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일기 : 중학생 이야기 10

by 제이킴

계란


계란도 귀했다. 모든 것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우선 양계장이 많지 않았고 생산량은 적으니 베이비 붐 시절에 대량으로 세상을 본 아이들이 학교를 다녔던 그 시절에는 계란으로 만든 반찬은 모두 다 고급 반찬이었다.

만일 우리 어릴 적 가족 밥상에 계란이 자주 올라왔다면 그 집 아이는 여유가 있는 집안의 아이들이다. 점심시간이면 도시락을 꺼내서 밥이 든 도시락은 자기 손에 들고 반찬은 책상에 올려 좋고 모아서 아이들과 공유하는데 계란후라이는 도시락 밥 밑바닥에 깔아서 다른 아이들의 젓가락 접근을 방지하는 엄마들의 현명한 처리도 있었다.

시골 자연에서 방생되어 건강한 토종닭들이 낳은 계란은 당시에 계란이 아니라 보약이었다. 짚으로 계란을 열 개씩 엮어서 도시 친척들에게 선물하는 광경은 흔하게 볼 수 있던 시절이었고 명절이 되면 계란꾸러미를 들고 정거장을 배회하던 모습도 추억이 담긴 영화 같은 장면으로 남아있다.

예전에 회사 사장님을 역임하셨던 분이 서울로 유학을 와서 공부하던 시절.

어머니가 친척집 어른에게 선물로 싸준 계란꾸러미를 교복 입은 옆구리에 끼고 서울역 앞을 걸어가는데 기울어진 꾸러미에서 계란 한 개가 빠져나가는 중량의 변화를 감지했건만 수 많은 인파 속에서 굴러다니는 계란을 줍기가 도저히 창피해서 차마 돌아보지 못하고 걷다 보니 어느덧 하숙집에 도착했는데 계란들은 다 빠져나가 버리고 빈 꾸러미를 보면서 서글픈 마음에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어떻게 보면 아름다운 추억으로 회상되는 이야기이지만 나에게는 슬픈 이야기로 들렸다.

이 분에게는 어머니가 싸준 계란꾸러미가 기쁨의 선물이 아닌 창피함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이 분은 아마도 계란을 먹을 때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날 것이다.


찰밥


하루는 엄마가 친척집에서 가지고 온 찰밥을 도시락에 싸 주셨다.

지금이야 찰밥은 직접 만들어 먹기도 하고 일회용 포장식도 있어서 포장을 뜯고 전자레인지에 돌이면 3분 안에 먹을 수 있는 간편식도 많다. 당시에 찰밥은 명절에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고 먹을 수 있는 기간도 명절 언저리나 가능했던 전통이 담긴 음식이다.

점심에 도시락을 꺼내는데 무게가 썰렁하다. 이상하다 찰밥의 정보가 새어 나갔나?

그런데 나는 신기하게도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내 도시락을 나 몰래 낄낄거리며 꺼내서 맛있게 먹었을 친구들의 얼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내 책상 서랍에 넣어 놓은 도시락을 언제? 어떻게? 몰래 꺼내서? 어디서 먹었지?

지금도 미스터리다.


톱밥 난로


외가의 제재소 사무실에 들어가면 톱밥 난로가 있었다.

제재소이니 톱밥은 지천으로 나온다. 톱밥만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고 어릴 적 심심하면 창고에 올라가 푹신한 톱밥 위를 거닌 적도 있었다.

톱밥 난로는 화력이 어마어마하게 좋은데 연소성이 우수하고 통기성도 좋아서 내가 경험한 화력 중에 최고봉이다. 나무의 특성상 한정된 고온 이상 올라가는 법이 없고 화재의 위험성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톱밥 난로에 불을 붙이려면 신문지 한 장 정도면 충분했다.

퇴근할 때는 톱밥 위에 물을 흥건하게 넣어주면 자연스럽게 아래로 스며들어 수 분내 불이 잡힌다.

