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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아 Sep 13. 2023

"어머니, 아이가 친구를 할퀴었어요."

 어린이집에서 쫓겨났다.


  비단이는 다섯 살까지 일반 어린이집을 다녔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의 장애가 표면에 드러날 정도는 아니었고, 그저 조금 발달이 느리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그건 내 알량한 자존심이자 착각이었다.)

   비단이가 느리게 걷는 동안 훌쩍 뛰어버린 친구들 속에서 비단이의 원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수업을 들었고, 뜀뛰기를 했고 미술공부를 했다. "넌 왜 말을 못해? 크롱처럼 알에서 나온거야?"  필터 없이 튀어나오는 아이들의 천진한 말들은 때론 비단이에게 상처가 되었지만 그 누구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말을 못하는 비단이를 점차 외면하거나 막내동생 대하듯 굴기 시작했다. 아이를 가운데에 놓고 강강술래하듯 빙빙 돌았고, 병원놀이를 하면 의자에 앉게 하고 환자 역할을 시켰다. 비단이는 멍한 얼굴로 주사를 맞고 친구들이 주는 비타민을 받아먹었다. 하루종일 다물고 입던 아이의 입에서는 단내가 풍겼다.

  다섯 살이 되면, 어린이집에서는 18명의 아이들에 1명의 선생님을 붙여 한 반에서 보육하게 된다. 원래 한 반 정원은 15명 미만이 규정이지만, 내가 살던 지역은 농어촌 특수라는 정책하에 18명을 한 반에 몰아넣는 것이 가능했다. 다섯 살, 일반적으로 친구라는 개념을 인식하고 자신의 의사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며 점차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자라나는 예쁜 나이.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는 우리 비단이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손이 갈 아이들은 많았고, 앞다투어 선생님의 관심을 요구하는 아이들은 그보다 더 많았다. 그 속에서 비단이는 선생님의 따뜻한 손길은 커녕 눈길 한 번 받기도 어려웠다.

 처음엔 느려도 괜찮다고, 잘 가르쳐보겠다고 말하던 선생님들도 하나 둘 지쳐가기 시작했다. "오늘 아이는 어땠나요?" "뭐, 늘 똑같아요 어머니. 오전에는 울거나 늘어져 있고, 오후에는 낮잠 자고 일어나면 조금 움직이고 그래요."

  시큰둥한 선생님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할 일은 너무 많은데, 아기처럼 종일 무릎을 내어달라고 조르고  매달리는 비단이가 달가울 리 없었다. 그래도 엄마인지라 선생님의 반응이 조금은 섭섭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국공립 통합어린이집은 대기자만 100명이 넘었고, 느린아이 비단이를 반갑게 받아줄 어린이집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아침마다 가기 싫다고 표현하는 아이의  모른척 외면하며 차량에 아이를 실어 보냈다. 당시 나는 둘째 임신 중이었고 입덧이 심해 물도 삼키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를 종일 끼고 있기엔 내가 너무 지쳐있었다. 그리고, 사람 사이에서 자꾸 버텨야 아이도 성장할거라믿고 싶었다.




  어찌어찌 학기 초가 지나고, 여름이 되었다. 조금 적응하나 싶었던 비단이는 점점 공격적 성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툭하면 선생님을 꼬집었고, 친구들에게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틀이 멀다 하고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 비단이가 또 친구 손등을 할퀴었어요." "어머니, 비단이가 하루종일 저를 꼬집고 할퀴어서 손이 엉망진창이네요." 담임교사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나는 거의 매일같이 수화기 너머로 사과를 하고 친구들 엄마에게 잘못을 빌었다. 내 아이가 다쳐서 왔는데 기분이 좋을 엄마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아이는 집에 가서 "비단이가 꼬집었어.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라며 엄마에게 일렀고, 나는 길길이 날뛰는 어머님들의 화를 묵묵히 받으며 연신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매일같이 아이를 앉혀놓고 타이르고 야단치고 손톱을 깎았다. 나중에는 너무 자주 자른 손톱 밑에서 피가 배어났다. 그래도 매일같이 아이의 손톱을 갈고 또 갈았다.

  그러던 어느 날, 비단이를 유독 잘 챙겨주던 친구가 있었다.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비단이를 늘 안타깝게 여기고 같이 놀자고 이끌어주던 아이였다. 그날은 미술수업이 있었고 털실을 가지고 노는 활동이 준비되어 있었다. 친구는 멀뚱히 있는 비단이의 손에 털실을 쥐어주었다. 그런데 하필, 털실은 비단이가 가장 질색하는 촉감이었다. 비단이는 손에 닿은 털실의 감촉에 화들짝 놀랐고 친구의 손등을 사납게 할퀴고 말았다. 약한 아이의 손등은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났다. 아이는 자기가 비단이에게 실수해서 그런것 같다고 했지만, 아이의 부모는 성이 잔뜩 난 채 원으로 쫒아왔다. 아이의 아버지는 삿대질을 하며 경찰에 신고한다고 소리를 질렀다. 원장실은 발칵 뒤집혔다.

  연락을 받자마자 뛰어왔지만 성난 학부모들은 이미 돌아간 뒤였다. 아이는 짐짝처럼 구석에 방치되어 눈총을 받고 있었다.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사과를 한 뒤 머리를 숙인 채 아이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원장과 담임은 당장이라도 퇴소했으면 하는 눈치를 보냈지만 애써 못본 척 했다. 당시 나는 둘째 임신중이었고 입덧이 너무 심해 물도 삼키지 못할 때였다. 스트레스로 하혈도 있었던 차라 비단이를 집에 데리고 있기가 솔직히 너무 벅찼다. 우리는 그렇게 뒤통수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 간 동네를 걷듯 막막하고 혼란스러웠다.

  

  얼마 뒤  비단이의 어린이집에서 정기 학부모 상담이 있었고, 나는 그날 밖에서 대기하면서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그간 아이의 담임은 아이가 문제를 일으킬때마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부모가 억지로 일반어린이집에 보내놓고 버티고 있다며, 원에서는 열심히 설득중인데 부모가 말을 듣지 않는다는 식으로 하소연하며 입장을 변호하고 다른 학부모들을 달래고 있었다는 것을.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우리 아이는 심각한 문제아이자 지탄받아 마땅한 장애아였다.  손가락질의 한가운데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가 비로소 보였다.

  깨달았다. , 우리 비단이는 이제 일반 아이들 속에서 더 이상 있을 수 없구나. 내 욕심이, 아이에게 상처를 줬구나. 우리 아이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에게도 죄를 지었구나. 이 좋은 세상, 아픈 몸으로 살게 한 것도 모자라 나는 또 다시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구나. 해맑은 아이의 눈을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부끄러웠다.더는 버틸수가 없었다.

  나는 얼마 뒤 출산을 했다. 내가 집을 비운 동안, 비단이는 등원하지않고 집에서 남편과 함께 지냈다. 퇴원하자마자 아이를 데리고 어린이집을 퇴소했다. 빈말로도 담임교사는 아이에게 잘 가라는 인사조차 해주지 않았다. 비단이는 늘 해왔던 것처럼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몹시 차가운 바람이 불었고 우리는 양 손 가득 짐을 든 채 집으로 향했다. 찬바람에 얼어붙은 손등을 스치는 바람이 못 견디게 따가웠다.


  남편과 나는 고심 끝에 장애전담 어린이집의 상담을 예약했다. 병원 예약도 서둘렀다. 아이와 함께, 정면돌파를 할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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