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정말로 ‘혁명’적인 책 『노인복지혁명』 이야기를 한 번에 마치기엔 미련이 남아 이어가 본다.
몇 번을 이어갈지는 아직 모르겠다.
앞서 말했듯이 저자는 ‘어딘가에 몸져누운 노인의 집단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라는 의심을 버리지 못한 채로, 1987년 덴마크를 다시 찾았다. 방문한 요양원은 개인마다 현관이 달린 약 7평 이상의 자기 방이 있고, 방마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커튼, 융단, 가구, 식기, 그림, 소형 피아노까지 놓여 있었다.
요양원의 직원들은 그녀에게 일본에 비해 좁아서 무척 놀랐겠다고 말했다. 일본처럼 잘 사는 나라는 자신들보다 훨씬 더 나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일본 정도의 나라라면 1인당 면적이 10평 이상은 되겠지 생각했던 것일까? 실제 일본은 3평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현재 우리의 관점에서 봐도 40여 년 전의 덴마크 요양원은 가닿을 수 없는 천국 같은데, 1988년부터는 요양원 증설을 중단했다. ‘삶의 지속성’을 위해 시설중심에서 재택 수발 중심으로 대전환을 시작한 것이다. 지금의 덴마크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원래 덴마크는 방문 치료를 하는 가정의 제도가 뿌리내려져 있어서, 집이든 요양원이든 사는 곳에서 치료를 받기가 쉽다. 이에 비해 스웨덴은 방문 치료보다는 병원 치료에 집중되어 있어서, 많은 고령자들이 장기요양병원을 마지막 안식처로 삼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스웨덴에서는 병실을 ‘안식처’다운 곳으로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가구가 반입되고, 커튼도 방마다 다르고, 식당도 호텔 분위기를 풍긴다.
‘집이든 요양원이든 병원이든 이 나라들에서는 죽을 때까지 살다 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으러 가는 곳’, ‘죽어야 나갈 수 있는 곳’ 등 죽기 전부터 이미 죽음과 다름없는 삶을 각오하고 살아야 하는 우리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북유럽에서는 가정 도우미를 시간제로 배치하여 집에서 살아가는 노인들의 24시간을 돌보고, 긴급 호출 시계나 목걸이를 사용해서 언제든 호출을 할 수 있다. 긴급 호출 버튼은 생사의 갈림길에서만 누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우미가 없는데 화장실에 가고 싶다거나, - 우리나라에서라면, 호출기 대신 기저귀가 주어질 것이다 - 오늘 밤은 TV가 재미있으니 재우러 오는 것은 이 프로가 끝난 후로 해달라거나, 어쩐지 적적해서 등 아주 소소하지만 어쩌면 그때그때 매우 필요하고 절실한 요구들을 해결해주는 도구이다.
저자가 덴마크의 96세 할머니의 집을 방문했을 때, 할머니가 긴급 호출 버튼을 설명해주다가 실수로 단추를 누른 듯했다. 조금 후에 두 명의 거인이 달려왔다. 상황 설명을 듣고는, 진심으로 안도하는 표정으로 크게 웃으며 ‘거 참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이러니 대한민국의 표준 국민인 내 입장에서는 ‘이런 사소한 것까지 막 요구해도 되나?’ ‘아이고 어쩌나~ 실수로 눌러버렸네!’라며 초조해질 수밖에...
이렇게 본인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것을 하며 보낼 수 있도록 세심하게 만들어진 제도 덕분에, 손가락 끝만 조금 움직일 수 있는 할아버지도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집에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북유럽이다. 그렇다고 ‘24시간 간병’같은 방식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도움을 주면서 본인 스스로 생활할 수 있도록 돕고, 응급 상황에서도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할 수 있다.
요양보호사가 집에 와 있는 시간만으로는 우리나라도 뒤지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수입 문제 때문에 짧은 시간을 원하는 요양보호사가 거의 없어서, 필요치 않더라도 주 5일 하루 3시간 정도의 방문 요양을 받아야만 하는 경우도 많다. 돌봄을 받는 사람의 필요와 욕구를 중심으로 어떻게 시스템을 만들어가야 할지, 근본적으로 새로운 위치와 입장에서 고민을 해야 할 때인 것 같다.
퇴원하면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병원에 그대로 누워지내는 노인이 많은 우리 사회와 달리 덴마크에서는 주민 누군가 입원하면, 방문 간호사가 입원 시점부터 병원 관계자들과 함께 퇴원 후 생활에 대해 계획을 세운다. 집에서 지낼 수 있도록 작업요법사, 물리요법사, 의사, 지역 사회복지사와 끊임없이 연락한다.
여러모로 꿈같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 내외인 대한민국에서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를 묻게 된다. 결코 오르지 못할 나무가 아닌데도, 그 정도로 염치없이 사회에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며 스스로 삶의 품위를 포기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런 생각을 주입하는 사회 구조와 세력들이 있는 것 아닐까?
몸이 부자유한 이들이 자긍심을 갖고 사는 사회는 나이가 들어 몸을 돌보기 어려워지더라도 자긍심을 갖고 살 수 있는 사회이다. 지적 혹은 정신적 장애를 입은 이들이 존중되는 사회는 치매가 시작되어도 존중되는 사회이다. 행복한 삶을 위해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경제 규모 못지않게 약함이 비참함으로 이어지지 않는 사회의 구조와 문화이다.
스웨덴의 사례 중 또 나를 놀라게 했던 것 중 하나는 외국인에 대한 그들의 정책이다. 스웨덴에는 150여 개 나라의 외국인들이 살고 있는데, 공공비용으로 그들에게 스웨덴어를 가르친다. 그럴 수 있겠다 싶다. 그런데, 아이들에게는 모국어도 가르친다. ‘아이들은 자기 의사로 스웨덴에 온 것이 아니다. 성장하면 귀국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그때 쉽게 모국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고유문화를 상실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약자는 무능한 도태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의 대상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어 보인다.
‘우리의 혈세를 저 외국인들한테?’라며 격분하는 우리의 모습이 그려진다. 공존과 연대보다는 경쟁이 삶의 원칙으로 자리 잡아 온 우리 사회에서는 이같은 역지사지는 매우 취하기 힘든 고난위도의 자세일지모르겠다.
스위스 의학자 폴 투르니에는 “노인을 어떻게 대접하는가에 그 사회의 품위가 드러납니다.”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의 품위는 어느 지점에 있는 걸까? 우리는 ’노인‘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 아마 그 이미지가 품위의 수준을 드러내 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