겨울철 추운 바람을 헤치고 외가에 가면 톱밥 난로의 따뜻함은 훌륭한 위안거리였고 훈훈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하루는 아버지 양복 하단에 구멍이 났길래 여쭤보았더니 난로 가까이 다가가서 불을 쬐다가 양복이 난로 근처에 너무 접근하여 타버렸다고 하신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더니 톱밥 난로 주변에는 옷이 타는 줄도 모르게 만드는 톱밥 신선들의 신통력이 있었다.


화장지


내 기억에 화장실에서 지금의 화장지 사용은 그리 오래전 이야기가 아니다.

중학교 때까지 주로 신문지나 폐지를 사용했고 두루마리 화장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용하지 않았나 싶은데 당시 일회용 화장지가 소형 포장으로 판매되면서 구매와 사용이 편리해진 덕분이다.

그렇게 화장지가 박스로 들어가면 티슈가 되었고 밖으로 나오면 두루마리 화장지로 사용되면서 우리들의 위생이나 화장실 문화에도 일대 개혁이 왔다. 크리넥스 티슈는 당시 화장지 문화의 상징이었고 ‘유한 킴벌리’라는 화장지 박스에 쓰인 광고는 들어서 보여서 많이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화장지 사용이 불가했거나 구매가 힘들었던 시절에 선배들은 어떻게 용변을 처리했을까?

대표적인 애용품은 신문이었다. 아마도 당시 신문 구독률이 높았는데 시사 정보 수집 목적과 폐지를 활용한 화장지 대용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신문을 자기가 쓸 만큼 일단 구겨야 한다. 민들 거리는 신문용지는 용변을 처리하는데 미끈거리고 마무리가 덜된 느낌을 주기 때문에 많이 구겨야 처리가 수월하다.

당시 신문은 한 면이 8절지 크기였으니 한 면을 4 등분해서 미리 비치해 두는 집들도 있었고 그때그때 손으로 찢어서 사용하는 집들도 있었다. 다들 가풍에 맞는 스타일로 사용하는데 웬만한 대가족이 아니면 당일 신문으로 처리하고도 남았고 옆 집에서 남은 신문을 빌려 가는 집도 있었다.

엉덩이에 닿는 느낌은 우선 까칠함. 그래서 정성껏 구겨야 한다.

그다음이 습자지 형태의 일일 달력이 있었다. 습자지의 특성상 보드랍다.

문제는 일일 달력이니 비축 분이 많지 않았고 일일 소비가 끝나면 다음 날을 기다려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누군가 그 집에 있는 습자지 일일 달력으로 용변을 처리한다면 그 사람은 그 집의 숨은 실세이다. 당시에는 16절지 습자지 한 장으로 용변을 처리하는 신공들이 있었다.

그 시절 화장실은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공개적이지 않고 은밀한 곳, 집에서도 제일 후미진 곳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존재감을 과시하며 우리들을 묵묵히 기다리던 오래된 친구 같은 공간이기도 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배변의 긴장감과 쾌감을 공유했던 화장실 사연들은 남들에게 전파나 설명이 힘들어서 공유가 힘든 부분이 있다.

그야말로 자신들만의 화장실 신공이라 할 수 있다.



鸡蛋


鸡蛋也很珍贵。 那是一切都不常见的时期。

首先,由于养鸡场不多,产量也少,所以在婴儿潮时期看到大量世界的孩子们上学的那个时期,用鸡蛋做的菜都是高级菜。

如果我们小时候经常在家人饭桌上放鸡蛋,那么他们家的孩子就是富余家庭的孩子们。 一到午餐时间,妈妈们就会拿出盒饭,把装有饭的盒饭放在自己手里,把小菜放在桌子上,收集起来和孩子们分享,煎鸡蛋放在盒饭的底部,防止其他孩子接近筷子。

农村自然放生健康的土鸡产下的鸡蛋当时不是鸡蛋,而是补药。 用稻草编制10个鸡蛋送给城市亲戚们的情景是常见的时期,每到节日就拿着鸡蛋包在车站徘徊的样子也留下了充满回忆的电影般的场面。

以前历任公司社长的人来首尔留学的时候。

母亲作为礼物送给亲戚家长辈的鸡蛋包夹在穿着校服的肋下走在首尔站前,虽然察觉到一个鸡蛋从倾斜的包裹里掉下来的重量变化,但是因为实在不好意思捡到在人山人海中滚动的鸡蛋,走着走着不知不觉间到了寄宿处,鸡蛋都掉了,看着空包裹,悲伤地呜呜哭了起来。

