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성 범주에 있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공통된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자기의 몸을 믿는 것,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믿는 것, 마지막으로 가장 힘든 것은 다른 사람을 믿는 것이다.
아직, 고작 칠 년 밖에 살지 않은 내 아들은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애정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자기를 낳아준 부모에게조차, 완전하게 안정된 애정을 확신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쓰다듬어주고 예쁘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주어도 아이는 항상 불안하고 초조해한다. 비단이의 경우 자기의 몸이나 세상을 믿는 것보다 사람을 믿는 것을 가장 어렵게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비단이는 항상 사람에게 치대고 애정을 갈구한다. 학기가 바뀌면 담임선생님에게 끝없이 애정을 확인하고, 자신을 얼마나 사랑해주는지 살핀다. 자신을 예뻐한다고 믿게 된 상대가 다른 이에게 애정을 주면,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감정 상태가 흔들리곤 한다. 결과적으로는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화를 내고 좌절을 드러내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애정을 되찾기 위해 눈치를 보고 애쓴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나 역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리곤 한다.
비단이는 최근 조금 성숙해졌다. 나이를 먹는 탓인지, 조금씩 자라고 있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세상을 향해 조금은 귀가 트이고 눈이 열리는느낌이 든다. 그래서인지, 미운 7살을 기어이 하고 지나갈 모양이다. 아픈 아이라고 해서 항상 안쓰럽고 갸륵할 것 같다면 큰 착각이다. 이 나이 때 말을 안 듣는 것은 만국 공통인 듯 하고, 연령에 걸맞는 못된 짓은 역량껏 다 하고 지나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듯 하다.
'일춘기'가 시작된 비단이는 이전에는 그냥 귀찮아서, 거절하나 안 하나 별 차이가 없어서 시키는 대로 했다면 이제는 완전히 판이 달라져 버렸다. 자기가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면 배가 고파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식탁을 살피고, 이내 자리에서 이탈해 버린다. 지시사항을 분명 알아들었지만 내키지 않으면 느긋하게 딴짓을 하다가 어슬렁대며 나타나서는 열심히 하는 시늉을 한다. 집중하지 않아 와장창 사고를 치고는, 내가 째려보면 못본 척 고개를 돌리거나 멋쩍게 웃고는 도망가기도 한다. 가끔은 동생과 함께 친 사고임을 알면서도 "비단아 네가 했어?"라고 야단치는 폼을 잡으면, 뻔뻔한 표정으로 자기가 한 게 아니라고 부정하며 도리도리를 해댄다. 딱 하는 짓은 일곱 살 개구쟁이인데, 언어적 표현이 안 되다 보니 말만 안한다 뿐이지 행동과 표정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중이다.
우리는 그런 아이의 변화가 너무나 반갑고 기특하면서도 때론 현타가 온다. 죽을 똥을 싸고 칠 년이나 키웠는데, 이제서야 겨우 도리도리 하고 손 내저으며 아니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고 기특해해야 한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지만 그렇게밖에 내가 못 낳아준 것을 어찌하랴. 우리는 요즘 작은 것에도 실실 웃는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먼저 제풀에 죽을 것 같아 그렇게라도 웃으려고 노력중이다. 행복도 결국 느끼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감정 같다.
비단이 나이 일곱 살, 지금은 10월이다.
대부분의 장애아 키우는 가정들이 이때쯤 되면 사정이 비슷할 것이다.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시기가 되면, 엄마들은 학교 진학이 결정되는 것에 따라 지금 하는 치료를 계속 이어 나갈지, 아니면 줄이거나 중단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더불어, 학교를 붙는다 해도 그에 맞추어 스케줄을 다시 짜는 부분도 골칫거리다. 일단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처럼 재량껏 수업 일정을 조절하기가 어렵고, 워낙 일찍 하교하다보니 방과 후 시간을 치료만으로 모두 커버하기에는 경제적으로 몹시 휘청일 수밖에 없다.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된다손 치더라도 아이를 데리고 계속해서 이동하거나 돌보아야 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 시간을 한 사람이 온전히 떠안기도 쉽지 않은 부분이다.
또 다른 변화는, 이쯤 되면 아이들의 '한계치'를 대부분의 부모가 받아들이고 노선을 새로 정비한다는 점이다. 병원에서도 대개 일곱 살 정도가 되면 엄마들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한다. "어머니, 이제 그만 아이를 내려놓으시고, 어머니의 삶으로 돌아가세요. 아이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는 여기입니다." 엄마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 허탈함과 분노, 수용과 인정을 순서대로 느끼며 조금씩 아이를 내려놓음으로서 아이와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는다. 더 이상, 내 품에 숨겨 살기에 아이는 너무 커버렸고 우리는 이제부터 계속해서 비주류의 삶을 살아내야 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정하면서도 현실은 참 쓰다.
사실, 아이가 장애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엄마들에게 자신의 삶은 이미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 역시 삼십 대 여자, '미아'로서의 삶에 대한 욕망은 아이를 깨달으면서부터 지운지 오래다. 다만, 아이가 더 좋아질 수 있을거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해 아이를 두레박에 태운 채 계속해서 줄을 내리다가, 문득 이미 바닥에 도착했음을 깨닫고 아이를 끌어올려 꺼내줄 시간이 된 것이라 생각한다. 비단이가 학교를 갈 수 있을지, 제대로 졸업은 할 수 있을지, 더 나아가 '무엇인가 될 수' 있을지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여태까지의 삶이 인트로였다면 이제부터가 진짜 본편이라는 것이다.
이제 나와 내 아이는 좋든 싫든 세상 밖에서 달갑지 않은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살아야 한다. 꽃길만 걷게 해주고픈 소중한 내 아이를 꽃길에 올려놓아줄 수는 없지만, 거칠고 투박한 돌길을 함께 걸으며 뾰족한 돌을 피하게 알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아이가 부디 나에 대한 믿음과 애정을 버리지 않아주기를, 설령 '엄마 사랑해' 소리를 평생 듣지 못한다고 해도 내가 아이를 사랑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니 비단이도 내 마음을 의심없이 받아줄 수 있기를. '배려'라는 이름으로 항상 '열외'당할 우리의 앞날이 무사하기를. 나는 죽도록 행복해지고 싶다. 헛된 희망이 아닌, 가질 수 있는 행복을 찾아 앞으로도 꾸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