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일기 : 초교 이야기 1

by 제이킴

입학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 내 인생은 정식 무대에 올려졌다.

집에서 전매청(연초제조창)을 지나고 시장을 지나면 학교가 나오는데 어린이 걸음으로 15분 정도 걸린다. 담임선생님은 훗날 장학사로 활동하셨는데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1학년 때부터 어머니가 숙제를 하지 않으면 못 놀게 했다.

표현이 틀렸다. 숙제를 하고 노는 습관을 길러 주셨다.

덕분에 성적은 반에서 2-3등 수준이었고 가끔 시험 운이 있을 때 1등도 했었다.

先 숙제 後 놀이는 내 인생을 관통하는 습관이 되었다.

소풍을 가서 찍은 사진을 보면 병아리 같은 아이들이 이제는 장년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니 세월은 이렇게 무상하다. 사진 속 주인공 중 3명은 지금도 연락을 하고 지낸다.

여친들도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사진이 없어서 ‘추억 탐색’이 불가하다.

축구는 나의 주된 놀이였고 재미있는 체육 활동이었다.

이때부터 성적도 되고 축구도 되는 인기남의 길로 들어섰다.

지금도 사진 속에 있는 남친들이 옛날이야기를 할 때 축구놀이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그리고 집, 학교와 정삼각형 꼭짓점 부근에 위치한 외가를 1주일에 1-2번은 놀러 갔었다.

제재소 사장님인 외할아버지는 나중에 공무원으로 활동하던 큰 사위를 불러서 제재소 직원으로 삼으셨는데 그 큰 사위가 우리 아버지가 되시겠다.

아버지의 첫 직장인 군청 공무원보다는 제재소 큰 사위로 내 기억은 시작된다.

불현듯 아버지가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가 생각난다. 한 90cc 정도 되었을 것이다.

나중에 안 보여서 물어봤더니 도둑이 가져갔다고 한다.

그러다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셨는데 가끔 나를 학교에 태워다 주셨다.

자전거 뒤에서 잡은 아버지의 허리춤은 늘 내 인생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여친들


학교를 가는 길에 같은 반 여친 아버지가 운영하는 가게와 집이 있었다.

나와 친하게 지냈는데 고기를 안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빼빼했고 아래로 여동생이 2명이 더 있었다. 학교에 가려고 여친 집에 들러 학교에 가자고 여친 이름을 부르면 이 아이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는지 나를 대기시켜 놓고 부랴부랴 서둘러서 학교에 같이 가곤 했다.

나는 상당히 오랫동안 그 여친의 ‘학교 길 보디가드’로 활약했다.

내 기억에 차도 쪽은 내가 가고 여친에게 인도로 양보했고 고기를 안 먹어서 힘이 부족해 보이면 내가 무거운 준비물도 대신 들어주었다.

커서는 고기를 먹었는지 모르겠는데 1학년 마칠 때까지 고기를 안 먹었다.

여학생 아버지는 내가 아침마다 인사를 드리면 훈훈한 표정으로 나를 반겨 주셨는데 당연히 장녀의 보디가드로서 든든함을 느끼셨을 것이다.

지금은 어떤 남성이 보디가드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고 지금도 고기를 안 먹는지 궁금하다.


나보다 나이가 2살 더 많은 여친과 짝을 했는데 시내 중심가에 소매점을 하고 있었다.

내가 가게에 들리면 가장 맛있는 과자를 골라서 같이 나누어 먹었다.

같이 사생대회도 나가고 나를 많이 귀여워했다. 내 인생에서 처음 경험하는 누나 같은 친구였다.

훗날 내가 전학 후 다른 초교에 다니며 스카우트 행사장에 갔을 때 그 여학생은 이전 학교에 있었던 밴드부 지휘자로 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반가움으로 인사를 했어야 했는데 수줍어서 말도 꺼내지 못했다.

당시에는 내가 그 정도로 숫기가 없었다.


미스코리아 담임선생님


박경숙 담임 선생님은 미인이셨다. 여동생이 미인대회에 나가서 입상을 했다고 한다.

미혼 선생님이었는데 나는 미인 미혼 여선생님은 화장실도 안 가는 줄 알았다.

