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도 태어났으니 어떻게든 살아야 하잖아..
한번 울면, 우리 한 번은 웃자
언제부턴가 비단이는 동생이 울거나, 내가 소리를 지르면 바로 귀를 틀어막고 구석으로 뛰어갔다. 나는 한동안 이 행동이 몹시 언짢고 불쾌했다. 아이에게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이런 고민을 말하자 비단이를 진찰한 선생님이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어머니, 우리가 보는 세상은 같은 프레임에 있어도 그 중에서 중요한 것과 흘려서 보는 것이 있잖아요. 비단이는 그 필터가 없다고 보시면 되요. 모든 것들이 다 같은 크기와 비중으로 다가오는 거에요. 소리도 마찬가지에요. 냉장고 도는 소리, 타자를 치는 소리, 티비소리가 다 같은 크기로 들려요. 그런데 엄마가 소리를 질러요. 동생이 웁니다. 비단이는 그 소리가 갑자기 엄청나게 크게 들려요. 자체적 디제잉 같은거죠. 그래서 귀를 틀어막는거에요. 그 소리 자극이 너무 고통스러우니까요. 차라리 그럴 땐 아이를 잠시 공간에서 분리시켜 주세요. 애가 너무 힘들겠네요."
선생님의 입으로 '고통스럽다' 라는 표현을 듣자 나는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비단이는 내가 소리를 지르면 무시해서 귀를 막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소리가 너무 괴로워서 귀를 막은 것 뿐이었다. 아이로서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든 발 붙이고 살아보려는 발버둥이었던 것이다. 정작 아이 앞에서 눈가리고 귀를 막고 있었던 것은 엄마인 나였다. 불시착한 외계인처럼 소통이 힘든 삶을 사는 내 아이에게, 나는 일반인들과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늘도 부족함 지수를 한층 더 쌓은 엄마가 되었다.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늘 같은 마음으로 살기란 참 쉽지가 않다. 벽에 대고 말하는것 같은 느낌이 절망스러워서, 답답해서, 칠년이나 죽어라 키웠는데도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 아이가 미워서 화를 낸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하다가, 화가 난 내 얼굴을 보며 몹시 슬프고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이곤 한다. 말이 아닌 표정으로도 이렇게 많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아이를 통해 알았다. 서글픈 표정으로 비단이는 내게 말하고 있었다. '엄마, 이렇게 태어난 걸 어떡해. 근데, 나도 살아야 하잖아. 어떻게든 살아봐야 하잖아....' 비단이가 이렇게 절규하는 것을 느끼면 가슴이 먹먹하면서 나도 함께 무너져버린다. '그래, 너도 얼마나 답답하겠니. 그런데 비단아, 엄마도 너무 답답해. 그래도 미안해....'
자폐가 있는 아이들은 자기가 만든 자기만의 세상을 산다. 그 속에서 아이는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아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안락한 자기만의 세상을 벗어나야만 한다. 마치 엄마의 뱃속에서 처음 나오는 갓난아기처럼, 늘 두렵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세상에서 부딪히고 깨지며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우리 아이들의 숙명이다. 괴로울것을 알지만 아이를 끄집어내야만 하는 것. 슬프지만 냉혹한 현실이고 부모인 나는 아이가 살아남도록 절벽 끝으로 아이를 내몬다. 우리는 오늘도 불확실한 궤적을 위태롭게 그리고, 허우적대며 서로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가끔 길에서 마주치는 성인 장애인과 함께인 가족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마디가 얽히도록 단단히 깍지끼워 잡은 손과 입꼬리에는 늘 긴장이 서려 있다. 그래서일까, 부모의 얼굴은 단단한 벽에 새겨진 벽화같다는 느낌이 든다. 얼마나 많은 긴장과 눈물이 그 손 안에 들어있을까. 그들이 틀어쥐고 있는 것은 죽는날까지 놓을 수 없는 자식에 대한 미안함 같아 나는 그들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곤 한다.
비단이가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가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예전같지 않음을 피부로 느낀다. 아이가 "이야" 하고 소리를 내면, 사람들은 힐끔대며 자기도 모르게 한 발씩 옆으로 물러선다. 아이와 내가 걷는 주변은 사람들과 한 발자국씩의 거리가 만들어진다. 그 거리만큼 비단이가 세상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 슬프다가, 어느새인가 그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담담해하는 내 모습에 더 놀라곤 한다. 장애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담담해지는 과정 같다.
어제 저녁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저녁을 차려 먹었는데,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비단이가 먹는 것이 영 시원찮았다. "어쩔 수 없어, 차린게 이게 다니까 그냥 먹어." 비단이는 대충 먹는 시늉을 하고 저만치 놀러 가버렸다. 주섬주섬 상을 치우는데 둘째가 어느샌가 달려와 한켠에 있던 식빵 봉지를 찾아왔다. 빵을 꺼내 둘째 손에 들려주고 보냈는데, 어디선가 비단이가 두다다다 달려왔다. 마치, 치사하게 동생만 주냐는 듯한 원망의 눈초리를 쏘아보이고는 빵을 잽싸게 물고 돌아서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웃겼다. 남편과 나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서서 한참을 웃었다. 가끔 이렇게 비단이의 엉뚱한 모습에 웃음이 난다. 장애아이를 키운다고, 하루종일 우울할 수는 없다. 한 번 울면, 한 번은 또 이렇게 웃는다. 그렇게 돌탑을 쌓듯 우리가 사는 하루가 또 쌓인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돌탑이지만, 차근히 쌓다가 무너지면 한번 웃고 다시 쌓으면 된다.
시간이 지나면 나보다 한 마디는 커질 내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아주 먼 훗날 돌아보았을 때 눈물보다는 웃음이 한층 더 쌓여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쌓인 돌탑이 하늘에 닿는 날, 우리가 웃으며 헤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오늘도 상상의 허공에 눈물 한 방울을 찍어 웃고 있는 얼굴을 그린다. 또르륵, 돌탑 위로 한 층이 더 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