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한 삶과 죽음에 대해 읽고 쓰기
6년 전, 11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심신의 여유가 생겼을 때 제주의 부모님 집에서 한 달 조금 더 지냈다. 이제 90의 나이로 일상의 삶에서 남의 도움이 필요한 아버지, 그리고 일상적 도움이 필요한 남편과 살아가고 있는 88세의 어머니. 1~2년 전만 해도 딸의 택배 짐을 등에 지고 가게로 향하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빈 몸으로 좇아가며, 가슴이 조금 저릿했었다. 그때의 기억이 눈에 선한데, 그새 내 부모는 기억 속의 부모가 아니었다. 이토록 자연스럽고 당연한 변화들이 내 가슴 속에서 소화되고 받아들여지기까지는 꽤 긴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했다.
늙음과 질병, 죽음이라는 삶의 과정들이 내 일상으로 들어와 앉은 듯한 시간들 속에서 우에노 치즈코의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을 접하게 되었다. ‘죽음’을 다룬 책을 처음으로 읽게 된 것이다. 치즈코의 ‘싱글 3부작’의 완결판이라고 하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집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탐색기이다. 익숙한 자신의 공간에서 필요한 간병(식사간병, 배설간병, 입욕간병 등)과 의료와 간호를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죽어갈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성찰서이다. 죽음에서의 당사자주의라고나 할까? 당연히 이러한 죽음은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심심치 않게 얘기되는 방치된 죽음, ‘고독사’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노인이 자기 집이 있는데도 삶의 마지막을 집에서 보내지 못하는 것은, 놀랍게도 그리고 가만 생각하면 매우 자연스럽게도 가족 더 정확히는 자식들 때문이라고 한다. ‘간병’ 등 죽음의 과정을 현실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안심과 정당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 시설이나 병원이라는 것이다. 간병 수준이 높아지고 그 기간도 길어지고 핵가족화 되어가면서 ‘가족’이 간병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다. 근대화가 되어가면서 간병이나 임종뿐만 아니라 그동안 가족과 마을 공동체에서 맡아왔던 많은 우리의 일상이 산업의 영역, 전문가의 영역, 자본의 영역으로 빠르게 넘어갔다.
그렇다면, 현실은 병원에서의 죽음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치즈코의 책에는 환자의 사망은 곧 의료의 패배인 연명 치료의 현장에서 환자를 살려내려는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던 의사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환자가 급하게 병원으로 실려오고, 심폐소생술을 하다가 노인의 갈비뼈가 부러지고, 괴로움에 찡그리는 노인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죽음의 병원화’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된 의사들의 이야기이다. 이런 죽음 말고 조금 더 평온한 죽음의 순간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런 문제의식으로 그들은 가정임종의료를 담당하는 의사가 되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고관절이 부러져서 수술을 하느라 3주간 병원 입원을 하신 적이 있었다. 그 기간 동안 가까이 살고 있는 오빠들이 교대로 24시간씩 병원에 상주하면서 아버지를 돌봤다. 밤새 잠을 자지 않고, 뽑으면 안 되는 주사바늘을 빼버리고, 움직이면 안 되는데 자꾸만 화장실을 가겠다고 침대를 내려오려 하는 아버지를 감당하느라 모두가 녹초가 되어버린 3주간이었다. 내가 보기에 아버지는 이미 그 때 병원이 자신에게 얼마나 불편한 공간인지, 삶이든 죽음이든 병원에 이렇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없음을 온몸으로 표현하셨다고 생각한다.
내 앞에 힘든 과제처럼 던져진 ‘죽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맞아야 할지 버거워하던 와중에 아버지는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아버지와 함께 살며 돌볼 수 있는 가족이 없는 상황에서 집에서의 죽음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나는 어머니와 함께 하는 삶을 결국 결정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나의 교통사고, 94세의 어머니와 함께 하는 일상 등을 겪으며, ‘늙음’ ‘죽음’ 등 우리 모두의 현실이면서도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았던 것들이 현실 속으로 성큼 들어왔음을 느끼게 되었다. 나에게는 오랫동안 현실감을 주지 못했던 ‘죽은’ 언어였던 죽음이 이제 살아 꿈틀거리며 나를 건드리는 ‘살아있는’ 언어가 되었다. 죽음은 ‘언젠가’ 우리 모두의 일이다.
그래서 죽음에 관한 나의 책읽기는 계속 될 것 같다. 책을 읽다보면, 죽음의 순간에 대한 소소한(?) 과학적 지식들이 위로와 안도를 안겨주기도 한다. 예를 들면, 임종 직전 뇌에서는 엔돌핀이라는 진통제가 한꺼번에 나와 몰핀과 똑같은 작용을 해서 사실상 환자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아, 죽음의 순간이 끔찍하고 가능한 피해야 할 그런 시간만은 아닐 수 있겠구나! 누구나 다 겪지만 겪은 사람은 죽어서 말이 없고, 살아있는 우리는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미지의 영역인, 그래서 공포스러운 죽음 앞에서 아주 조금씩 편해져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가까운 이들의 죽음의 순간을 어떻게든 함께 해야 할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팁들도 제공해준다. 일예로, 오감 중 청각은 끝까지 유지되므로 죽음의 순간 함께 있는 가족이 계속해서 말을 걸어주는 게 좋다고 한다. 사람은 자신이 말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남의 이야기를 듣는 존재구나! 그래서 삶의 순간이든 죽음의 순간이든 말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구나! 이것 역시 청력이 정상적일 때의 이야기이긴 하겠다.
또한, 암에 대한 공포를 완화시켜주는 내용도 있다. 젊어서와 달리 나이가 들어서 암이 사인인 경우는 죽는 시기를 가늠할 수 있어 미리 준비할 수 있고, 신체의 활동 수준이 말기까지 유지되며, 마지막까지 의식이 또렷하고, 혼수상태에 빠지면 단시간에 죽음에 이른다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정임종의료를 하는 의료인들 중에는 나이 들어서 암으로 죽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은 현재 살아있는 우리 모두에게 다가올 미래이다. 우리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한없이 무력한 존재이며, 늙어간다는 것은 이러한 무력함이 일상에서 낱낱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남에게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자기해방’의 힘이 필요하다고 치즈코는 말한다.
죽음에 대해 읽고 생각하다보면, 나약하고 무력한 우리들이 순간순간 애쓰며 살아가는 삶의 의미에 대해서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다. 의미 있는 삶이란 뭘까? 그럼 무의미한 삶도 있는 걸까? ‘고독사’, ‘안락사’, ‘존엄사’ 등 죽음에 대한 말들을 들으며, 나는 ‘좋은’ 죽음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했었던 것 같다. ‘무의미한’ 삶을 연명하지 않는 것, 삶에 연연하지 않으며 ‘죽음’이라는 현실을 담담히 받아 안고 가는 것 등등이 내 머리 속에 어렴풋이 그려져 있었나보다.
그런데, 세상에 ‘무의미한’ 삶이라 할 수 있는 삶도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그런 기준을 알게 모르게 들이대고 있었던가? 우리는 누가 특별히 훌륭해서 존엄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부여받고 현실을 살아가는 생명이기에 존엄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진정으로 그러한가? 우리의 일상의 삶이 그다지 존중받지도 존엄하지도 못한 것이라면, 존엄사는 과연 가능할까?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질문을 꼬리를 물 것이고, 나는 읽고 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