선생님 집으로 친구 랑 같이 놀러 갔는데 다른 자매들도 다 미인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선생님이 미스코리아 동생보다 더 예뻤다. 그리고 나는 그때 알았다.

가족 중 한 명이 미인이라는 이야기는 다른 식구들도 미인일 확률이 높다는 것을.

하루는 남친과 방과 후 주번을 하면서 책상 위를 같이 뛰어다니며 놀다가 남친이 미끄러져 다쳤는지 팔을 움켜쥐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선생님한테 자신의 부상을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먼저 하교를 했다.

마치 이순신 장군처럼 자신의 부상을 선생님에게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잠시 후 선생님이 오셔서 나에게 별일이 없는지 물어보시는데 나야 당연하게 친구와 약속대로 별 일이 없다고 말씀드리고 하교를 했는데 그 별일 아닌 별일로 다음 날 아침 등교를 했는데 그 남친이 안보였다.

팔이 부러져 깁스를 하느라 내일 등교를 한다면서 선생님이 어제 남친의 부상은 별일인데 왜 자신한테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며 가벼운 힐책을 하시는데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쑥스럽고 창피했다.

다만 남친과 약속을 지키려고 했던 것인데 거짓말을 해 버린 순진한 나는 두고두고 남친의 부상 사건을 계기로 더욱 솔직한 아이로 거듭나게 되었다.

다음 날 부러진 팔에 깁스를 하고 나타난 남친한테 나는 약속을 지켰다고 하자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나를 위로하며 자신의 엄마가 선생님한테 전화로 부상 상황에 대하여 설명을 했다고 한다.

며칠 후 그 남친 집에 놀러 갔는데 남친 어머니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왠지 남친의 부상에 대하여 내가 일말의 원인제공을 한 듯한 일종의 송구함 때문이었다.


노벨 약국


시내 중심에 있는 노벨 약국 아들이 같은 반이다.

약국 집 장남은 내가 봐도 수려한 외모에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았다.

집에 놀러 가면 세련된 젊은 엄마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초1 학년 첫째를 둔 엄마라면 많아야 30대 초반, 적으면 20대 후반도 가능한 시절이었다. 내가 본 젊은 엄마는 날씬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몸매도 좋았다.

혹시 오해는 마시라. 당시 우리 엄마는 동생들을 2살, 3살 터울로 낳으시고 몸매 관리가 안되어 통통한 편이었고 약국 엄마는 상대적으로 날씬하게 보였던 것이다.

약국 아들과 좋은 우정을 나누었다. 내가 만일 3학년 때 전학을 가지 않았다면 아름다운 우정을 이어갔을 텐데 많이 아쉽다. 나중에 대학에 가서 우연히 만났는데 서로를 알아보았으나 이상하게 아는 체를 못하고 겸연쩍게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지금도 그 어색했던 지나침이 후회된다.

친구야. 미안하다. 내가 이상한 수줍음이 있어서 너에게 아는 채를 못했구나.

부디 용서해라. 혹시 다시 만나게 되면 같이 소주 한 잔을 나누고 싶다.’



入学


升入小学后,我的人生正式登上了舞台。

从家里经过专卖厅(年初制造厂)经过市场,就能看到学校,儿童步行15分钟左右。 班主任后来担任了奖学士,但名字记不清了。

从一年级开始,妈妈不写作业就不让我玩。

措辞不对。 培养了做作业和玩的习惯。

得益于此,成绩在班里是2-3名,偶尔有考试运气的时候还获得了第一名。

先作业后游戏成了贯穿我人生的习惯。

从郊游时拍的照片来看,像小鸡一样的孩子们现在到了壮年,活动非常旺盛,岁月如此无常。 照片中的3名主人公至今仍保持着联系。

应该也有女朋友,可惜没有照片,所以无法"探索回忆"

