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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아 Sep 18. 2023

조금 손해보며 사는 것도 괜찮아

닥치는대로 닥치고 하나씩 해나가면돼

"우리 집에서 라면먹고 갈래?"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인들에게 사랑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마법의 문장이 있다면,

엄마들 사이에서도 처음 본 엄마들과 100% 대화를 트는 마법의 문장이 존재한다.

  "아이가 몇개월인가요?"

   

  신기하게도 어느 장소에서나 엄마들은 이 말을 들으면, '나와 대화를 원하는 신호군!' 하고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사람을 사귀는데에 다소 서툰 나도 이 마법의 문장을 통해 비단이와 관련된 새로운 사람들과 안면을 많이 트게 되었다. 아무래도 자식 키우며 호된 매운맛을 한번씩 본 사람들이라 이해의 폭이 넓었고 배려가 깊었으며, 대부분 대화가 쉽게 통했다. 겪어온 삶의 파장이 비슷하게 오다보니 이야기를 나누면 주파수가 맞는다는 느낌이 들어 편안하고 재미있었다. 얼핏 보기엔 비슷해 보이지만 아이들은 다 각각의 어려움이 있었고 각 집마다 고민이 없는 집은 없었다. 삶에 주어지는 무게의 달란트는 모두가 갖고 있다. 다만 그 무게를 어떻게 느끼느냐의 차이 같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자주 놀라고 배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 주변 대부분의 엄마들은 힘든 일을 맞닥뜨렸을 때, 그냥 '아 힘들다! 조오올라 힘들다!' 하고 냉커피 한잔 들이키고는 쿨하게 넘긴다. 얼핏 당연한 말처럼 보이지만, 적어도 내게는 이것이 몹시 어려운 일이었고 그래서 그들의 삶의 태도가 궁금했다.

  아이가 아프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힘든 상황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원인을 찾으려 하고, 탓을 하는 내 성격의 문제가 가장 컸다. 가령, 아이가 길을 걷다가 집중하지 못해 다리를 삐끗하거나 넘어진다. 나는 걸음 하나 집중해서 걷지 못하는 아이에게 화가 나고, 아이가 징징댈때마다 안아버릇해서 걷는 방법을 잘 못 깨우친건 아닐까 하는 자책을 했다. 종국에는 아이를 잘 낳아주지 못한 나를 탓했고, 모두가 멀쩡한 아이를 키울 때 자격도 없는 내게 아픈 아이를 점지해준 하늘을 원망했다. 이 악순환의 생각 반복은 결국 나를 병들게 했고 옆 사람을 지치게 했고 아이를 슬프게 했다. 나의 이런 습성은 비단이의 꼴통 짓이 정점을 찍어가던 시기에 최고조에 이르렀고 결국 부처같은 내 남편의 입에서 "나는 비단이보다 너랑 사는 게 더 힘들어!" 라는 외침까지 나오고야 말았다. 잘못된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사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고쳐나가야 되는지를 잘 몰랐다. 그렇게밖에 살아오지 않았으니, 다른 로직을 알 턱이 없었다.

  성격상의 부류에서 사람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고 한다. 어떠한 문제가 생겼을 때, 한쪽 부류는 원인을 찾아서 그 속에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든다. 다른 한 부류는 이미 생긴 문제는 돌이킬 수 없으니, 앞으로 나아갈 방법을 문제 안이 아닌 밖에서 모색한다. 나는 절대적으로 전자였고 남편은 절대적 후자였다. 문제 해결 방식의 접근 자체가 달랐던 우리는 신혼 때부터 이 부분에서 엄청나게 부딪쳤다. 그래도 우리 둘의 문제일 때는 어떻게든 풀어갈 수 있었지만, 아이가 생기고 책임져야 할 상황과 역할이 많아지면서부터는 판이 달라졌다. 빠르게 해결하고 풀어나가야 할 상황은 자꾸 생겼지만 나는 생각의 전환이 잘 되지 않았고 이는 싸움으로 이어졌다. 한창 이런 고민이 많을 시기에 만난 사람들은 내게 많은 것을 달라지게 했다.




  센터에서 친해진 s언니는 위로 아이 둘을 키우면서 늦둥이로 얻은, ADHD를 겪는 막내가 있다. 사실 아이 둘 키울 만큼 키워놓고 이제 좀 편해질 시기에 덜컥 찾아온 아픈 셋째가 힘들 법도 한데, 아이를 셋 키운 엄마의 '짬빠'는 역시 달랐다. 언니는 어지간한 일에는 꿈쩍하지 않았고, 참으로 단단하게 아이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그날도 비단이는 센터 수업을 받으며 엉엉 울고 악을 쓰고 있었다. 옆방에서는 s언니의 아들내미가 교실에서 뛰쳐나오려 하고 있었다. 양쪽에서 벽을 차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밖에서 그 소란을 고스란히 느꼈지만 수업 중에 끼어들 수 없어 발만 동동대고 속만 태우고 있었다. 이 좋은 날씨에 여기서 이러고 있는 우리가 너무 속상하고 비참하기까지 했다. 마치 부조리극의 한 장면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언니에게 징징대며 말했다.

