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일기 : 중학생 이야기 11

by 제이킴

10월 유신


초교시절부터 반공교육은 남북 대치 상황에서 강조되어 왔으며 오랜 세월 동안 우리들의 일상생활과 함께 했다. 7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維新이라는 큰 산맥을 스스로 만들어 버린다.

이름부터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은 것처럼 일본의 잔재 분위기가 느껴진다

나는 그때 당연히 우리들의 대통령은 박정희, 박정희 하면 우리 민족의 대통령으로 인식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반공교육, 국민교육헌장, 충효사상 등에 강조된 일부 이념이 자신의 의도한 장기집권의 연장선을 만들기 위한 방편이며 국민들을 길들이기에 사용된 문화사업으로 판단된다면 내가 너무 피해망상적인 사고를 가진 것일까? 이 얼마나 무서운 발상인가?

종신 집권을 노린 독재자의 말로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다.

수출성과를 지상과제로 강조하며 선진국 대열 진입에 얼마 남지 않았음을 연일 부각하면서 민족번영의 과제 앞에 당면한 문제를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면 누가 해결할 수 있겠냐는 분위기를 조장하면서 대통령 스스로가 독재의 앞잡이로 나선 형국이었다.

12년 집권 후 조용히 물러났으면 국부로 남을 위대한 혁명가 박정희는 급기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였으며 정당 및 정치 활동을 금지하였고 대통령 중임 제한을 없앴다.

18년 동안 장기집권. 먼 나라 아닌 당시 아프리카 후진국 독재자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한국에서 박정희는 가능하게 만들었다. 위대한 임무를 완수하겠다던 대통령은 결국 종신 총통의 길로 들어섰다. 전형적인 후진국형 개발독재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70년대 말 가까이에서 본 대학생들의 데모의 민 낯은 그대로 나에게 전파되었다. 당시는 유신 체재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데모를 막는다고 휴교령이나 위수령을 선포하는 등 독재정권의 칼날이 학생과 시민들을 향하던 시기였는데 서민들은 독재정권을 탓하기 이전에 학생들이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한다고 학생시위를 걱정하는 시각도 있었다. 위대한 박 대통령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선봉 기수로 나와 가시밭 길을 자청해서 걸어가는데 학생들은 민족의 앞길을 아니 대통령의 앞길을 막지 말라며 애국지사 후예들처럼 걱정하던 시민들이 있었다. 당시는 반정부 시위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민주정권을 세우자는 국민들의 지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렇게 독재는 무서운 것이다.


대통령의 죽음


아침을 먹으려고 세수를 하고 밥상에 가고 있는데 엄마가 박 대통령이 서거逝去 하셨다고 했다.

서거라면 죽음을 말하는 것인데 대통령의 죽음은 사실 개인적인 감정기준으로 뭐 그다지 슬픔의 소식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박 대통령 부재를 걱정하며 혁명 지도자의 죽음을 슬퍼했다.

들어보니 중앙정보부 김재규가 쏜 총에 쓰러진 대통령은 차지철 경호실장과 같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결국 혁명 동지이자 부하 김재규의 총탄을 맞고 궁정동 안가에서 쓰러질 때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70년대 초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Khmer Rouge 급진적인 좌익 무장단체가 4년 동안 약 150만 명의 지식인들과 기술자들을 기회주의자라는 죄명으로 학살을 했다.

궁정동 안가에서 박 대통령 피살된 상황이 훗날 영화와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당시 청와대의 정서와 부마항쟁의 인식 등 국민들이 잘 몰랐던 정치권의 내막이나 민족의 대통령이 과연 무슨 생각으로 유신을 만들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부하의 총탄에 쓰러진 대통령은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유신의 종말을 알리며 서울의 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지금 생각하면 역사의 도도한 물결 위에 올라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이 또한 운명이런가?


육영수


인자함과 온화함으로 기억되는 영부인.

재일동포 문세광의 총탄을 맞고 저 세상으로 떠난 우리들의 영부인.

당시 문세광의 나이를 보니 만으로 23살. 당시 시대적 나이를 반영한다고 해도 20대 중반도 안된 젊은이가 사회주의에 심취하여 북한의 지령에 따라 남한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자 암살자는 육영수 여사를 저격하고 만다. 영부인이 살해되자 전 국민이 애도하며 슬퍼했는데 남편도 몇 년 후 총탄에 맞고 죽음에 이른다. 이번에는 부하가 쏜 총탄에 쓰러졌다.

올림머리와 한복이 트레이드 마크였고 살아서는 국모로 죽어서는 전설이 되었다.


최규하


박 대통령 임기 말 부통령으로 대통령 서거 후 자연스럽게 대통령이 될 뻔한 인물.

개인적인 불운은 생략하고 역사의 흐름에 올라서지 못했던 비운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신 군부가 기획한 12.12 사태로 권좌를 내주고 하야하는 대통령 권한 대행은 오랜 역사의 침묵 앞에서 입을 닫고 조용히 여생을 마감했다.


전두환


박 대통령의 부재를 자신의 정권 탈취의 목적으로 활용한 군인.

