概从1月初开始到2月末为止,每天6小时左右,以2班倒运营12小时,成为佛亲们、教会和后来学科朋友们经常光顾的又名年轻据点。

商店也位于市中心,周边是百货商店、服装店、酒吧等娱乐街,流动人口也很多。

罗丹的兼职主要由我和表嫂的女朋友分开负责,当时还是手忙脚乱的时期,所以很难在客人面前拿出结实的手给客人看。

还记得《诞生与成长1》篇妈妈的手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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