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문편지의 유래를 찾아보니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와 일본군에 의해서 학생들이 수업 중에 전방의 군인에게 위문편지를 보내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월남 파병 군인들에게 보내졌고 70년대까지 학교에서 겨울방학을 앞두고 1인 1통씩 의무적으로 보내다가 80년대 들어서는 추억으로 남는다.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 보니 위문편지의 답장을 받은 친구들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나도 위문편지를 쓰면서 내 편지의 주인공은 어느 국군장병 아저씨가 될 것인가 상상하곤 했었다. 사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군인들에게 쓸 말이 뭐가 그리많았겠는가?
아마도 당시 위문편지를 썼던 친구들의 8할 정도는 내용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최전방을 지키시는 자랑스러운 국군 아저씨께. 추운 겨울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신가요?
우리는 아저씨들 덕분에 후방에서 따뜻하고 평안하게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저도 커서 군인이 되면 북녘 하늘에 태극기를 꽂고 우리의 소원을 부르고 싶습니다.
부디 무사히 군 복무를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
왜 그럴까? 당시 군인들 입대 연령 평균을 21살로 추정한다면 중2-3 여학생이 썼다고 해도 15-16살이니 좋은 인연이 생겼을 법도 한데 내 주변에서 별다른 미담은 들리지가 않았다.
아마도 20살 초반의 열혈남아들이 대부분이었을 테니 10대 중반보다는 10대 후반이나 또래들과 펜팔을 원했을 수도 있었겠다. 70/80 시절 거의 모든 잡지책 끝장 부분에는 <펜팔 코너>가 있었고 펜팔을 통한 편지 교환이 그리 생소하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최근 모임 단톡방에서 자신이 군종병 시절에 받았던 편지를 우연하게 발견했다며 옛날의 아름다운 시절을 회상하던 친구가 있었다.
그 시절 추억 속에 그 님들은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혹시나 그 편지의 군인 주인공들과 아름다운 추억이라도 쌓으셨을까?
여담)
. 당唐 개원(713~741) 연간에 궁중에서 솜옷을 만들어 변방 군사들에게 하사했는데 어떤 병사가 받은 짧은 홑옷 안에서 시 한 수를 발견하였다. 병사는 발견한 시를 장수에게 보고하자 장수는 이를 조정에 알렸다. 현종은 시를 쓴 궁녀를 그 병사에게 시집을 보냈는데 둘 다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한다.
< 궁녀의 시 >
‘모래벌판으로 군역을 나간 나그네는 추위가 힘들면 어찌 잠을 잘까? 전투복을 손수 지었으니 누구에게 전해질까? 생각을 담아 바느질 한 땀 더 보태고 정을 담아 다시 솜을 집어넣는다. 이번 생은 이미 지나갔으니 다음 생에서 인연을 맺고 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