박 대통령의 양아들로 불리던 믿음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하나회를 중심으로 정권 탈취에 성공한 정치 군인. 80년대 경제성장의 도약기 덕택으로 단임제를 강조하며 당시 중임제에서 1년이 빠진 7년 임기를 누린 행운아. 88 올림픽의 성공의 기초를 닦았고 후임 대통령에게 처음으로 평화적 정부 이양을 한 전두환 대통령의 첫 텔레비전에 비친 모습은 상당히 무서운 표정으로 국민들에게 압박하는 분위기가 전달되었다.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서울에 봄은 끝내 오지 않았고 10년 이상의 역사의 시간을 되돌려 90년대가 되어서야 민주정부가 들어서는데 당시 야당의 분열과 정치군인을 다시 직선제 대통령으로 뽑는 국민들의 민도는 과연 어느 방향을 보고 역사의 앞을 걸어가는 것일까?



十月维新


从小学时期开始,反共教育在南北对峙的情况下被强调,长久以来一直陪伴着我们的日常生活。 70年代初,朴正熙总统自己建造了"维新維新"这一大山脉。

从名字上就能感受到日本效仿"明治维新"的残留氛围。

我当时一提到朴正熙、朴正熙,当然就会想到我们民族的总统。

现在回想起来,如果反共教育、国民教育宪章、忠孝思想等强调的部分理念是为了制造自己意图的长期执政的延长线,而且被判断为是用于驯服国民的文化事业,那么我是不是太有被害妄想性了? 这是多么可怕的想法啊?

独裁者企图终身执政的话语就这样虚无地结束了。

连日强调出口成果是至高无上的课题,强调进入发达国家行列所剩无几,助长了"如果不是朴正熙总统,谁能解决民族繁荣课题面前的问题"的氛围,形成了总统自己充当独裁者的局面。

执政12年后,如果安静地退位,将成为国父的伟大革命家朴正熙最终宣布紧急戒严,解散国会,禁止政党及政治活动,取消了总统连任限制。

18年长期执政。 朴正熙在韩国实现了当时非洲落后国家独裁者也做不到的事情。 宣称要完成伟大任务的总统最终走上了终身总统之路。 走上了典型的落后国家型开发独裁之路。

在近70年代末期看到的大学生示威的素颜原封不动地传到了我的脑海里。 当时是为了阻止反对维新体制的学生示威而宣布停课令或卫戍令等独裁政权的刀刃指向学生和市民的时期,但是平民们在责怪独裁政权之前,也有人担心学生示威说:"学生们不学习,只顾示威。" 伟大的朴总统肩负着民族中兴的历史使命,作为先锋旗手自愿走在荆棘丛生的道路上,但是学生们却像爱国志士的后裔一样担心着"知道民族的前途,不要阻挡总统的前途"。 当时不是担心反政府示威,而是需要建立民主政权的国民的支持。

这样的独裁是可怕的。


总统之死


为了吃早饭,洗完脸去饭桌的路上,妈妈说朴总统去世了逝去。

如果说去世,就是死亡,但总统的去世实际上以个人的感情标准来看,并不是什么悲伤的消息。 很多人担心朴总统不在,为革命领导人的去世而悲伤。

据说,被中央情报部金载圭开枪打倒的总统与警卫室长车智哲一起牺牲了。 结果被革命同志兼部下金载圭的子弹击中,在宫井洞安家倒下时,他心里会有什么想法呢?

70年代初,柬埔寨红色高棉激进左翼武装团体在4年内以机会主义者的罪名杀害了约150万名知识分子和技术人员。

朴总统在宫井洞内被杀的情况日后被制作成电影和纪录片,才知道当时青瓦台的情绪和釜马抗争的认识等国民不太了解的政治圈内幕或民族的总统到底是以什么想法制造了维新。

被部下的子弹击倒的总统并不是一个人的死亡,而是宣告维新的终结,等待着首尔的春天,但历史却朝着另一个方向发展。

现在回想起来,有人登上历史的滚滚浪潮,也有人被海浪卷走,这难道也是命运吗?


陆英修


以仁慈和温和而被记住的总统夫人。

在日同胞文世光的枪弹下离开人世的我们的第一夫人。

从当时文世光的年龄来看,他已经23周岁了。 即使反映当时的时代年龄,一个不到二十多岁的年轻人沉迷于社会主义,试图按照北韩的指令暗杀南韩总统,结果失败,暗杀者便狙击了陆英修女士。 第一夫人被杀害后,全国民都在哀悼和悲伤,丈夫也在几年后中弹死亡。 这次被部下开的子弹打倒了。

盘头和韩服是标志,活着作为国母死去成为了传说。


崔圭夏


他是朴总统任期末的副总统,在总统去世后差点自然而然地成为总统的人物。

省略个人的不幸,可以说是没能登上历史潮流的厄运的主人公。

因新军部策划的"12.12事件"而让位下台的总统权限代行,在悠久的历史沉默面前闭口不谈,安静地结束了余生。


全斗焕


利用朴总统不在场夺取自己政权的军人。

他抓住被称为朴总统养子的"信任机会",以"哈拿会"为中心成功夺取政权的政治军人。 多亏了80年代经济增长的飞跃期,他强调了单任制,并享受了从当时连任制中减去1年的7年任期的幸运儿。 为1988年奥运会打下了成功的基础,首次和平移交政府的全斗焕总统在电视上露出的样子,以相当可怕的表情向国民传达了施压的氛围。

70年代末和80年代初的首尔终于没有迎来春天,回到10年以上的历史,直到90年代才成立民主政府,当时在野党的分裂和政治军人重新选举为直选制总统的国民的民道究竟是看向了哪个方向,走在历史的前面呢?

keyword
작가의 이전글추억 일기 : 중학생 이야기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