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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순 May 24. 2023

살던 집에서 자연스럽게 죽어가기

왕진의사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마을을 꿈꾸다

“나는 마을에 가방 들고 아픈 사람들 집을 방문하는 왕진의사가 있으면 너무 좋겠어. 그러면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이 얼마나 마음이 놓일까? 돈도 얼마 안 드는 일일 거 같고.”

미국 사는 언니와 통화하면서 내가 했던 말이다. 아마도 앞으로의 삶에 대한 바램을 얘기하다가 나온 이야기였던 것 같다. 

내가 바라는 세상의 모습엔 ‘발전’이라는 막강한 힘에 부서지고 사라져버린 과거의 것들이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자주 봤던 모습은 아니지만, 청진기가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마을을 돌던 ‘왕진의사’라는 존재 역시 그중 하나이다. 그런데 얼마 전 책을 통해 현실의 왕진 의사를 만났다.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의 저자 양창모 씨이다. 책을 읽고 나서 검색을 하다 보니 작년에 <유퀴즈>에도 출연해서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 분인 것 같다. 

양창모 씨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에서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죽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의사가 환자를 찾아가는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하반신 마비인 사람과 두 다리 멀쩡한 사람이 만나야 한다면, 누가 누구를 찾아가야 하느냐고 묻는다. 

내가 어렸을 때, 언니는 내가 살던 집에서 첫 조카를 낳았다. 17년 전, 할머니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돌아가셨다. 예전에는 생명의 탄생도 죽음도 거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대부분의 경우 병원에서 삶을 시작하고 마무리한다. 전문적인 의료진과 비싼 의료기구들이 갖추어진 곳에서 태어나고 죽어가는 것이 이 시대의 발전을 말해주는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여자가 말하는 남자 혼자 사는 법』에서 우에노 치즈코는, 병원 내 사망은 ‘근대화’의 상징이자 유족이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알리바이를 성립시키는 데 이용된다고 말한다. 

탄생과 죽음의 장소로 병원과 집 중에 어느 곳이 나을지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그리고 상황마다 다를 것이다. 그래서 많은 문제들이 그렇듯이 어느 것이 정답이라거나 바람직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집에서 태어나고 죽기를 원한다면, 대단한 각오와 준비 없이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병원은 짧게 진료하고 최대한의 이윤을 뽑아내는 것을 제일의 목표로 삼는다. 그야말로 ‘의료산업’이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 앞에서도 병원의 이 목표는 변하지 않는다. 시간이 곧 금인 ‘산업’의 관점에서 보자면, 별로 돈도 안 될 환자의 집을 찾아다니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어야만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자기 집에는 아픔을 경감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자기 스타일대로 살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 익숙한 환경, 가족, 침대 등. 거기에 24시간 언제든 대응하는 체제를 갖추고 집에서도 최대한 고통을 완화해줄 수 있는 의료와 간호가 갖추어지면, 집에서 안심하고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기반이 완성된다. 이러한 요소가 결과적으로 아픔을 경감시킨다고 본다.” 『나홀로 부모를 떠안다』에 나오는 말이다. 나에게 익숙한 공간에서 나를 돌보는 가족들과 함께 있다는 안도감과 편안함이 심신의 진통제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 물론 집이라 하더라도 그곳이 방치와 멸시의 공간이었다면, 지금까지 그러했듯 죽는 순간까지도 고통의 공간이겠지만. 

테레사 수녀는 평온하고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야말로 삶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성취라고 하였다. 당연하게도 ‘전문 의료진의 손에 맡겨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이 가장 위대한 성취를 가능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미국 독일 일본 등 외국에서는 초등교육에서부터 죽음과 임종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죽음에 관한 단순한 정보에서부터 가족에게 부담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는 죽음, 의미 있는 사람과 함께 준비하는 죽음, 내 삶의 흔적을 정리하는 죽음, 통증 없고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 대해 각자 답을 찾아가는 것 등이 교육 내용이다. 

우리의 임종문화를 보면, 대부분의 경우 임종 당사자는 자신과 관련된 선택과 결정에서 자연스럽게 배제된다. 죽음의 과정을 함께 의논하고, 추억을 나누고, 환자가 말을 할 수 없다면 이야기를 들려주고, 손을 잡고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사랑의 행위’들이 평온하고 존엄한 죽음을 위해 가장 절실한 것 아닐까? 그리고, 집에서도 이런 평온함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는 안전한 의료적 도움을 줄 수 있는 왕진의사의 존재가 꼭 필요하다. 

할머니가 집에서 숨을 거두는 것을 옆에서 지키고 보내드렸던 어머니. 아버지가 위독해져서 급하게 입원하실 때 그 과정에 개입하지 못하고 그저 지켜보실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새벽에 잠이 깨어 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늙고 병들면 죽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왜 병원 가서 고생고생하다 가야 하는지, 의료의 발전이 자신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평소에 잘 안 쓸 법한 단어들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시던 어머니. 

그동안 어머니와 나눴던 대화를 돌아보면, 낯선 공간에서 낯선 조치들을 받아들이며 머무는 불편한 병실보다는 익숙하고 편안한 집에서 죽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어머니 마음 같다. 조만간 어머니와 같이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나누고, 글로도 남겨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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