足球是我的主要游戏,也是有趣的体育活动。

从此,他走上了既能成绩又能踢足球的人气男路。

现在照片中的男朋友们聊起以前的事情时,经常会提到足球游戏。

而且每周去家、学校和位于正三角顶点附近的外婆家玩1-2次。

制裁所社长外公后来叫来公务员活动的大女婿,让他成为制裁所职员,那个大女婿要成为我父亲了。

比起父亲的第一个上班族郡厅公务员,我更想成为锯木厂大女婿。

忽然想起了父亲骑的摩托车。 大概有90cc左右。

后来因为看不见所以问了一下,说是小偷拿走了。

然后骑自行车上班,偶尔会载我去学校。

从自行车后面抓住的父亲的腰,总是成为我人生中坚实的后盾。


女友们


在去学校的路上,有同班女友父亲经营的店铺和房子。

虽然和我关系很好,但据说他不吃肉。 可能是因为这个原因,她瘦了,下面还有2个妹妹。 为了上学,去女朋友家叫她上学,这个孩子可能还没有准备好,就让我等着,急急忙忙地一起上学。

我在相当长的一段时间里一直作为女朋友的"学校路上的保镖"活跃着。

我记得车道那边我走了,让给了女朋友,如果不吃肉,看起来力气不够的话,我替她拿了沉重的准备物。

长大了不知道吃没吃肉,直到1年级结束都没吃肉。

女生的父亲每天早上和我打招呼时,都会以温暖的表情欢迎我,当然作为长女的保镖会感到踏实。

现在很好奇有哪些男性做保镖,现在也不吃肉。

我和比我大2岁的女朋友结伴,在市中心开零售店。

我去店里挑最好吃的饼干一起分着吃。

一起参加写生比赛,非常疼爱我。 这是我人生中第一次经历像姐姐一样的朋友。

后来我转学后去其他小学参加童子军活动时,看到那个女学生作为以前学校的乐队指挥活动,本应该高兴地打招呼的,但是害羞得连话都说不出来。

当时我那么没有胆量。


韩国小姐的班主任


朴京淑班主任曾经是个美人。 听说妹妹参加选美比赛获奖了。

是未婚老师,我以为美女未婚女老师连洗手间都不去呢。

和朋友一起去老师家玩,其他姐妹也是美女。

在我看来,老师比韩国小姐的弟弟还漂亮。 然后我那时才知道。

家人中有一个是美女的意思就是其他家人也是美女的概率很高。

一天,和男朋友一起在课余值星的时候,在桌子上跑来跑去玩耍,可能是男朋友滑伤了,他抓住胳膊,用痛苦的表情让老师不要说自己的伤病,并先放学了。

就像李舜臣将军一样,他叮嘱老师不要告诉老师自己的伤势。

过了一会儿,老师来问我有没有什么事,我当然和朋友按照约定说没什么事后放学了,但第二天早上因为没什么事上学,但是男朋友不见了。

因为胳膊断了,为了打石膏,老师说明天要上学,昨天老师指责说:"男朋友的伤没什么大不了的,为什么没有告诉自己呢?",但是老师觉得不好意思,甚至想找个老鼠洞进去。

只是想和男朋友遵守约定,但是却说谎的天真的我,以男友受伤事件为契机,成为了更加诚实的孩子。

第二天,当男朋友说"我遵守了约定"时,他用"理解"的表情安慰了我,并说自己的妈妈通过电话向老师说明了受伤情况。

几天后去男朋友家玩,没看清男朋友妈妈的脸。

不知为何,似乎是我对男友的受伤提供了一丝原因的一种歉疚感。


诺贝尔药房


位于市中心的诺贝尔药房的儿子是同班同学。

药店的长子在我看来也是长得秀丽,学习好,性格也好。

回家玩的话,有一个干练的年轻妈妈,现在回想起来,如果是小学一年级有大孩子的妈妈,最多30岁出头,最少20岁出头。 我看到的年轻妈妈穿着苗条的连衣裙,身材也很好。

不要误会。 当时我妈妈生弟弟们相差2岁、3岁,身材不好,所以比较胖,药店妈妈看起来比较苗条。

和药房的儿子建立了很好的友谊。 如果我在3年级的时候没有转学的话,会延续美好的友情,但是很可惜。 后来上大学后偶然相遇,虽然互相认出了对方,但奇怪的是,没能装作认识的样子,尴尬地错过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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