  "언니, 나는 이럴 때마다 정말 감정이 주체가 안 돼. 요즘 자려고 누우면 잠이 안 온다? 내가 죽고 나면 비단이는 어떡하지? 혼자 살 수 있을까?"

  언니는 우아하게 일어나더니 종이컵을 정수기에 대고 얼음 버튼을 꾹 눌렀다.

 "미아야, 오는건 몰라도 가는 데는 순서 없다? 당장 내일 일도 모르는 세상에 고민을 왜 땡겨서 하니?"

 "언니도 참, 당연히 내가 먼저 죽겠지. 그럼 우리 비단이는 혼자 남는데, 둘째가 너무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나 요새 그런 생각하다보면 잠이 안 와."

  언니는 종이컵에 가득 얼음을 담아서 내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미아야. 너 기운이 남아도니? 그냥 오늘 저녁에 뭐 해 먹으면 맛있을지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애들을 일찍 재우고 좀 쉴지 고민해. 너 요즘 다크써클 장난 아닌거 알지? 쉰 소리 그만하고 얼음이나 먹어."

  나는 얼떨결에 언니가 쥐어준 얼음을 까드득 깨물었다. 속이 동그랗게 빈 정수기 얼음은 얼핏 약해보였지만 힘주어 깨물어도 깨지지 않았다. 나는 문득 언니가 정수기에서 나오는 얼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약해보이지만 단단한, 아이 셋을 키우며 다져진 내공으로 쉽게 깨지지 않는 언니의 애티튜드가 부러웠다. 과연 거울을 보니 잠을 못자 파르르 눈밑이 떨리는, 퀭한 얼굴의 부스스한 여자가 있었다. 그런 내가 스스로 좀 한심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비단이가 한창 공격성이 심할 때, 매일같이 전화벨만 울려도 긴장하던 시기가 있었다. '혹시나 어린이집에서 친구를 때렸나? 아니면, 어디서 넘어졌나?' 그때쯤 친해진 같은 반의 k언니는 아들만 셋을 키우는 대단한 여성이었다. 남편까지 아들 넷을 키운다고 늘 한탄하던 언니는 내가 최근에 심해진 전화벨 공포증을 호소하자,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더니 이렇게 말했다.

 "미아야, 언니는 어린이집에서 전화오면 뭐라고 하는 줄 아니?"

 "음... 보통 무슨 일 있어요? 하고 묻지 않아요?"

 "그치? 근데 난 '선생님, 때렸어요 맞았어요?' 하고 묻는다? 때렸으면 지금 당장 가고, 맞았으면 그냥 이따가 데리러 갈게요, 라고 해. 내가 하도 그러니까 지난번에는 선생님이 뭐라시는 줄 아니? 어머니, 준이가 먼저 맞았는데 서로 한대씩 쥐어박고 끝난 것 같으니까 이따가 오세요 그러는거 있지?"

 "언니가 아들만 셋인데 얼마나 별의 별 일을 다 겪었겠어. 우리 둘째는 까불다가 어린이집 창문에서 떨어진 적도 있고, 첫째는 온 얼굴이 오선지처럼 다 긁혀온 적도 있어. 나도 그땐 첫애라 엄청 열 받아서 막 화내고 들이박고 그랬었지. 근데, 지금은 그냥 왠만하게 다쳐서 온 건 사과 한마디 받고 말고, 우리 애가 때렸다고 하면 문앞에서 기다렸다가 어떻게든 만나서 사과하고 그래. 때로는 좀 둔하고 손해보며 사는게 답이더라. 그냥, 닥치는 대로 닥치고 하나씩 헤쳐 나가면 되는 것 같아."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살았다. 혼자 늘 마음이 급했고, 당장 아이가 달라지지 않으면 앞으로 뭔가 큰 일이 날 것만 같았다. 내가 뭔가를 해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 불안했지만 막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 속에서 나는 그저 좌절할 줄만 알았을 뿐, 앞으로 나아가는 부분에 대한 생각은 자꾸 뒤로 밀어놓았던 것 같다. 세상을 둥글게 사는 법을, 나는 사람을 통해 조금씩 배워나가는 중이다.

  건강한 자존감이란 부정적 감정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살아가는 것은 마치 파도 위에 서 있는 서퍼와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넘어지지 않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힘과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나는 지금 잘 버티고 있고 옆에서 나의 손을 잡아주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오늘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다정하고 달콤하다.  

 





*참고문헌: 김수현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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