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남아는 우기에 가면 안 돼,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얼른 생각 바꿔,라는 말에 엄청나게 흔들렸더랬다. 마지막까지도 환불규정을 바라보며 ‘그런 것도 모르고. 내가 바보인 건가, 여행지를 바꿔야 하나’를 고민했었다. 그렇지만, 내가 가고 싶은 곳, 이라는 생각을 고수해서 코타키나발루에 왔다. 막상 와본 이곳에서, 현지인들은 따로 건기와 우기를 나누고 있지 않았다, 비라는 건 언제든 올 수 있는 것이고 2시간 오냐 6시간 오냐의 차이 정도라는 것이었다. 네이버의 우기건기 구분법은 이분법을 좋아하는 한국의 전형적인 결과물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실제로 우기 건기가 있긴 하다) 짜장면 아니면 짬뽕? 하는 말이 국룰 같이 느껴지듯, 생각보다 많은 경우에 이쪽 아니면 저쪽, 같은 이분법적인 이야기를 들어왔고 그런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적도 많았다. 아니, 나는 앞으로는 더더욱 잡채밥이 먹고 싶으면 잡채밥을 먹으면서 살 테다, 하고 다짐해 본다. 삶에는 정해진 답도, 방향도 없다. 그냥, 내가 사는 것일 뿐.
#2. 깨질 듯이 높고 맑은 코타키나발루의 하늘이 너무나도 예뻐서, 매일 아침 일어나면 제일 먼저 커튼을 걷고 하늘의 상태를 바라보며 ‘오늘은 맑게 해 주세요 비가 조금만 오게 해 주세요 ‘ 하고 여행 내내 기도했다. 이렇게까지 날마다, 시간마다 하늘을 올려다봤던 날이 있었던가. 비가 오고 안 오고, 구름이 끼고 안 끼고는 온전히 하늘의 뜻이다. 맑은 하늘을 보면 행복하여 감사했고, 조금이라도 구름이 걷히면 다행이다 하며 감사했고, 구름이 온통 앞을 가리면 걷힐 순간을 늘 조용히 기다리면서 감사했다. 돌아보니, 한 순간도, 감사하지 않았던 순간이 없었다. 숙소에서 자주 만나는 도마뱀이며, 고양이, 여러 종류의 새, 그리고 가끔 보이는 쥐까지... 이렇게 너를 오늘도 만나서 감사하다, 는 말이 입버릇처럼 붙었다. 자연 앞에 절로 겸손해지는 시간들이었다.
내가 배운 건... 먹구름이 걷히면, 선물 같은 맑은 하늘이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사랑스러운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워질 때도 있다는 것. 그렇지만 괜찮다, 먹구름은 또 지나갈 테니까.
#3. 여행을 가면 루틴처럼 책을 챙긴다. 조용한 나만의 시간에 독서는 여행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마법처럼 만나게 되는 문구들이 가슴속에 깊이 남는다. 요즘은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인생 선배들의 이야기가 많이 마음에 들어온다.
언젠가 친구가 편집한 책의 북콘서트에서 멀리서나마 뵈었던 가수 양희은은 인생 목표가 춤추는 눈빛(dancing eyes)이라고 하는 친구 이야기를 했더랬다. 살아있는 눈빛, 모든 것에 대해 웃을 수 있는 그런 눈. 나도, 춤추는 눈빛으로 살고 싶었다. 내 인생도 내 뜻대로 안 되는데, 하물며 남의 인생이라고 안 그럴까, ”걔도 오죽 여북했으면 그랬을까? 괜찮아. 그러라 그래. 그럴 수 있어! “ 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양희은, <그럴 수 있어> 책 중에서)
힘들고 어려운 인생길을, 어쩌면 그렇게 다들 멋지게 걷고 계신 걸까. 저 선배처럼 살고 싶다, 저렇게 살면 참 좋겠다.. 싶은 인생들이 참 많다. 인생이 한 번뿐인 건, 나에겐 조금은 아쉬운 일이다.
2023년 12월, 코타키나발루의 하늘