从某种角度看,这是一段美好的回忆,但对我来说却是一个悲伤的故事。

因为对这位来说,母亲包的鸡蛋包不是喜悦的礼物,而是与丢脸联系在一起的。

这位恐怕每次吃鸡蛋都会想起去世的母亲。


糯米饭


一天妈妈把亲戚家带来的糯米饭包在盒子里。

现在,糯米饭既可以自己做,也有一次性包装,拆开包装,微波加热,3分钟就能吃完的方便食品也很多。 当时糯米饭是只有在节日才能吃的珍贵食物,而且可以吃的时间也包含在节日边缘才能吃到的传统食物。

中午拿出盒饭,分量很轻。 奇怪 糯米饭的信息泄露了吗?

但神奇的是,我一点都不生气。 因为我想起了背着我偷偷咯咯地咯咯笑地拿出我的便当吃得很香的朋友们。

但是放在我书桌抽屉里的便当 什么时候? 怎么做? 偷偷拿出来吗? 在哪里吃的?

现在也是个谜。


锯末炉子


走进外婆家木材加工厂的办公室,就能看到锯末炉子。

因为是木材加工厂,所以锯末随处可见。 有只储存锯末的仓库,小时候无聊的时候也会爬上仓库,在松软的锯末上散步。

木屑炉火力旺盛,燃烧性好,透气性好,是我经历过的最高的火力. 由于树木的特性,不会超过限定的高温,火灾的危险性也相对较小。 要想点燃锯末炉子,一张报纸就足够了。

下班时,在锯末上放水,自然向下渗入,几分钟内就能控制火势。

冬天冒着寒风去外婆家的话,锯末炉子的温暖是很好的安慰,留下了温暖的回忆。 有一天,父亲西服下端有个洞,我问了父亲,父亲说走近炉子烤火时,西服离炉子太近了,烧焦了。

因为玩神仙游戏,都说斧柄不知道腐烂,锯末炉子周围有锯末神仙们,他们连衣服都不知道烧焦了。


卫生纸


我记得卫生间里现在的卫生纸使用不是很久以前的事情了。

到初中为止,主要使用报纸或废纸,卷筒卫生纸是不是从高中时期开始使用的,但当时一次性卫生纸以小型包装销售,购买和使用变得便利。

这样,卫生纸进入箱子后成为纸巾,出来后被用作卷筒卫生纸,我们的卫生和卫生间文化也迎来了巨大改革。 Cleanex纸巾是当时卫生纸文化的象征,在名为"柳韩金伯利"的卫生纸盒上写的广告是听上去的,相信很多人都知道。

那么,在卫生纸不能用、买不起的时候,前辈们是如何处理粪便的呢?

代表性的爱用品是报纸。 当时报纸的订阅率很高,收集时事信息的目的和利用废纸代替卫生纸也起到了一定的作用。

报纸要自己写多少褶皱多少。 柔软的报纸在处理便便时给人一种滑溜溜的感觉,因此只有多皱皱才能轻松处理。

当时报纸的一面是8开纸大小,有些家庭将一面分成4等分,并事先备好,有些家庭则随时用手撕开使用。 大家都使用符合家风的风格,如果不是一般的大家庭,即使当天用报纸处理,也有从邻居家借走剩下的报纸的家庭。

接触臀部的感觉首先是粗糙感。 所以要精心揉皱。

然后是习字纸形式的每日日历。 习字纸的特性上很柔软。

问题是,因为是日挂历,所以储备量不多,而且日消费结束后要等待第二天。 如果有人用他家的习字纸日挂历处理便便,那个人就是他家隐藏的实权人物。 当时有神功用一张16开纸习字纸处理便便。

在那个时期,卫生间以有异味为由,在不公开、隐秘的地方,在家里也是最偏僻的地方占据自己的独立位置,展现存在感,是默默等待我们的老朋友一样的空间。

很多人共享排便的紧张感和快感的卫生间故事,因为很难向别人传播或说明,所以很难共享。

可以说是属于自己的卫生间神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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